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suññatavaggo, 2. mahāsuññatasuttaṃ (MN 122-공(空)에 대한 큰 경)
3. suññatavaggo, 2. mahāsuññatasuttaṃ (MN 122-공(空)에 대한 큰 경)
이렇게 나는 들었다. ― 한때 세존은 삭까에서 까삘라왓투의 니그로다 사원에 머물렀다. 그때 세존은 오전에 옷차림을 바르게 하고 발우와 가사를 지니고 탁발을 위해서 까삘라왓투로 들어갔다. 까삘라왓투에서 탁발을 위해 돌아다닌 뒤에 오후에 탁발에서 돌아온 세존은 낮 동안의 머묾을 위해서 삭까의 깔라케마까 승원으로 갔다. 그때 삭까의 깔라케마까 승원에는 많은 거처가 준비되어 있었다. 세존은 삭까의 깔라케마까 승원에 많은 거처가 준비되어 있는 것을 보았다. 보고서 세존에게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 “삭까의 깔라케마까 승원에는 많은 거처가 준비되어 있다. 참으로 여기에는 많은 비구가 머무는가?”라고.
그때 아난다 존자가 많은 비구와 함께 삭까의 가따 승원에서 가사를 만들고 있었다. 저녁에 홀로 머묾에서 일어난 세존이 삭까의 가따 승원에 갔다. 가서는 준비된 자리에 앉았다. 자리에 앉은 뒤 세존은 아난다 존자에게 말했다. ― “아난다여, 삭까의 깔라케마까 승원에는 많은 거처가 준비되어 있다. 여기에 많은 비구가 머무는가?”라고. “대덕이시여, 삭까의 깔라케마까 승원에는 많은 거처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여기에는 많은 비구가 머뭅니다. 대덕이시여, 저희가 가사를 만드는 때입니다.
아난다여, 교제하기를 즐기고, 교제하기를 좋아하고, 교제하는 즐거움에 묶이고, 무리 짓기를 즐기고, 무리 짓기를 좋아하고, 무리 짓기를 기뻐하는 비구는 빛나지 않는다. 참으로, 아난다여, 교제하기를 즐기고, 교제하기를 좋아하고, 교제하는 즐거움에 묶이고, 무리 짓기를 즐기고, 무리 짓기를 좋아하고, 무리 짓기를 기뻐하는 비구가 출리(出離)의 즐거움, 여읨의 즐거움, 가라앉음의 즐거움, 깨달음의 즐거움을 원하는 대로 어렵지 않고 고통스럽지 않게 얻을 것이라는 경우는 없다. 그러나 아난다여, 무리로부터 가까이무리를 가까이 않고 머무는 어떤 비구가 출리(出離)의 즐거움, 여읨의 즐거움, 가라앉음의 즐거움, 깨달음의 즐거움을 원하는 대로 어렵지 않고 고통스럽지 않게 얻는 것을 바란다면, 그런 경우는 있다.
“so vatānanda, bhikkhu saṅgaṇikārāmo saṅgaṇikarato saṅgaṇikārāmataṃ anuyutto gaṇārāmo gaṇarato gaṇasammudito sāmāyikaṃ vā kantaṃ cetovimuttiṃ upasampajja viharissati asāmāyikaṃ vā akuppanti — netaṃ ṭhānaṃ vijjati. yo ca kho so, ānanda, bhikkhu eko gaṇasmā vūpakaṭṭho viharati tassetaṃ bhikkhuno pāṭikaṅkhaṃ sāmāyikaṃ vā kantaṃ cetovimuttiṃ upasampajja viharissati asāmāyikaṃ vā akuppanti — ṭhānametaṃ vijjati.
참으로, 아난다여, 교제하기를 즐기고, 교제하기를 좋아하고, 교제하는 즐거움에 묶이고, 무리 짓기를 즐기고, 무리 짓기를 좋아하고, 무리 짓기를 기뻐하는 비구가 일시적인 심해탈(心解脫)이나 일시적이지 않은 부동(不動)의 심해탈을 성취하여 머물 것이라는 경우는 없다. 그러나 아난다여, 무리를 가까이 않고 머무는 어떤 비구가 일시적인 심해탈(心解脫)이나 일시적이지 않은 부동(不動)의 심해탈을 성취하여 머물 것이라는 경우는 있다.
