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kkhiṇāvibhaṅgasuttaṃ (MN 142-보시 분석 경)
4. vibhaṅgavaggo, 12. dakkhiṇāvibhaṅgasuttaṃ (MN 142-보시 분석 경)
이렇게 나는 들었다. — 한때 세존은 삭까에서 까삘라왓투의 니그로다 사원에 머물렀다. 그때 마하빠자빠띠 고따미가 새 옷 한 벌을 가지고 세존에게 왔다. 와서는 세존에게 절한 뒤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마하빠자빠띠 고따미는 세존에게 이렇게 말했다. — “대덕이시여, 제가 가져온 이 새 옷 한 벌은 세존을 위해서 제가 직접 꿰고 직접 땋은 것입니다. 대덕이시여, 세존께서는 이것을 연민으로 받아 주십시오.”라고. 이렇게 말했을 때, 세존은 마하빠자빠띠 고따미에게 이렇게 말했다. — “고따미여, 상가에 보시하십시오. 상가에 보시할 때 그대가 가져온 것은 나에게 공양한 것도 되고 상가에 보시한 것도 될 것입니다.”라고. 두 번째도 마하빠자빠띠 고따미는 세존에게 이렇게 말했다. — “대덕이시여, 제가 가져온 이 새 옷 한 벌은 세존을 위해서 제가 직접 꿰고 직접 땋은 것입니다. 대덕이시여, 세존께서는 이것을 연민으로 받아 주십시오.”라고. 두 번째도 세존은 마하빠자빠띠 고따미에게 이렇게 말했다. — “고따미여, 상가에 보시하십시오. 상가에 보시할 때 그대가 가져온 것은 나에게 공양한 것도 되고 상가에 보시한 것도 될 것입니다.”라고. 세 번째도 마하빠자빠띠 고따미는 세존에게 이렇게 말했다. — “대덕이시여, 제가 가져온 이 새 옷 한 벌은 세존을 위해서 제가 직접 꿰고 직접 땋은 것입니다. 대덕이시여, 세존께서는 이것을 연민으로 받아 주십시오.”라고. 세 번째도 세존은 마하빠자빠띠 고따미에게 이렇게 말했다. — “고따미여, 상가에 보시하십시오. 상가에 보시할 때 그대가 가져온 것은 나에게 공양한 것도 되고 상가에 보시한 것도 될 것입니다.”라고.
이렇게 말했을 때, 아난다 존자가 세존에게 이렇게 말했다. — “대덕이시여, 세존께서는 마하빠자빠띠 고따미의 새 옷 한 벌을 받아 주십시오. 대덕이시여, 마하빠자빠띠 고따미는 이모, 계모, 유모, 수유자로서 세존에게 많은 도움을 주신 분입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세존에게 젖을 주셨습니다. 대덕이시여, 세존께서도 마하빠자빠띠 고따미에게 많은 도움을 주셨습니다. 세존 덕분에, 대덕이시여, 마하빠자빠띠 고따미는 의지처인 부처님에게로 가고, 의지처인 가르침에게로 가고, 의지처인 성자들에게로 갑니다. 세존 덕분에, 대덕이시여, 마하빠자빠띠 고따미는 생명을 해치는 행위로부터 피하고, 주지 않는 것을 가지는 행위로부터 피하고, 음행에 대한 삿된 행위로부터 피하고, 거짓을 말하는 행위로부터 피하고, 술과 발효액 등 취하게 하는 것으로 인한 방일한 머묾으로부터 피합니다. 세존 덕분에, 대덕이시여, 마하빠자빠띠 고따미는 부처님에 대한 분명함[확실한 믿음]을 갖추고, 가르침에 대한 분명함을 갖추고, 성자들에 대한 분명함을 갖추고, 성자들이 동의하는 계들을 갖추었습니다. 세존 덕분에, 대덕이시여, 마하빠자빠띠 고따미는 괴로움에 대해 확신하고, 괴로움의 자라남에 대해 확신하고, 괴로움의 소멸에 대해 확신하고,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실천에 대해 확신합니다. 대덕이시여, 세존께서도 마하빠자빠띠 고따미에게 많은 도움을 주셨습니다.”라고.
