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araṇavibhaṅgasuttaṃ (MN 139-평화의 분석 경)
4. vibhaṅgavaggo, 9. araṇavibhaṅgasuttaṃ (MN 139-평화의 분석 경)
• raṇa: war; battle; sin; fault. (nt.) 다툼
→ saraṇa2 (adj.) [sa+raṇa] concomitant with war 분쟁(紛爭)
→ araṇa2 (nt.) [a + raṇa] quietude, peace 무쟁(無諍). 평화
이렇게 나는 들었다. ― 한때 세존은 사왓티에서 제따와나의 아나타삔디까 사원에 머물렀다. 그때 세존은 “비구들이여.”라고 비구들을 불렀다. “대덕이시여.”라고 그 비구들은 세존에게 대답했다. 세존은 “비구들이여, 그대들에게 평화의 분석을 설할 것이다. 그것을 듣고 잘 사고하라. 나는 말하겠다.”라고 말했다. “알겠습니다, 대덕이시여.”라고 그 비구들은 세존에게 대답했다. 세존은 이렇게 말했다. ―
“저열하고 천박하고 범속하고 성스럽지 못하고 이익을 가져오지 않는 소유의 즐거움을 실천하지 않아야 하고, 괴롭고 성스럽지 못하고 이익을 가져오지 않고 자신을 지치게 하는 실천을 하지 않아야 한다. 비구들이여, 이런 양 끝을 가까이하지 않고서 여래가 깨달은 중도(中道)는 안(眼)을 만들고, 지(知)를 만들고, 가라앉음으로 실다운 지혜로 깨달음으로 열반으로 이끈다. 칭찬을 알아야 하고 비난을 알아야 한다. 칭찬을 알고 비난을 알고서 칭찬도 하지 말고 비난도 하지 말고 법을 설해야 한다. 즐거움을 판단할 줄 알아야 한다. 즐거움을 판단하고서 내적인 즐거움을 실천해야 한다. 뒤에서 말하지 않아야 하고, 앞에서 찌르는 말도 하지 않아야 한다. 서둘지 말고, 차분하게 말해야 한다. 지역의 언어로 기울지 말고, 명칭의 한계를 넘지 않아야 한다. ― 이것이 평화의 분석을 위한 개요다.
‘저열하고 천박하고 범속하고 성스럽지 못하고 이익을 가져오지 않는 소유의 즐거움을 실천하지 않아야 하고, 괴롭고 성스럽지 못하고 이익을 가져오지 않고 자신을 지치게 하는 실천을 하지 않아야 한다.’라고 말했다. 이것은 무엇을 연하여 말했는가?
저열하고 천박하고 범속하고 성스럽지 못하고 이익을 가져오지 않는 소유의 사유와 연결되어 행복해하고 만족해하는 것은 괴로움과 고통과 절망과 열기가 함께하는 삿된 실천이다. 저열하고 천박하고 범속하고 성스럽지 못하고 이익을 가져오지 않는 소유의 사유와 연결되어 행복해하고 만족해하지 않는 것은 괴로움과 고통과 절망과 열기가 없는 바른 실천이다.
괴롭고 성스럽지 못하고 이익을 가져오지 않고 자신을 지치게 하는 실천은 괴로움과 고통과 절망과 열기가 함께하는 삿된 실천이다. 괴롭고 성스럽지 못하고 이익을 가져오지 않고 자신을 지치게 하는 실천을 하지 않는 것은 괴로움과 고통과 절망과 열기가 없는 바른 실천이다.
이것을 연하여 ‘저열하고 천박하고 범속하고 성스럽지 못하고 이익을 가져오지 않는 소유의 즐거움을 실천하지 않아야 하고, 괴롭고 성스럽지 못하고 이익을 가져오지 않고 자신을 지치게 하는 실천을 하지 않아야 한다.’라고 말했다.
‘이런 양 끝을 가까이하지 않고서 여래가 깨달은 중도는 안을 만들고, 지를 만들고, 가라앉음으로 실다운 지혜로 깨달음으로 열반으로 이끈다.’라고 말했다. 이것은 무엇을 연하여 말했는가? 오직 이것, 정견-정사유-정어-정업-정명-정정진-정념-정정의 여덟 요소로 구성된 성스러운 도가 있다. 이것을 연하여 ‘이런 양 끝을 가까이하지 않고서 여래가 깨달은 중도는 안을 만들고, 지를 만들고, 가라앉음으로 실다운 지혜로 깨달음으로 열반으로 이끈다.’라고 말했다.
