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saḷāyatanavaggo, 6. chachakkasuttaṃ (MN 148-육육(六六) 경)
5. saḷāyatanavaggo, 6. chachakkasuttaṃ (MN 148-육육(六六) 경)
이렇게 나는 들었다. — 한때 세존은 사왓티에서 제따와나의 아나타삔디까 사원에 머물렀다. 그때 세존은 비구들을 불렀다. — “비구들이여.”라고. “대덕이시여.”라고 그 비구들은 세존에게 대답했다. 세존은 말했다. — “비구들이여, 그대들에게 뜻과 표현을 갖춘 시작도 좋고 중간에도 좋고 끝도 좋은 법을 설하고, 온전하고 청정한 범행을 드러낼 것이니 여섯의 여섯으로 구성된 조(組)[육육법(六六法)]이다. 그것을 듣고 잘 사고하라. 나는 설할 것이다.”라고. “알겠습니다, 대덕이시여.”라고 그 비구들은 세존에게 대답했다. 세존은 말했다. —
“여섯 가지 안의 처(處)를 알아야 한다. 여섯 가지 밖의 처(處)를 알아야 한다. 여섯 가지 식(識)의 무리를 알아야 한다. 여섯 가지 촉(觸)의 무리를 알아야 한다. 여섯 가지 수(受)의 무리를 알아야 한다. 여섯 가지 애(愛)의 무리를 알아야 한다.
‘여섯 가지 안의 처를 알아야 한다.’라고 말했다. 무엇을 연하여 이것을 말했는가? 안처(眼處), 이처(耳處), 비처(鼻處), 설처(舌處), 신처(身處), 의처(意處)이다. ‘여섯 가지 안의 처를 알아야 한다.’라고 말한 것은 이것을 연하여 말했다. 이것이 첫 번째 여섯으로 구성된 조이다.
‘여섯 가지 밖의 처를 알아야 한다.’라고 말했다. 무엇을 연하여 이것을 말했는가? 색처(色處), 성처(聲處), 향처(香處), 미처(味處), 촉처(觸處), 법처(法處)이다. ‘여섯 가지 밖의 처를 알아야 한다.’라고 말한 것은 이것을 연하여 말했다. 이것이 두 번째 여섯으로 구성된 조이다.
‘여섯 가지 식의 무리를 알아야 한다.’라고 말했다. 무엇을 연하여 이것을 말했는가? 안과 색들을 조건으로 안식(眼識)이 생긴다. 이와 성들을 조건으로 이식(耳識)이 생긴다. 비와 향들을 조건으로 비식(鼻識)이 생긴다. 설과 미들을 조건으로 설식(舌識)이 생긴다. 신과 촉들을 조건으로 신식(身識)이 생긴다. 의와 법들을 조건으로 의식(意識)이 생긴다. ‘여섯 가지 식의 무리를 알아야 한다.’라고 말한 것은 이것을 연하여 말했다. 이것이 세 번째 여섯으로 구성된 조이다.
‘여섯 가지 촉의 무리를 알아야 한다.’라고 말했다. 무엇을 연하여 이것을 말했는가? 안과 색들을 조건으로 안식이 생기고, 셋의 만남이 촉이다. 이와 성들을 조건으로 이식이 생기고, 셋의 만남이 촉이다. 비와 향들을 조건으로 비식이 생기고, 셋의 만남이 촉이다. 설과 미들을 조건으로 설식이 생기고, 셋의 만남이 촉이다. 신과 촉들을 조건으로 신식이 생기고, 셋의 만남이 촉이다. 의와 법들을 조건으로 의식이 생기고, 셋의 만남이 촉이다. ‘여섯 가지 촉의 무리를 알아야 한다.’라고 말한 것은 이것을 연하여 말했다. 이것이 네 번째 여섯으로 구성된 조이다.