“그것은 그렇다, 아난다여. 아난다여, 어떤 사람이 어떤 사람 덕분에 의지처인 부처님에게로 가고, 의지처인 가르침에게로 가고, 의지처인 성자들에게로 간다면, 아난다여, 이 사람이 이 사람에게 인사하고, 자리에서 일어나고, 합장하고, 존경하고, 가사와 탁발 음식과 거처와 병의 조건으로부터 필요한 약품을 공양하는 것으로 쉽게 은혜를 갚을 수 없다고 나는 말한다.
아난다여, 어떤 사람이 어떤 사람 덕분에 생명을 해치는 행위로부터 피하고, 주지 않는 것을 가지는 행위로부터 피하고, 음행에 대한 삿된 행위로부터 피하고, 거짓을 말하는 행위로부터 피하고, 술과 발효액 등 취하게 하는 것으로 인한 방일한 머묾으로부터 피한다면, 아난다여, 이 사람이 이 사람에게 인사하고, 자리에서 일어나고, 합장하고, 존경하고, 가사와 탁발 음식과 거처와 병의 조건으로부터 필요한 약품을 공양하는 것으로 쉽게 은혜를 갚을 수 없다고 나는 말한다.
아난다여, 어떤 사람이 어떤 사람 덕분에 부처님에 대한 분명함[확실한 믿음]을 갖추고, 가르침에 대한 분명함을 갖추고, 성자들에 대한 분명함을 갖추고, 성자들이 동의하는 계들을 갖춘다면, 아난다여, 이 사람이 이 사람에게 인사하고, 자리에서 일어나고, 합장하고, 존경하고, 가사와 탁발 음식과 거처와 병의 조건으로부터 필요한 약품을 공양하는 것으로 쉽게 은혜를 갚을 수 없다고 나는 말한다.
아난다여, 어떤 사람이 어떤 사람 덕분에 괴로움에 대해 확신하고, 괴로움의 자라남에 대해 확신하고, 괴로움의 소멸에 대해 확신하고,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실천에 대해 확신한다면, 아난다여, 이 사람이 이 사람에게 인사하고, 자리에서 일어나고, 합장하고, 존경하고, 가사와 탁발 음식과 거처와 병의 조건으로부터 필요한 약품을 공양하는 것으로 쉽게 은혜를 갚을 수 없다고 나는 말한다.
그리고 아난다여, 사람에 대한 보시는 이런 열네 가지 있다. 어떤 열넷인가? 여래-아라한-정등각에게 보시한다. — 이것이 사람에 대한 첫 번째 보시이다. 벽지불에게 보시한다. — 이것이 사람에 대한 두 번째 보시이다. 세존의 제자인 아라한에게 보시한다. — 이것이 사람에 대한 세 번째 보시이다. 아라한과의 실현을 위해 실천하는 사람에게 보시한다. — 이것이 사람에 대한 네 번째 보시이다. 불환자에게 보시한다. — 이것이 사람에 대한 다섯 번째 보시이다. 불환과의 실현을 위해 실천하는 사람에게 보시한다. — 이것이 사람에 대한 여섯 번째 보시이다. 일래자에게 보시한다. — 이것이 사람에 대한 일곱 번째 보시이다. 일래과의 실현을 위해 실천하는 사람에게 보시한다. — 이것이 사람에 대한 여덟 번째 보시이다. 예류자에게 보시한다. — 이것이 사람에 대한 아홉 번째 보시이다. 예류과의 실현을 위해 실천하는 사람에게 보시한다. — 이것이 사람에 대한 열 번째 보시이다. 욕탐(慾貪)이 없는 외도에게 보시한다. — 이것이 사람에 대한 열한 번째 보시이다. 계를 중시하는 범부에게 보시한다. — 이것이 사람에 대한 열두 번째 보시이다. 계를 경시하는 범부에게 보시한다. — 이것이 사람에 대한 열세 번째 보시이다. 축생에게 보시한다. — 이것이 사람에 대한 열네 번째 보시이다.