• jānaṃ(jānanto) ― jānanta(pr.p. of jānāti)의 m.s.
• passaṃ(passanto) ― passanta(pt.p. of passati)의 m.s
→ vadaṃ(vadanto) ― vadanta(pr.p. of vadati)의 m.s
‘칭찬을 알아야 하고 비난을 알아야 한다. 칭찬을 알고 비난을 알고서 칭찬도 하지 말고 비난도 하지 말고 법을 설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이것은 무엇을 연하여 말했는가?
그러면 비구들이여, 어떻게 칭찬과 비난은 하면서 법을 설하지 않는가? ‘저열하고 천박하고 범속하고 성스럽지 못하고 이익을 가져오지 않는 소유에 연결된 즐거움과 만족을 실천하는 자들은 모두 괴로움이 함께하고 충격이 함께하고 절망이 함께하고 열기가 함께하는 삿된 실천을 하는 자다.’라고 말하는 자는 세상에서 어떤 자들을 비난한다.
‘저열하고 천박하고 범속하고 성스럽지 못하고 이익을 가져오지 않는 소유에 연결된 즐거움과 만족을 실천하지 않는 자들은 모두 괴로움이 없고 충격이 없고 절망이 없고 열기가 없는 바른 실천을 하는 자다.’라고 말하는 자는 세상에서 어떤 자들을 칭찬한다.
‘괴롭고 성스럽지 못하고 이익을 가져오지 않고 자신을 지치게 하는 실천을 하는 자들은 모두 괴로움이 함께하고 충격이 함께하고 절망이 함께하고 열기가 함께하는 삿된 실천을 하는 자다.’라고 말하는 자는 세상에서 어떤 자들을 비난한다.
‘괴롭고 성스럽지 못하고 이익을 가져오지 않고 자신을 지치게 하는 실천을 하지 않는 자들은 모두 괴로움이 없고 충격이 없고 절망이 없고 열기가 없는 바른 실천을 하는 자다.’라고 말하는 자는 세상에서 어떤 자들을 칭찬한다.
‘존재의 족쇄를 버리지 못했다면 누구든지 모두 괴로움이 함께하고 충격이 함께하고 절망이 함께하고 열기가 함께하는 삿된 실천을 하는 자다.’라고 말하는 자는 세상에서 어떤 자들을 비난한다.
‘존재의 족쇄를 버렸다면 누구든지 모두 괴로움이 없고 충격이 없고 절망이 없고 열기가 없는 바른 실천을 하는 자다.’라고 말하는 자는 세상에서 어떤 자들을 칭찬한다. 이렇게, 비구들이여, 칭찬과 비난은 하면서 법을 설하지 않는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어떻게 칭찬과 비난은 하지 않으면서 법을 설하는가? ‘저열하고 천박하고 범속하고 성스럽지 못하고 이익을 가져오지 않는 소유에 연결된 즐거움과 만족을 실천하는 자들은 모두 괴로움이 함께하고 충격이 함께하고 절망이 함께하고 열기가 함께하는 삿된 실천을 하는 자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또한, ‘이 법을 실천하여 괴로움이 함께하고 충격이 함께하고 절망이 함께하고 열기가 함께하는 것은 삿된 실천이다.’라고 말하는 자는 오직 법을 설한다.
‘저열하고 천박하고 범속하고 성스럽지 못하고 이익을 가져오지 않는 소유에 연결된 즐거움과 만족을 실천하지 않는 자들은 모두 괴로움이 없고 충격이 없고 절망이 없고 열기가 없는 바른 실천을 하는 자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또한, ‘이 법을 실천하지 않아 괴로움이 없고 충격이 없고 절망이 없고 열기가 없는 것이 바른 실천이다.’라고 말하는 자는 오직 법을 설한다.
‘괴롭고 성스럽지 못하고 이익을 가져오지 않고 자신을 지치게 하는 실천을 하는 자들은 모두 괴로움이 함께하고 충격이 함께하고 절망이 함께하고 열기가 함께하는 삿된 실천을 하는 자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또한, ‘이 법을 실천하여 괴로움이 함께하고 충격이 함께하고 절망이 함께하고 열기가 함께하는 것은 삿된 실천이다.’라고 말하는 자는 오직 법을 설한다.