아난다여, 어디서든 좋아하고 어떻게든 즐거워하는 색(色)이 변하여 다른 것이 될 때 슬픔-비탄-고통-고뇌-절망이 생기지 않을 어떤 색(色)도 나는 보지 못한다.
아난다여, 모든 상(相)을 작의(作意)하지 않기 때문에 안으로 공(空)을 성취하여 머무는 여래가 깨달은 머묾이 있다. 만약에, 아난다여, 이런 머묾으로 머무는 여래에게 비구-비구니-남신자-여신자-왕-대신-외도-외도의 제자들이 방문한다면, 그때 심(心)이 떨침으로 굽고 떨침으로 경사지고 떨침으로 이끌리고 가까이 않고 출리를 기뻐하고 번뇌의 토대가 되는 법들로부터 온전하게 떠난 여래는 묶이지 않기를 확실히 권유하는 말을 한다. 그러므로, 아난다여, 만약에 비구가 ‘안으로 공(空)을 성취하여 머물러야겠다.’라고 원한다면, 아난다여, 그 비구는 심(心)을 안으로 진정시키고 가라앉게 하고 집중되게 하고 삼매에 들어야 한다.
그러면 아난다여, 어떻게 비구는 심(心)을 안으로 진정시키고 가라앉게 하고 집중되게 하고 삼매에 드는가? 여기, 아난다여, 비구는 소유의 삶에서 벗어나고, 불선법(不善法)들에서 … 초선(初禪)을 성취하여 머문다. … 제이선(第二禪)을 … 제삼선(第三禪)을 … 제사선(第四禪)을 성취하여 머문다. 이렇게, 아난다여, 비구는 심(心)을 안으로 진정시키고 가라앉게 하고 집중되게 하고 삼매에 든다. 그는 안으로 공(空)을 사고한다. 안으로 공(空)을 작의하는 그에게 심(心)은 공(空)으로 다가가지 않고 순일해지지 않고 안정되지 않고 해탈하지 않는다. 아난다여, 이런 때, 그 비구는 ‘안으로 공(空)을 작의하는 나에게 심(心)은 공(空)으로 다가가지 않고 순일해지지 않고 안정되지 않고 해탈하지 않는다.’라고 분명히 안다. 이렇게 그때 바른 앎이 있다. 그는 밖으로 공(空)을 사고한다 … 그는 안팎으로 공(空)을 사고한다 … 그는 흔들리지 않음을 사고한다. 안으로 흔들리지 않음을 작의하는 그에게 심(心)은 흔들리지 않음으로 다가가지 않고 순일해지지 않고 안정되지 않고 해탈하지 않는다. 아난다여, 이런 때, 그 비구는 ‘안으로 흔들리지 않음을 작의하는 나에게 심(心)은 흔들리지 않음으로 다가가지 않고 순일해지지 않고 안정되지 않고 해탈하지 않는다.’라고 분명히 안다. 이렇게 그때 바른 앎이 있다.
그로 인해, 아난다여, 비구는 그 이전의 삼매의 상(相)에 심(心)을 안으로 진정시키고 가라앉게 하고 집중되게 하고 삼매에 들어야 한다. 그는 안으로 공(空)을 사고한다. 안으로 공(空)을 작의하는 그에게 심(心)은 공(空)으로 다가가고 순일해지고 안정되고 해탈한다. 아난다여, 이런 때, 그 비구는 ‘안으로 공(空)을 작의하는 나에게 심(心)은 공(空)으로 다가가고 순일해지고 안정되고 해탈한다.’라고 분명히 안다. 이렇게 그때 바른 앎이 있다. 그는 밖으로 공(空)을 사고한다 … 그는 안팎으로 공(空)을 사고한다 … 그는 흔들리지 않음을 사고한다. 안으로 흔들리지 않음을 작의하는 그에게 심(心)은 흔들리지 않음으로 다가가고 순일해지고 안정되고 해탈한다. 아난다여, 이런 때, 그 비구는 ‘안으로 흔들리지 않음을 작의하는 나에게 심(心)은 흔들리지 않음으로 다가가고 순일해지고 안정되고 해탈한다.’라고 분명히 안다. 이렇게 그때 바른 앎이 있다.
