mahāsuññatasuttaṃ (MN 122-공(空)에 대한 큰 경) 189-191.
3. suññatavaggo, 2. mahāsuññatasuttaṃ (MN 122-공(空)에 대한 큰 경) 189-191.
“아난다여, 만약 이런 머묾으로 머무는 그 비구의 심(心)이 경행(輕行)으로 기울면, 그는 ‘이렇게 경행하는 나에게 간탐과 고뇌와 악한 불선법들이 흘러들지 않을 것이다.’라며 경행한다. 이렇게 거기서 옳고 그름을 판단한다. 아난다여, 만약 이런 머묾으로 머무는 그 비구의 심(心)이 서있음으로 기울면, 그는 ‘이렇게 서있는 나에게 간탐과 고뇌와 악한 불선법들이 흘러들지 않을 것이다.’라며 서있다. 이렇게 거기서 옳고 그름을 판단한다. 아난다여, 만약 이런 머묾으로 머무는 그 비구의 심(心)이 앉음으로 기울면, 그는 ‘이렇게 앉아있는 나에게 간탐과 고뇌와 악한 불선법들이 흘러들지 않을 것이다.’라며 앉아있다. 이렇게 거기서 옳고 그름을 판단한다. 아난다여, 만약 이런 머묾으로 머무는 그 비구의 심(心)이 누움으로 기울면, 그는 ‘이렇게 누워있는 나에게 간탐과 고뇌와 악한 불선법들이 흘러들지 않을 것이다.’라며 누워있다. 이렇게 거기서 옳고 그름을 판단한다.
아난다여, 만약 이런 머묾으로 머무는 그 비구의 심(心)이 이야기로 기울면, 그는 ‘왕에 대한 이야기거나, 도둑에 대한 이야기거나, 대신에 대한 이야기거나, 군대에 대한 이야기거나, 두려움에 대한 이야기거나, 전쟁에 대한 이야기거나, 음식에 대한 이야기거나, 마실 것에 대한 이야기거나, 옷에 대한 이야기거나, 침대에 대한 이야기거나, 화환에 대한 이야기거나, 향에 대한 이야기거나, 친척에 대한 이야기거나, 탈 것에 대한 이야기거나, 마을에 대한 이야기거나, 번화가에 대한 이야기거나, 도시에 대한 이야기거나, 국가에 대한 이야기거나, 여자에 대한 이야기거나, 영웅에 대한 이야기거나, 거리에 대한 이야기거나, 장독대에 대한 이야기거나, 죽은 자에 대한 이야기거나, 상이한 이야기거나, 세상에 대한 이야기거나, 바다에 대한 이야기거나, 존재와 비존재에 대해 이러하다는 이야기 등 저열하고 천박하고 평범하고 성스럽지 못하고 이익으로 이끌지 못하는 것이고, 염오(厭惡)로 이끌지 못하고, 이탐(離貪)으로 이끌지 못하고, 소멸(消滅)로 이끌지 못하고, 가라앉음으로 이끌지 못하고, 실다운 지혜로 이끌지 못하고, 깨달음으로 이끌지 못하고, 열반으로 이끌지 못하는 이런 이야기를 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이렇게 거기서 옳고 그름을 판단한다. 아난다여, 그는 ‘바라는 것이 적음에 대한 이야기, 만족에 대한 이야기, 여읨에 대한 이야기, 교류 않음에 대한 이야기, 정진의 시작에 대한 이야기, 계(戒)에 대한 이야기, 삼매에 대한 이야기, 지혜에 대한 이야기, 해탈에 대한 이야기, 해탈지견(解脫知見)에 대한 이야기 등 벗어남의 실천에 대한 것이고, 심(心)의 장애에서 벗어남에 적합한 것이고, 온전히 염오(厭惡)로, 이탐(離貪)으로, 소멸(消滅)로, 가라앉음으로, 실다운 지혜로, 깨달음으로, 열반으로 이끄는 이런 이야기를 할 것이다.’라고 이렇게 거기서 옳고 그름을 판단한다.