‘여섯 가지 수의 무리를 알아야 한다.’라고 말했다. 무엇을 연하여 이것을 말했는가? 안과 색들을 조건으로 안식이 생기며, 셋의 만남이 촉이고, 촉을 조건으로 수(受)가 있다. 이와 성들을 조건으로 이식이 생기며, 셋의 만남이 촉이고, 촉을 조건으로 수가 있다. 비와 향들을 조건으로 비식이 생기며, 셋의 만남이 촉이고, 촉을 조건으로 수가 있다. 설과 미들을 조건으로 설식이 생기며, 셋의 만남이 촉이고, 촉을 조건으로 수가 있다. 신과 촉들을 조건으로 신식이 생기며, 셋의 만남이 촉이고, 촉을 조건으로 수가 있다. 의와 법들을 조건으로 의식이 생기며, 셋의 만남이 촉이고, 촉을 조건으로 수가 있다. ‘여섯 가지 수의 무리를 알아야 한다.’라고 말한 것은 이것을 연하여 말했다. 이것이 다섯 번째 여섯으로 구성된 조이다.
‘여섯 가지 애의 무리를 알아야 한다.’라고 말했다. 무엇을 연하여 이것을 말했는가? 안과 색들을 조건으로 안식이 생기는데, 셋의 만남이 촉이며, 촉을 조건으로 수가 있고, 수를 조건으로 애가 있다. 이와 성들을 조건으로 이식이 생기는데, … 비와 향들을 조건으로 비식이 생기는데, … 설과 미들을 조건으로 설식이 생기는데, … 신과 촉들을 조건으로 신식이 생기는데, …의와 법들을 조건으로 의식이 생기는데, 셋의 만남이 촉이며, 촉을 조건으로 수가 있고, 수를 조건으로 애가 있다. ‘여섯 가지 애의 무리를 알아야 한다.’라고 말한 것은 이것을 연하여 말했다. 이것이 여섯 번째 여섯으로 구성된 조이다.
‘안(眼)은 아(我)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생겨나지 않는다. 안의 생겨남도 무너짐도 알려진다. 그러면 생겨남도 무너짐도 알려지는 것에게 ‘나의 아는 생겨나기도 하고 무너지기도 한다.’라고 다가간 것이 된다. 그러므로 ‘안은 아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생겨나지 않는다. 이렇게 안(眼)은 무아(無我)다.
‘색(色)들은 아(我)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생겨나지 않는다. 색들의 생겨남도 무너짐도 알려진다. 그러면 생겨남도 무너짐도 알려지는 것에게 ‘나의 아는 생겨나기도 하고 무너지기도 한다.’라고 다가간 것이 된다. 그러므로 ‘색들은 아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생겨나지 않는다. 이렇게 안은 무아다. 색들은 무아다.
‘안식(眼識)은 아(我)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생겨나지 않는다. 안식의 생겨남도 무너짐도 알려진다. 그러면 생겨남도 무너짐도 알려지는 것에게 ‘나의 아는 생겨나기도 하고 무너지기도 한다.’라고 다가간 것이 된다. 그러므로 ‘안식은 아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생겨나지 않는다. 이렇게 안은 무아다. 색들은 무아다. 안식은 무아다.
‘안촉(眼觸)은 아(我)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생겨나지 않는다. 안촉의 생겨남도 무너짐도 알려진다. 그러면 생겨남도 무너짐도 알려지는 것에게 ‘나의 아는 생겨나기도 하고 무너지기도 한다.’라고 다가간 것이 된다. 그러므로 ‘안촉은 아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생겨나지 않는다. 이렇게 안은 무아다. 색들은 무아다. 안식은 무아다. 안촉은 무아다.
‘수(受)는 아(我)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생겨나지 않는다. 수의 생겨남도 무너짐도 알려진다. 그러면 생겨남도 무너짐도 알려지는 것에게 ‘나의 아는 생겨나기도 하고 무너지기도 한다.’라고 다가간 것이 된다. 그러므로 ‘수는 아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생겨나지 않는다. 이렇게 안은 무아다. 색들은 무아다. 안식은 무아다. 안촉은 무아다. 수는 무아다.
‘애(愛)는 아(我)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생겨나지 않는다. 애의 생겨남도 무너짐도 알려진다. 그러면 생겨남도 무너짐도 알려지는 것에게 ‘나의 아는 생겨나기도 하고 무너지기도 한다.’라고 다가간 것이 된다. 그러므로 ‘애는 아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생겨나지 않는다. 이렇게 안은 무아다. 색들은 무아다. 안식은 무아다. 안촉은 무아다. 수는 무아다. 애는 무아다.