‘괴롭고 성스럽지 못하고 이익을 가져오지 않고 자신을 지치게 하는 실천을 하지 않는 자들은 모두 괴로움이 없고 충격이 없고 절망이 없고 열기가 없는 바른 실천을 하는 자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또한, ‘이 법을 실천하지 않아 괴로움이 없고 충격이 없고 절망이 없고 열기가 없는 것이 바른 실천이다.’라고 말하는 자는 오직 법을 설한다.
‘존재의 족쇄를 버리지 못했다면 누구든지 모두 괴로움과 함께하고 충격과 함께하고 절망과 함께하고 열기가 함께하는 삿된 실천을 하는 자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존재의 족쇄가 버려지지 않을 때 존재도 버려지지 않는다.’라고 말하는 자는 오직 법을 설한다.
‘존재의 족쇄를 버렸다면 누구든지 모두 괴로움이 없고 충격이 없고 절망이 없고 열기가 없는 바른 실천을 하는 자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존재의 족쇄가 버려질 때 존재도 버려진다.’라고 말하는 자는 오직 법을 설한다. 이렇게, 비구들이여, 칭찬과 비난은 하지 않으면서 법을 설한다. ‘칭찬을 알아야 하고 비난을 알아야 한다. 칭찬을 알고 비난을 알고서 칭찬도 하지 말고 비난도 하지 말고 법을 설해야 한다.’라고 말한 것은 이것을 연하여 말했다.
‘즐거움을 판단할 줄 알아야 한다. 즐거움을 판단하고서 내적인 즐거움을 실천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이것은 무엇을 연하여 말했는가? 비구들이여, 이런 다섯 가지 소유의 사유에 묶인 것이 있다. 어떤 다섯 가지인가? 원하고 좋아하고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고 소유의 사유를 수반하며 좋아하기 마련인 안(眼)으로 인식해야 하는 색(色)들 … 이(耳)로 인식해야 하는 성(聲)들 … 비(鼻)로 인식해야 하는 향(香)들 … 설(舌)로 인식해야 하는 미(味)들 … 원하고 좋아하고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고 소유의 사유를 수반하며 좋아하기 마련인 신(身)으로 인식해야 하는 촉(觸)들 ― 이것이, 비구들이여, 다섯 가지 소유의 사유에 묶인 것이다. 비구들이여, 이런 다섯 가지 소유의 사유에 묶인 것을 연하여 생기는 즐거움과 만족이 소유의 즐거움, 불결한 즐거움, 평범한 즐거움, 성스럽지 못한 즐거움이라고 불린다. ‘그 즐거움은 실천하지 않아야 하고, 닦지 않아야 하고, 많이 행하지 않아야 하고, 두려워해야 한다.’라고 나는 말한다. 비구들이여, 비구는 소유의 삶에서 벗어나고, 불선법들에서 벗어나서, 위딱까가 있고 위짜라가 있고 떨침에서 생긴 기쁨과 즐거움의 초선을 성취하여 머문다. 위딱까와 위짜라의 가라앉음으로 인해, 안으로 평온함과 마음의 집중된 상태가 되어, 위딱까도 없고 위짜라도 없이, 삼매에서 생긴 기쁨과 즐거움의 제2선을 성취하여 머문다. 기쁨의 바램으로부터 평정하게 머물고, 사띠와 바른 앎을 가지고 몸으로 즐거움을 경험하면서, 성인들이 ‘평정을 가진 자, 사띠를 가진 자, 즐거움에 머무는 자’라고 말하는 제3선을 성취하여 머문다. 즐거움의 버림과 괴로움의 버림으로부터, 이미 만족과 불만들의 사라짐으로부터, 괴로움도 즐거움도 없고 평정과 청정한 사띠의 제4선을 성취하여 머문다. 이것이 출리의 즐거움, 여읨의 즐거움, 가라앉음의 즐거움, 깨달음의 즐거움이라고 불린다. ‘그 즐거움은 실천해야 하고, 닦아야 하고, 많이 행해야 하고, 두려워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나는 말한다. ‘즐거움을 판단할 줄 알아야 한다. 즐거움을 판단하고서 내적인 즐거움을 실천해야 한다.’라고 말한 것은 이것을 연하여 말했다.