“아난다여, 만약 이런 머묾으로 머무는 그 비구의 심(心)이 경행(輕行)으로 기울면, 그는 ‘이렇게 경행하는 나에게 간탐과 고뇌와 악한 불선법들이 흘러들지 않을 것이다.’라며 경행한다. 이렇게 그때 바른 앎이 있다. 아난다여, 만약 이런 머묾으로 머무는 그 비구의 심(心)이 서 있음으로 기울면, 그는 ‘이렇게 서 있는 나에게 간탐과 고뇌와 악한 불선법들이 흘러들지 않을 것이다.’라며 서 있다. 이렇게 그때 바른 앎이 있다. 아난다여, 만약 이런 머묾으로 머무는 그 비구의 심(心)이 앉음으로 기울면, 그는 ‘이렇게 앉아있는 나에게 간탐과 고뇌와 악한 불선법들이 흘러들지 않을 것이다.’라며 앉아있다. 이렇게 그때 바른 앎이 있다. 아난다여, 만약 이런 머묾으로 머무는 그 비구의 심(心)이 누움으로 기울면, 그는 ‘이렇게 누워있는 나에게 간탐과 고뇌와 악한 불선법들이 흘러들지 않을 것이다.’라며 누워있다. 이렇게 그때 바른 앎이 있다.
아난다여, 만약 이런 머묾으로 머무는 그 비구의 심(心)이 이야기로 기울면, 그는 ‘왕에 대한 이야기거나, 도둑에 대한 이야기거나, 대신에 대한 이야기거나, 군대에 대한 이야기거나, 두려움에 대한 이야기거나, 전쟁에 대한 이야기거나, 음식에 대한 이야기거나, 마실 것에 대한 이야기거나, 옷에 대한 이야기거나, 침대에 대한 이야기거나, 화환에 대한 이야기거나, 향에 대한 이야기거나, 친척에 대한 이야기거나, 탈 것에 대한 이야기거나, 마을에 대한 이야기거나, 번화가에 대한 이야기거나, 도시에 대한 이야기거나, 국가에 대한 이야기거나, 여자에 대한 이야기거나, 영웅에 대한 이야기거나, 거리에 대한 이야기거나, 장독대에 대한 이야기거나, 죽은 자에 대한 이야기거나, 상이한 이야기거나, 세상에 대한 이야기거나, 바다에 대한 이야기거나, 존재와 비존재에 대해 이러하다는 이야기 등 저열하고 천박하고 평범하고 성스럽지 못하고 이익으로 이끌지 못하는 것이고, 염오(厭惡)로 이끌지 못하고, 이탐(離貪)으로 이끌지 못하고, 소멸(消滅)로 이끌지 못하고, 가라앉음으로 이끌지 못하고, 실다운 지혜로 이끌지 못하고, 깨달음으로 이끌지 못하고, 열반으로 이끌지 못하는 이런 이야기를 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그때 바른 앎이 있다. 아난다여, 그는 ‘원하는 것이 적음에 대한 이야기, 만족에 대한 이야기, 여읨에 대한 이야기, 교류 않음에 대한 이야기, 열심히 정진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 계(戒)에 대한 이야기, 삼매에 대한 이야기, 지혜에 대한 이야기, 해탈에 대한 이야기, 해탈지견(解脫知見)에 대한 이야기 등 더 높은 삶에 대한 것이고, 심(心)의 장애에서 벗어남에 적합한 것이고, 온전히 염오(厭惡)로, 이탐(離貪)으로, 소멸(消滅)로, 가라앉음으로, 실다운 지혜로, 깨달음으로, 열반으로 이끄는 이런 이야기를 할 것이다.’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그때 바른 앎이 있다.