아난다여, 만약 이런 머묾으로 머무는 그 비구의 심(心)이 위딱까로 기울면, 그는 ‘소유의 위딱까, 분노의 위땃까, 폭력의 위딱까 등 저열하고 천박하고 평범하고 성스럽지 못하고 이익으로 이끌지 못하는 것이고, 염오(厭惡)로 이끌지 못하고, 이탐(離貪)으로 이끌지 못하고, 소멸(消滅)로 이끌지 못하고, 가라앉음으로 이끌지 못하고, 실다운 지혜로 이끌지 못하고, 깨달음으로 이끌지 못하고, 열반으로 이끌지 못하는 이런 위딱까를 떠올리지 않을 것이다.’라고 이렇게 거기서 옳고 그름을 판단한다. 아난다여, ‘출리(出離)의 위딱까, 분노 않음의 위딱까, 비폭력의 위딱까 등 성스러운 구원으로 이끄는 것이고, 그것을 실천하는 자를 바르게 괴로움의 부서짐으로 이끄는 이런 위딱까들을 나는 떠오르게 할 것이다.’라고 이렇게 거기서 옳고 그름을 판단한다.
아난다여, 이런 다섯 가지 소유의 사유에 묶인 것이 있다. 어떤 다섯인가? 원하고 좋아하고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고 소유의 사유를 수반하며 좋아하기 마련인 안(眼)으로 인식되는 색(色)들, … 이(耳)로 인식되는 성(聲)들 … 비(鼻)로 인식되는 향(香)들 … 설(舌)로 인식되는 미(味)들, 원하고 좋아하고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고 소유의 사유를 수반하며 좋아하기 마련인 신(身)으로 인식되는 촉(觸)들 ㅡ 아난다여, 이런 다섯 가지 소유의 사유에 묶인 것이 있다. 아난다여, 비구는 언제든지 ‘이런저런 경우에 이 다섯 가지 소유의 사유에 묶인 것에 대한 심(心)의 행위가 일어남이 나에게 있는가?’라고 자기의 심(心)을 돌이켜 살펴보아야 한다. 아난다여, 만약 심(心)을 돌이켜 살펴보는 비구가 ‘이런저런 경우에 이 다섯 가지 소유의 사유에 묶인 것에 대한 심(心)의 행위가 일어남이 나에게 있다.’라고 분명히 알면, 아난다여, 이렇게 있는 그 비구는 ‘이 다섯 가지 소유의 사유에 묶인 것에 대한 욕탐(欲貪)이 나에게서 버려지지 않았다.’라고 분명히 안다. 이렇게 거기서 옳고 그름을 판단한다. 다시, 아난다여, 만약 심(心)을 돌이켜 살펴보는 비구가 ‘이런저런 경우에 이 다섯 가지 소유의 사유에 묶인 것에 대한 심(心)의 행위가 일어남이 나에게 없다.’라고 분명히 알면, 아난다여, 이렇게 있는 그 비구는 ‘이 다섯 가지 소유의 사유에 묶인 것에 대한 욕탐(欲貪)이 나에게서 버려졌다.’라고 분명히 안다. 이렇게 거기서 옳고 그름을 판단한다.
아난다여, 이런 다섯 가지 집착된 무더기[오취온(五取蘊)]이 있다. 비구는 언제든지 자라남-줄어듦을 관찰하면서 머물러야 한다. ㅡ ‘이렇게 색(色)이 있고, 이렇게 색(色)의 자라남이 있고, 이렇게 색(色)의 줄어듦이 있다. 이렇게 수(受)가 있고 … 이렇게 상(想)이 있고 … 이렇게 행(行)들이 있고 … 이렇게 식(識)이 있고, 이렇게 식(識)의 자라남이 있고, 이렇게 식(識)의 줄어듦이 있다.’라고. 이런 다섯 가지 집착된 무더기에서 자라남-줄어듦을 관찰하면서 머무는 비구에게 다섯 가지 집착된 무더기에 대한 ‘나는 있다.’라는 자기화가 버려진다. 아난다여, 이렇게 있는 그 비구는 ‘이런 다섯 가지 집착된 무더기에 대해 ‘나는 있다.’라는 자기화는 버려졌다.’라고 분명히 안다. 이렇게 거기서 옳고 그름을 판단한다. 아난다여, 이런 그 법들은 온전히 유익하고, 유익함에 토대한 것이고, 성스럽고, 세상을 넘어선 것이고, 빠삐만뜨에 의해 극복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아난다여, 어떤 이유를 보는 제자는 비록 내쳐지더라도 스승을 따르는 것이 적합한가?” “대덕이시여, 참으로 법들은 세존을 뿌리로 하고, 세존을 도관(導管)으로 하고, 세존을 의지합니다. 대덕이시여, 이 말씀의 의미를 세존께서 분명히 해주시면 참으로 감사하겠습니다. 비구들은 세존에게서 듣고서 명심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