‘이(耳)는 아(我)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 ‘비(鼻)는 아(我)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 ‘설(舌)은 아(我)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 ‘신(身)은 아(我)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 ‘의(意)는 아(我)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생겨나지 않는다. 의의 생겨남도 무너짐도 알려진다. 그러면 생겨남도 무너짐도 알려지는 것에게 ‘나의 아는 생겨나기도 하고 무너지기도 한다.’라고 다가간 것이 된다. 그러므로 ‘의는 아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생겨나지 않는다. 이렇게 의는 무아다.
‘법(法)들은 아(我)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생겨나지 않는다. 법들의 생겨남도 무너짐도 알려진다. 그러면 생겨남도 무너짐도 알려지는 것에게 ‘나의 아는 생겨나기도 하고 무너지기도 한다.’라고 다가간 것이 된다. 그러므로 ‘법들은 아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생겨나지 않는다. 이렇게 의는 무아다. 법들은 무아다.
‘의식(意識)은 아(我)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생겨나지 않는다. 의식의 생겨남도 무너짐도 알려진다. 그러면 생겨남도 무너짐도 알려지는 것에게 ‘나의 아는 생겨나기도 하고 무너지기도 한다.’라고 다가간 것이 된다. 그러므로 ‘의식은 아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생겨나지 않는다. 이렇게 의는 무아다. 법들은 무아다. 의식은 무아다.
‘의촉(意觸)은 아(我)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생겨나지 않는다. 의촉의 생겨남도 무너짐도 알려진다. 그러면 생겨남도 무너짐도 알려지는 것에게 ‘나의 아는 생겨나기도 하고 무너지기도 한다.’라고 다가간 것이 된다. 그러므로 ‘의촉은 아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생겨나지 않는다. 이렇게 의는 무아다. 법들은 무아다. 의식은 무아다. 의촉은 무아다.
‘수(受)는 아(我)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생겨나지 않는다. 수의 생겨남도 무너짐도 알려진다. 그러면 생겨남도 무너짐도 알려지는 것에게 ‘나의 아는 생겨나기도 하고 무너지기도 한다.’라고 다가간 것이 된다. 그러므로 ‘수는 아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생겨나지 않는다. 이렇게 의는 무아다. 법들은 무아다. 의식은 무아다. 의촉은 무아다. 수는 무아다.
‘애(愛)는 아(我)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생겨나지 않는다. 애의 생겨남도 무너짐도 알려진다. 그러면 생겨남도 무너짐도 알려지는 것에게 ‘나의 아는 생겨나기도 하고 무너지기도 한다.’라고 다가간 것이 된다. 그러므로 ‘애는 아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생겨나지 않는다. 이렇게 의는 무아다. 법들은 무아다. 의식은 무아다. 의촉은 무아다. 수는 무아다. 애는 무아다.
그리고 비구들이여, 이것이 유신(有身)의 집(集)으로 이끄는 실천이다. — 안을 ‘이것은 나의 것이다. 이것은 나다. 이것은 나의 아다.’라고 관찰한다. 색들을 ‘이것은 나의 것이다. 이것은 나다. 이것은 나의 아다.’라고 관찰한다. 안식을 ‘이것은 나의 것이다. 이것은 나다. 이것은 나의 아다.’라고 관찰한다. 안촉을 ‘이것은 나의 것이다. 이것은 나다. 이것은 나의 아다.’라고 관찰한다. 수를 ‘이것은 나의 것이다. 이것은 나다. 이것은 나의 아다.’라고 관찰한다. 애를 ‘이것은 나의 것이다. 이것은 나다. 이것은 나의 아다.’라고 관찰한다. 이를 ‘이것은 나의 것이다. 이것은 나다. 이것은 나의 아다.’라고 관찰한다. … 비를 ‘이것은 나의 것이다. 이것은 나다. 이것은 나의 아다.’라고 관찰한다. … 설을 ‘이것은 나의 것이다. 이것은 나다. 이것은 나의 아다.’라고 관찰한다. … 신을 ‘이것은 나의 것이다. 이것은 나다. 이것은 나의 아다.’라고 관찰한다. … 의를 ‘이것은 나의 것이다. 이것은 나다. 이것은 나의 아다.’라고 관찰한다. 법들을 ‘이것은 나의 것이다. 이것은 나다. 이것은 나의 아다.’라고 관찰한다. 의식을 ‘이것은 나의 것이다. 이것은 나다. 이것은 나의 아다.’라고 관찰한다. 의촉을 ‘이것은 나의 것이다. 이것은 나다. 이것은 나의 아다.’라고 관찰한다. 수를 ‘이것은 나의 것이다. 이것은 나다. 이것은 나의 아다.’라고 관찰한다. 애를 ‘이것은 나의 것이다. 이것은 나다. 이것은 나의 아다.’라고 관찰한다.