만약에, 아난다여, 이런 머묾으로 머무는 그 비구의 심(心)이 위딱까로 기울면, 그는 ‘소유의 위딱까, 분노의 위딱까, 폭력의 위딱까 등 저열하고 천박하고 평범하고 성스럽지 못하고 이익으로 이끌지 못하는 것이고, 염오(厭惡)로 이끌지 못하고, 이탐(離貪)으로 이끌지 못하고, 소멸(消滅)로 이끌지 못하고, 가라앉음으로 이끌지 못하고, 실다운 지혜로 이끌지 못하고, 깨달음으로 이끌지 못하고, 열반으로 이끌지 못하는 이런 위딱까를 떠올리지 않을 것이다.’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그때 바른 앎이 있다. 아난다여, ‘출리(出離)의 위딱까, 분노 않음의 위딱까, 비폭력의 위딱까 등 성스러운 구원으로 이끄는 것이고, 그것을 실천하는 자를 바르게 괴로움의 부서짐으로 이끄는 이런 위딱까들을 나는 떠오르게 할 것이다.’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그때 바른 앎이 있다.
아난다여, 이런 다섯 가지 소유의 사유에 묶인 것이 있다. 어떤 다섯인가? 원하고 좋아하고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고 소유의 사유를 수반하며 좋아하기 마련인 안(眼)으로 인식되는 색(色)들, … 이(耳)로 인식되는 성(聲)들 … 비(鼻)로 인식되는 향(香)들 … 설(舌)로 인식되는 미(味)들, 원하고 좋아하고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고 소유의 사유를 수반하며 좋아하기 마련인 신(身)으로 인식되는 촉(觸)들 ― 아난다여, 이런 다섯 가지 소유의 사유에 묶인 것이 있다. 아난다여, 비구는 언제든지 ‘이런저런 경우에 이 다섯 가지 소유의 사유에 묶인 것에 대한 심(心)의 행위가 나에게 일어나는가?’라고 자기의 심(心)을 돌이켜 살펴보아야 한다. 아난다여, 만약 심(心)을 돌이켜 살펴보는 비구가 ‘이런저런 경우에 이 다섯 가지 소유의 사유에 묶인 것에 대한 심(心)의 행위가 나에게 일어난다.’라고 분명히 알면, 아난다여, 이렇게 있는 그 비구는 ‘이 다섯 가지 소유의 사유에 묶인 것에 대한 욕탐(欲貪)이 나에게서 버려지지 않았다.’라고 분명히 안다. 이렇게 그때 바른 앎이 있다. 다시, 아난다여, 만약 심(心)을 돌이켜 살펴보는 비구가 ‘이런저런 경우에 이 다섯 가지 소유의 사유에 묶인 것에 대한 심(心)의 행위가 나에게 일어나지 않는다.’라고 분명히 알면, 아난다여, 이렇게 있는 그 비구는 ‘이 다섯 가지 소유의 사유에 묶인 것에 대한 욕탐(欲貪)이 나에게서 버려졌다.’라고 분명히 안다. 이렇게 그때 바른 앎이 있다.
아난다여, 이런 다섯 가지 집착된 무더기[오취온(五取蘊)]가 있다. 비구는 언제든지 생겨남-무너짐을 관찰하면서 머물러야 한다. ― ‘이렇게 색(色)이 있고, 이렇게 색(色)의 자라남이 있고, 이렇게 색(色)의 줄어듦이 있다. 이렇게 수(受)가 있고 … 이렇게 상(想)이 있고 … 이렇게 행(行)들이 있고 … 이렇게 식(識)이 있고, 이렇게 식(識)의 자라남이 있고, 이렇게 식(識)의 줄어듦이 있다.’라고. 이런 다섯 가지 집착된 무더기에서 생겨남-무너짐을 관찰하면서 머무는 비구에게 다섯 가지 집착된 무더기에 대한 ‘나는 있다.’라는 자기화가 버려진다. 아난다여, 이렇게 있는 그 비구는 ‘이런 다섯 가지 집착된 무더기에 대해 ‘나는 있다.’라는 자기화는 버려졌다.’라고 분명히 안다. 이렇게 그때 바른 앎이 있다. 아난다여, 이런 그 법들은 온전히 유익하고, 유익함에 토대한 것이고, 성스럽고, 세상을 넘어선 것이고, 빠삐만뜨에 의해 극복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아난다여, 어떤 이유를 볼 때, 비록 내쳐지더라도 제자는 스승을 따르는 것이 적합한가?” “대덕이시여, 참으로 법들은 세존을 뿌리로 하고, 세존을 도관(導管)으로 하고, 세존을 의지합니다. 대덕이시여, 이 말씀의 의미를 세존께서 분명히 해주시면 참으로 감사하겠습니다. 비구들은 세존에게서 듣고서 명심할 것입니다.”