거기서, 아난다여, 축생에게 보시한 것을 원인으로 보시는 백 배가 기대된다. 계를 경시하는 범부에게 보시한 것을 원인으로 보시는 천 배가 기대된다. 계를 중시하는 범부에게 보시한 것을 원인으로 보시는 십만 배가 기대된다. 욕탐(慾貪)이 없는 외도에게 보시한 것을 원인으로 보시는 십만의 천만 배가 기대된다. 예류과의 실현을 위해 실천하는 사람에게 보시한 것을 원인으로 보시는 헤아릴 수 없고 무량한 것이 기대된다. 그러니 예류자에 대해서야 말해 무엇할 것이고, 일래과의 실현을 위해 실천하는 사람에 대해서야 말해 무엇할 것이고, 일래자에 대해서야 말해 무엇할 것이고, 불환과의 실현을 위해 실천하는 사람에 대해서야 말해 무엇할 것이고, 불환자에 대해서야 말해 무엇할 것이고, 아라한과를 실현하기 위해 실천하는 사람에 대해서야 말해 무엇할 것이고, 아라한에 대해서야 말해 무엇할 것이고, 벽지불에 대해서야 말해 무엇할 것이고, 여래-아라한-정등각에 대해서야 말해 무엇할 것인가!
또한, 아난다여, 상가를 위해 행하는 일곱 가지 보시가 있다. 어떤 일곱 가지인가? 부처님을 으뜸으로 하는 양쪽 상가에 보시한다. 이것이 상가를 위해 행하는 첫 번째 보시이다. 여래가 반열반 했을 때 양쪽 상가에 보시한다. 이것이 상가를 위해 행하는 두 번째 보시이다. 비구 상가에 보시한다. 이것이 상가를 위해 행하는 세 번째 보시이다. 비구니 상가에 보시한다. 이것이 상가를 위해 행하는 네 번째 보시이다. ‘상가로부터 이 만큼의 비구와 비구니를 저에게 특정해 주십시오.’라면서 보시한다. 이것이 상가를 위해 행하는 다섯 번째 보시이다. ‘상가로부터 이 만큼의 비구를 저에게 특정해 주십시오.’라면서 보시한다. 이것이 상가를 위해 행하는 여섯 번째 보시이다. ‘상가로부터 이 만큼의 비구니를 저에게 특정해 주십시오.’라면서 보시한다. 이것이 상가를 위해 행하는 일곱 번째 보시이다.
그런데 아난다여, 미래에 목에 노란 가사를 두르고, 계를 경시하고, 악한 법을 지닌 고뜨라부(become of the lineage 또는 one who destroys the lineage)들이 있을 것이다. 상가를 위하여, 계를 경시하는 그들에 대해 보시할 것이다. 그때도, 아난다여, 상가를 위해 행하는 보시는 헤아릴 수 없고 무량하다고 나는 말한다. 그러나 아난다여, 어떤 방법에 의해서든 상가를 위해 행하는 보시보다 사람에 대한 보시가 더 큰 결실이 있다고 나는 말하지 않는다.
아난다여, 이런 네 가지 청정한 보시(布施)가 있다. 어떤 네 가지인가? 아난다여, 주는 자 때문에 청정해지고 받는 자 때문은 아닌 보시가 있다. 아난다여, 받는 자 때문에 청정해지고 주는 자 때문은 아닌 보시가 있다. 아난다여, 주는 자 때문에도 받는 자 때문에도 청정해지지 않는 보시가 있다. 아난다여, 주는 자 때문에도 받는 자 때문에도 청정해지는 보시가 있다.
아난다여, 어떻게 주는 자 때문에 청정해지고 받는 자 때문은 아닌 보시가 있는가? 여기, 아난다여, 계를 중시하고 선한 성품을 지닌 주는 자가 있고, 계를 경시하고 악한 성품을 지닌 받는 자들이 있다. — 아난다여, 이렇게 주는 자 때문에 청정해지고 받는 자 때문은 아닌 보시가 있다.