그리고 비구들이여, 이것이 유신(有身)의 멸(滅)로 이끄는 실천이다. — 안을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내가 아니다. 이것은 나의 아가 아니다.’라고 관찰한다. 색들을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내가 아니다. 이것은 나의 아가 아니다.’라고 관찰한다. 안식을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내가 아니다. 이것은 나의 아가 아니다.’라고 관찰한다. 안촉을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내가 아니다. 이것은 나의 아가 아니다.’라고 관찰한다. 수를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내가 아니다. 이것은 나의 아가 아니다.’라고 관찰한다. 애를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내가 아니다. 이것은 나의 아가 아니다.’라고 관찰한다. 이를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내가 아니다. 이것은 나의 아가 아니다.’라고 관찰한다. … 비를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내가 아니다. 이것은 나의 아가 아니다.’라고 관찰한다. … 설을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내가 아니다. 이것은 나의 아가 아니다.’라고 관찰한다. … 신을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내가 아니다. 이것은 나의 아가 아니다.’라고 관찰한다. … 의를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내가 아니다. 이것은 나의 아가 아니다.’라고 관찰한다. 법들을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내가 아니다. 이것은 나의 아가 아니다.’라고 관찰한다. 의식을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내가 아니다. 이것은 나의 아가 아니다.’라고 관찰한다. 의촉을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내가 아니다. 이것은 나의 아가 아니다.’라고 관찰한다. 수를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내가 아니다. 이것은 나의 아가 아니다.’라고 관찰한다. 애를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내가 아니다. 이것은 나의 아가 아니다.’라고 관찰한다.
비구들이여, 안과 색들을 조건으로 안식이 생기며, 셋의 만남이 촉이고, 촉을 조건으로 즐겁거나 괴롭거나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이 생긴다. 그 즐거운 느낌에 닿아있는 자는 기뻐하고 드러내고 묶여 머문다. 그에게 탐(貪)의 잠재성향이 잠재한다. 괴로운 느낌에 닿아있는 자는 슬퍼하고 힘들어하고 비탄에 빠지고 가슴을 치며 울부짖고 당황한다. 그에게 저항의 잠재성향이 잠재한다.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에 닿아있는 자는 그 느낌의 자라남과 줄어듦과 매력과 위험과 해방을 꿰뚫어 알지 못한다. 그에게 무명(無明)의 잠재성향이 잠재한다. 비구들이여, 참으로 그가 즐거운 느낌에 대한 탐의 잠재성향을 버리지 못하고, 괴로운 느낌에 대한 저항의 잠재성향을 제거하지 못하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에 대한 무명의 잠재성향을 뿌리 뽑지 못하고, 무명을 버리지 못하고 명(明)을 일으키지 못한 채 지금여기에서 괴로움의 끝을 만들 것이라는 경우는 없다.
비구들이여, 이와 성들을 조건으로 이식이 생기며, … 비구들이여, 비와 향들을 조건으로 비식이 생기며, … 비구들이여, 설과 미들을 조건으로 설식이 생기며, … 비구들이여, 신과 촉들을 조건으로 설식이 생기며, … 비구들이여, 의와 법들을 조건으로 의식이 생기며, 셋의 만남이 촉이고, 촉을 조건으로 즐겁거나 괴롭거나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이 생긴다. 그 즐거운 느낌에 닿아있는 자는 기뻐하고 드러내고 묶여 머문다. 그에게 탐의 잠재성향이 잠재한다. 괴로운 느낌에 닿아있는 자는 슬퍼하고 힘들어하고 비탄에 빠지고 가슴을 치며 울부짖고 당황한다. 그에게 저항의 잠재성향이 잠재한다.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에 닿아있는 자는 그 느낌의 자라남과 줄어듦과 매력과 위험과 해방을 꿰뚫어 알지 못한다. 그에게 무명의 잠재성향이 잠재한다. 비구들이여, 참으로 그가 즐거운 느낌에 대한 탐의 잠재성향을 버리지 못하고, 괴로운 느낌에 대한 저항의 잠재성향을 제거하지 못하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에 대한 무명의 잠재성향을 뿌리 뽑지 못하고, 무명을 버리지 못하고 명을 일으키지 못한 채 지금여기에서 괴로움의 끝을 만들 것이라는 경우는 없다.