제자가 스승을 따르는 것은 경(經), 응송(應頌), 수기(授記)를 위한 원인으로 적합하지 않다. 그것의 원인은 무엇인가? 참으로, 아난다여, 오랫동안 듣고 만족하고 말에 의해 익숙해지고 의(意)로써 이어보고 견해로써 잘 꿰뚫은 그 법들이 있다. 비록 내쳐질지라도, 아난다여, 제자가 스승을 따르는 것은 ‘원하는 것이 적음에 대한 이야기, 만족에 대한 이야기, 여읨에 대한 이야기, 교류 않음에 대한 이야기, 열심히 정진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 계(戒)에 대한 이야기, 삼매에 대한 이야기, 지혜에 대한 이야기, 해탈에 대한 이야기, 해탈지견(解脫知見)에 대한 이야기 등 더 높은 삶에 대한 것이고, 심(心)의 장애에서 벗어남에 적합한 것이고, 온전히 염오(厭惡)로, 이탐(離貪)으로, 소멸(消滅)로, 가라앉음으로, 실다운 지혜로, 깨달음으로, 열반으로 이끄는 이런 이야기를 위한 원인으로 적합하다.
이런 때에, 아난다여, 스승의 불행이 있다. 이런 때에 제자의 불행이 있다. 이런 때에 범행(梵行)을 실천하는 자의 불행이 있다.
그러면 아난다여, 어떻게 스승의 불행이 있는가? 여기, 아난다여, 어떤 스승은 숲속이나 나무 아래나 산이나 골짜기나 산속 동굴이나 묘지나 밀림이나 노지나 짚더미와 같은 외딴 처소를 의지한다. 그렇게 가까이 않고 머무는 그에게 번화가나 지방에 있는 바라문이나 장자들이 찾아온다. 그는 번화가나 지방에 있는 바라문이나 장자들이 찾아왔을 때 얼이 빠져 갈망하고, 욕심에 떨어지고, 풍족한 삶으로 돌아간다. 이것이, 아난다여, 스승의 불행이라고 불린다. 스승의 불행에 처했을 때 그에게 오염원이고 다시 존재로 이끌고 두렵고 괴로운 보(報)를 가져오고 미래의 태어남과 늙음과 죽음으로 이끄는 악한 불선법(不善法)이 있다. 이렇게, 아난다여, 스승의 불행이 있다.
그러면 아난다여, 어떻게 제자의 불행이 있는가? 다시, 아난다여, 그 스승의 떨침을 이어가는 그 스승의 제자는 숲속이나 나무 아래나 산이나 골짜기나 산속 동굴이나 묘지나 밀림이나 노지나 짚더미와 같은 외딴 처소를 의지한다. 그렇게 가까이 않고 머무는 그에게 번화가나 지방에 있는 바라문이나 장자들이 찾아온다. 그는 번화가나 지방에 있는 바라문이나 장자들이 찾아왔을 때 얼이 빠져 갈망하고, 욕심에 떨어지고, 풍족한 삶으로 돌아간다. 이것이, 아난다여, 제자의 불행이라고 불린다. 제자의 불행에 처했을 때 그에게 오염원이고 다시 존재로 이끌고 두렵고 괴로운 보(報)를 가져오고 미래의 태어남과 늙음과 죽음으로 이끄는 악한 불선법(不善法)이 있다. 이렇게, 아난다여, 제자의 불행이 있다.