‘뒤에서 말하지 않아야 하고, 앞에서 찌르는 말도 하지 않아야 한다.’라고 말했다. 이것은 무엇을 연하여 말했는가? 거기서, 비구들이여, 사실이 아니고 정당하지 않고 이익으로 이끌지 않는다고 안다면 뒤에서 하는 말을 절대 하지 않아야 한다. 사실이고 정당하지만, 이익으로 이끌지 않는다고 안다면 뒤에서 하는 말을 하지 않도록 애써야 한다. 사실이고 정당하고 이익으로 이끈다고 안다면 그 뒤에서 하는 말을 하기에 적절한 때를 알아야 한다. 거기서, 비구들이여, 사실이 아니고 정당하지 않고 이익으로 이끌지 않는다고 안다면 앞에서 찌르는 말을 절대 하지 않아야 한다. 사실이고 정당하지만, 이익으로 이끌지 않는다고 안다면 앞에서 찌르는 말을 하지 않도록 애써야 한다. 사실이고 정당하고 이익으로 이끈다고 안다면 그 앞에서 찌르는 말을 하기에 적절한 때를 알아야 한다. ‘뒤에서 말하지 않아야 하고, 앞에서 찌르는 말도 하지 않아야 한다.’라고 말한 것은 이것을 연하여 말했다.
‘서둘지 말고, 차분하게 말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이것은 무엇을 연하여 말했는가? 거기서, 비구들이여, 서둘러 말하는 사람에게 몸도 피곤하고 심(心)도 불편하고 소리도 불편하고 목도 아프다. 서둘러 말하는 사람의 말은 뚜렷하지 못하고 이해되지 않는다. 거기서, 비구들이여, 서둘러 말하지 않는 사람에게 몸도 피곤하지 않고 심도 불편하지 않고 소리도 불편하지 않고 목도 아프지 않다. 서둘러 말하지 않는 사람의 말은 뚜렷하고 이해된다. ‘서둘지 말고, 차분하게 말해야 한다.’라고 말한 것은 이것을 연하여 말했다.
‘지역의 언어로 기울지 말고, 명칭의 한계를 넘지 않아야 한다.’라고 말했다. 이것은 무엇을 연하여 말했는가? 그러면 비구들이여, 어떻게 지역의 언어로 기울고 명칭의 한계를 넘는가? 여기 비구들이여, 그것을 어떤 지역에서는 접시라고 부르고, 발우라고 부르고, 사발이라고 부르고, 컵이라고 부르고, 냄비라고 부르고, 단지라고 부르고, 잔이라고 부르고, 그릇이라고 부른다. 이렇게 그 지역대로 부르는 대로 강하게 집착된 기움에 의해 ‘이것만이 참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라고 말한다. 이렇게, 비구들이여, 지역의 언어로 기울고 명칭의 한계를 넘는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어떻게 지역의 언어로 기울지 않고, 명칭의 한계를 넘지 않는가? 여기 비구들이여, 그것을 어떤 지역에서는 접시라고 부르고, 발우라고 부르고, 사발이라고 부르고, 컵이라고 부르고, 냄비라고 부르고, 단지라고 부르고, 잔이라고 부르고, 그릇이라고 부른다. 이렇게 그 지역대로 부르는 대로 ‘참으로 존자들은 이것과 관련해서 나에게 말한다.’라고 집착하지 않고 말한다. 이렇게, 비구들이여, 지역의 언어로 기울지 않고 명칭의 한계를 넘지 않는다. ‘지역의 언어로 기울지 말고, 명칭의 한계를 넘지 않아야 한다.’라고 말한 것은 이것을 연하여 말했다.
거기서 비구들이여, 저열하고 천박하고 범속하고 성스럽지 못하고 이익을 가져오지 않는 소유에 연결된 즐거움과 만족을 실천하는 법은 괴로움이 함께하고 충격이 함께하고 절망이 함께하고 열기가 함께하는 삿된 실천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분쟁의 법이다. 거기서 비구들이여, 저열하고 천박하고 범속하고 성스럽지 못하고 이익을 가져오지 않는 소유에 연결된 즐거움과 만족을 실천하지 않는 법은 괴로움과 고통과 절망과 열기가 없는 바른 실천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평화의 법이다.
거기서 비구들이여, 괴롭고 성스럽지 못하고 이익을 가져오지 않고 자신을 지치게 하는 실천을 하는 법은 괴로움이 함께하고 충격이 함께하고 절망이 함께하고 열기가 함께하는 삿된 실천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분쟁의 법이다. 거기서 비구들이여, 괴롭고 성스럽지 못하고 이익을 가져오지 않고 자신을 지치게 하는 실천을 하지 않는 법은 괴로움과 고통과 절망과 열기가 없는 바른 실천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평화의 법이다.