비구들이여, 안과 색들을 조건으로 안식이 생기며, 셋의 만남이 촉이고, 촉을 조건으로 즐겁거나 괴롭거나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이 생긴다. 그 즐거운 느낌에 닿은 자는 기뻐하지 않고 드러내지 않고 묶여 머물지 않는다. 그에게 탐의 잠재성향이 잠재하지 않는다. 괴로운 느낌에 닿은 자는 슬퍼하지 않고 힘들어하지 않고 비탄에 빠지지 않고 가슴을 치며 울부짖지 않고 당황하지 않는다. 그에게 저항의 잠재성향이 잠재하지 않는다.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에 닿은 자는 그 경험의 자라남과 줄어듦과 매력과 위험과 해방을 꿰뚫어 안다. 그에게 무명의 잠재성향이 잠재하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참으로 그가 즐거운 느낌에 대한 탐의 잠재성향을 버리고, 괴로운 느낌에 대한 저항의 잠재성향을 제거하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에 대한 무명의 잠재성향을 뿌리 뽑고, 무명을 버리고 명을 일으킨 뒤에 지금여기에서 괴로움의 끝을 만들 것이라는 경우는 있다.
비구들이여, 이와 성들을 조건으로 이식이 생기며, …
비구들이여, 비와 향들을 조건으로 비식이 생기며, …
비구들이여, 설과 미들을 조건으로 설식이 생기며, …
비구들이여, 신과 촉들을 조건으로 설식이 생기며, …
비구들이여, 의와 법들을 조건으로 의식이 생기며, 셋의 만남이 촉이고, 촉을 조건으로 즐겁거나 괴롭거나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이 생긴다. 그 즐거운 느낌에 닿은 자는 기뻐하지 않고 드러내지 않고 묶여 머물지 않는다. 그에게 탐의 잠재성향이 잠재하지 않는다. 괴로운 느낌에 닿은 자는 슬퍼하지 않고 힘들어하지 않고 비탄에 빠지지 않고 가슴을 치며 울부짖지 않고 당황하지 않는다. 그에게 저항의 잠재성향이 잠재하지 않는다.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에 닿은 자는 그 경험의 자라남과 줄어듦과 매력과 위험과 해방을 꿰뚫어 안다. 그에게 무명의 잠재성향이 잠재하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참으로 그가 즐거운 느낌에 대한 탐의 잠재성향을 버리고, 괴로운 느낌에 대한 저항의 잠재성향을 제거하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에 대한 무명의 잠재성향을 뿌리 뽑고, 무명을 버리고 명을 생겨나게 한 뒤에 지금여기에서 괴로움의 끝을 만들 것이라는 경우는 있다.
비구들이여, 이렇게 보는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는 안에 대해 염오하고, 색들에 대해 염오하고, 안식에 대해 염오하고, 안촉에 대해 염오하고, 수에 대해 염오하고, 애에 대해 염오한다. 이에 대해 염오하고, 성들에 대해 염오하고 … 비에 대해 염오하고 향들에 대해 염오하고 …설에 대해 염오하고 미들에 대해 염오하고 … 신에 대해 염오하고 촉들에 대해 염오하고 … 의에 대해 염오하고, 법들에 대해 염오하고, 의식에 대해 염오하고, 의촉에 대해 염오하고, 수에 대해 염오하고, 애에 대해 염오한다. 염오하면 이탐한다. 이탐으로부터 해탈한다. 해탈에서 ‘나는 해탈했다.’라는 앎이 있다. '태어남은 다했다. 범행은 완성되었다. 해야 할 일을 했다. 다음에는 현재 상태[유(有)]가 되지 않는다.'라고 분명히 안다.”
세존은 말했다. 그 비구들은 즐거워하면서 세존의 말씀을 기뻐했다. 이 가르침이 설해졌을 때 육십 명의 비구들의 심(心)은 집착에서 벗어나 번뇌들로부터 해탈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