아난다여, 어떻게 받는 자 때문에 청정해지고 주는 자 때문은 아닌 보시가 있는가? 아난다여, 여기 계를 경시하고 악한 성품을 지닌 주는 자가 있고, 계를 중시하고 선한 성품을 지닌 받는 자들이 있다. — 아난다여, 이렇게 받는 자 때문에 청정해지고 주는 자 때문은 아닌 보시가 있다.
아난다여, 어떻게 주는 자 때문에도 받는 자 때문에도 청정해지지 않는 보시가 있는가? 아난다여, 여기 계를 경시하고 악한 성품을 지닌 주는 자가 있고, 계를 경시하고 악한 성품을 지닌 받는 자들이 있다. — 아난다여, 이렇게 주는 자 때문에도 받는 자 때문에도 청정해지지 않는 보시가 있다.
아난다여, 어떻게 주는 자 때문에도 받는 자 때문에도 청정해지는 보시가 있는가? 아난다여, 여기 계를 중시하고 선한 성품을 지닌 주는 자가 있고, 계를 중시하고 선한 성품을 지닌 받는 자들이 있다. — 아난다여, 이렇게 주는 자 때문에도 받는 자 때문에도 청정해지는 보시가 있다. 아난다여, 이런 네 가지 청정한 보시가 있다.
세존은 이렇게 말했다. 스승인 선서는 이것을 말한 뒤에 다시 이것을 말했다. —
382. “yo sīlavā dussīlesu dadāti dānaṃ,dhammena laddhaṃ supasannacitto.abhisaddahaṃ kammaphalaṃ uḷāraṃ,sā dakkhiṇā dāyakato visujjhati.
계를 중시하는 자, 아주 고운 심(心)을 가진 자가
업의 결실이 크다는 믿음을 가지고, 법답게 얻어진 것을
계를 경시하는 자들에게 보시할 때
그 보시는 주는 자 때문에 청정해진다.
“yo dussīlo sīlavantesu dadāti dānaṃ,adhammena laddhaṃ appasannacitto.anabhisaddahaṃ kammaphalaṃ uḷāraṃ,sā dakkhiṇā paṭiggāhakato visujjhati.
계를 경시하는 자, 고운 심을 가지지 않은 자가
업의 결실이 크다는 믿음 없이, 법답지 않게 얻어진 것을
계를 중시하는 자들에게 보시할 때
그 보시는 받는 자 때문에 청정해진다.
“yo dussīlo dussīlesu dadāti dānaṃ,adhammena laddhaṃ appasannacitto.anabhisaddahaṃ kammaphalaṃ uḷāraṃ,na taṃ dānaṃ vipulapphalanti brūmi.
계를 경시하는 자, 고운 심을 가지지 않은 자가
업의 결실이 크다는 믿음 없이, 법답지 않게 얻어진 것을
계를 경시하는 자들에게 보시할 때
그 보시는 큰 결실이 없다고 나는 말한다.
“yo sīlavā sīlavantesu dadāti dānaṃ,dhammena laddhaṃ supasannacitto.abhisaddahaṃ kammaphalaṃ uḷāraṃ,taṃ ve dānaṃ vipulapphalanti brūmi.
계를 중시하는 자, 고운 심을 가진 자가
업의 결실이 크다는 믿음을 가지고, 법답게 얻어진 것을
계를 중시하는 자들에게 보시할 때
그 보시는 참으로 큰 결실이 있다고 나는 말한다.
“yo vītarāgo vītarāgesu dadāti dānaṃ,dhammena laddhaṃ supasannacitto.abhisaddahaṃ kammaphalaṃ uḷāraṃ,taṃ ve dānaṃ āmisadānānamagga”nti.
탐이 없는 자, 고운 심을 가진 자가
업의 결실이 크다는 믿음을 가지고, 법답게 얻어진 것을
탐이 없는 자들에게 보시할 때
그 보시는 참으로 물질적인 보시 가운데 으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