거기서 비구들이여, 안(眼)을 만들고, 지(知)를 만들고, 가라앉음으로 실다운 지혜로 깨달음으로 열반으로 이끄는 여래가 깨달은 중도(中道), 이 법은 괴로움과 고통과 절망과 열기가 없는 바른 실천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평화의 법이다.
거기서 비구들이여, 칭찬과 비난은 하면서 법을 설하지 않는 법은 괴로움이 함께하고 충격이 함께하고 절망이 함께하고 열기가 함께하는 삿된 실천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분쟁의 법이다. 거기서 비구들이여, 칭찬과 비난은 하지 않으면서 법을 설하는 법은 괴로움과 고통과 절망과 열기가 없는 바른 실천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평화의 법이다.
거기서 비구들이여, 소유의 즐거움, 불결한 즐거움, 평범한 즐거움, 성스럽지 못한 즐거움이 있는 법은 괴로움이 함께하고 충격이 함께하고 절망이 함께하고 열기가 함께하는 삿된 실천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분쟁의 법이다. 거기서 비구들이여, 출리의 즐거움, 여읨의 즐거움, 가라앉음의 즐거움, 깨달음의 즐거움이 있는 법은 괴로움과 고통과 절망과 열기가 없는 바른 실천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평화의 법이다.
거기서 비구들이여, 사실이 아니고 정당하지 않고 이익으로 이끌지 않는, 뒤에서 하는 말이 있는 법은 괴로움이 함께하고 충격이 함께하고 절망이 함께하고 열기가 함께하는 삿된 실천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분쟁의 법이다. 거기서 비구들이여, 사실이고 정당하지만, 이익으로 이끌지 않는, 뒤에서 하는 말이 있는 법은 괴로움이 함께하고 충격이 함께하고 절망이 함께하고 열기가 함께하는 삿된 실천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분쟁의 법이다. 거기서 비구들이여, 사실이고 정당하고 이익으로 이끄는, 뒤에서 하는 말이 있는 법은 괴로움과 고통과 절망과 열기가 없는 바른 실천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평화의 법이다.
거기서 비구들이여, 사실이 아니고 정당하지 않고 이익으로 이끌지 않는, 앞에서 찌르는 말이 있는 법은 괴로움이 함께하고 충격이 함께하고 절망이 함께하고 열기가 함께하는 삿된 실천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분쟁의 법이다. 거기서 비구들이여, 사실이고 정당하지만, 이익으로 이끌지 않는, 앞에서 찌르는 말이 있는 법은 괴로움이 함께하고 충격이 함께하고 절망이 함께하고 열기가 함께하는 삿된 실천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분쟁의 법이다. 거기서 비구들이여, 사실이고 정당하고 이익으로 이끄는, 앞에서 찌르는 말이 있는 법은 괴로움과 고통과 절망과 열기가 없는 바른 실천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평화의 법이다.
거기서 비구들이여, 서둘러 말하는 법은 괴로움이 함께하고 충격이 함께하고 절망이 함께하고 열기가 함께하는 삿된 실천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분쟁의 법이다. 거기서 비구들이여, 서둘러 말하지 않는 법은 괴로움과 고통과 절망과 열기가 없는 바른 실천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평화의 법이다.
거기서 비구들이여, 지역의 언어로 기울고 명칭의 한계를 넘는 법은 괴로움이 함께하고 충격이 함께하고 절망이 함께하고 열기가 함께하는 삿된 실천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분쟁의 법이다. 거기서 비구들이여, 지역의 언어로 기울지 않고, 명칭의 한계를 넘지 않는 법은 괴로움과 고통과 절망과 열기가 없는 바른 실천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평화의 법이다.
그러므로 비구들이여, ‘우리는 분쟁의 법을 알고, 평화의 법을 알 것이다. 분쟁의 법을 알고 평화의 법을 알아서 평화를 실천할 것이다.’라고, 비구들이여, 그대들은 공부해야 한다. 그런데 비구들이여, 수부띠라는 좋은 가문의 아들은 평화를 실천한다.”라고.
세존은 이렇게 말했다. 그 비구들은 즐거워하면서 세존의 말씀을 기뻐했다.
araṇavibhaṅgasuttaṃ niṭṭhitaṃ navama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