그러면 아난다여, 어떻게 범행(梵行)을 실천하는 자의 불행이 있는가? 여기, 아난다여, 아라한-정등각-명행족-선서-세간해-무상조어장부-천인사-불-세존인 여래가 세상에 출현한다. 그는 숲속이나 나무 아래나 산이나 골짜기나 산속 동굴이나 묘지나 밀림이나 노지나 짚더미와 같은 외딴 처소를 의지한다. 그렇게 가까이 않고 머무는 그에게 번화가나 지방에 있는 바라문이나 장자들이 찾아온다. 그는 번화가나 지방에 있는 바라문이나 장자들이 찾아왔을 때 얼이 빠져 갈망하지 않고, 욕심에 떨어지지 않고, 풍족한 삶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아난다여, 그 스승의 떨침을 이어가는 그 스승의 제자는 숲속이나 나무 아래나 산이나 골짜기나 산속 동굴이나 묘지나 밀림이나 노지나 짚더미와 같은 외딴 처소를 의지한다. 그렇게 가까이 않고 머무는 그에게 번화가나 지방에 있는 바라문이나 장자들이 찾아온다. 그는 번화가나 지방에 있는 바라문이나 장자들이 찾아왔을 때 얼이 빠져 갈망하고, 욕심에 떨어지고, 풍족한 삶으로 돌아간다. 이것이, 아난다여, 범행을 실천하는 자의 불행이라고 불린다. 범행을 실천하는 자의 불행에 처했을 때 그에게 오염원이고 다시 존재로 이끌고 두렵고 괴로운 보(報)를 가져오고 미래의 태어남과 늙음과 죽음으로 이끄는 악한 불선법(不善法)이 있다. 이렇게, 아난다여, 범행을 실천하는 자의 불행이 있다.
거기서, 아난다여, 이런 스승의 불행, 이런 제자의 불행보다 이런 범행을 실천하는 자의 불행이 보(報)가 더 괴롭고, 보(報)가 더 혹독하고, 심지어 벌 받는 상태로 이끈다.
그러므로 아난다여, 나를 종교적 삶의 친구로 삼아라. 종교적 삶의 적으로 삼지 말라. 그러면 그대들에게 오랫동안 이익과 행복이 될 것이다.
그러면 아난다여, 제자들은 어떻게 스승을 적으로 삼고, 친구로 삼지 않는가? 여기, 아난다여, 동정하고 그들의 이익을 바라는 스승은 연민을 일으켜 제자들을 위해 법을 설한다. ‘이것은 그대들의 이익을 위한 것이고, 이것은 그대들의 행복을 위한 것이다.’라고. 그의 제자들은 들으려 하지 않고 귀 기울이지 않고 무위(無爲)의 앎을 위한 심(心)을 일으키지 않는다. 그들은 스승의 교법에서 벗어나서 살아간다. 이렇게, 아난다여, 제자들은 스승을 적으로 삼고, 친구로 삼지 않는다.
그러면 아난다여, 제자들은 어떻게 스승을 친구로 삼고, 적으로 삼지 않는가? 여기, 아난다여, 동정하고 그들의 이익을 바라는 스승은 연민을 일으켜 제자들을 위해 법을 설한다. ‘이것은 그대들의 이익을 위한 것이고, 이것은 그대들의 행복을 위한 것이다.’라고. 그의 제자들은 들으려 하고 귀 기울이고 무위(無爲)의 앎을 위한 심(心)을 일으킨다. 그들은 스승의 교법에서 벗어나지 않고 살아간다. 이렇게, 아난다여, 제자들은 스승을 친구로 삼고, 적으로 삼지 않는다.
그러므로 아난다여, 나를 종교적 삶의 친구로 삼아라. 종교적 삶의 적으로 삼지 말라. 그러면 그대들에게 오랫동안 이익과 행복이 될 것이다. 아난다여, 나는 옹기장이가 굽지 않은 옹기를 조심조심 다루듯이 그대들에게 애쓰지 않을 것이다. 아난다여, 나는 거듭 지적하면서 말할 것이다. 아난다여, 나는 끊임없이 끊임없이 말할 것이다. 강한 자는 머물 것이다.”
세존은 이렇게 말했다. 그 비구들은 즐거워하면서 세존의 말씀을 기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