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지마 니까야 관통 법회 ― 148. 육육 경[경이 설명하는 무아의 의미 & 유신의 집-멸로 이끄는 실천 - 느낌과 잠재 - …
▣ 맛지마 니까야 관통 법회 ― 148. 육육 경[경이 설명하는 무아의 의미 & 유신의 집-멸로 이끄는 실천 - 느낌과 잠재 - 두 번째 화살](근본경전연구회 해피스님 240619)
[동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zClQPBnjkfU
부처님은 여섯의 여섯으로 구성된 조(組)[육육법-활성화된 일체와 애(愛)]의 주제를 발의하는데, 이들이 무아인 까닭을 설명합니다[경이 설명하는 무아의 의미 ― (SN 22.59-무아상 경)/(MN 35-삿짜까 작은 경) 포함]. 유신의 집(集)으로 이끄는 실천이 있는데, 이 법들을 ‘이것은 나의 것이다. 이것은 나다. 이것은 나의 아(我)다.’라고 관찰하는 고집(苦集)의 실천이고, 유신의 멸(滅)로 이끄는 실천은 이 법들을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내가 아니다. 이것은 나의 아(我)가 아니다.’라고 관찰하는 고멸(苦滅)의 실천입니다. 이 실천들은 탐-저항-무명의 잠재성향이 잠재하는지로 구분하는데, 두 번째 화살의 비유로 연결됩니다.
1. 부처님의 주제 발의 ― 여섯의 여섯으로 구성된 조(組)[육육법(六六法)] ― 뜻과 표현을 갖춘 시작도 좋고 중간도 좋고 끝도 좋은 법을 설하고, 온전하고 청정한 범행(梵行)을 드러냄
; 알아야 하는 여섯 가지(*) ― 여섯 가지 안의 처(處)/여섯 가지 밖의 처(處)/여섯 가지 식(識)의 무리/여섯 가지 촉(觸)의 무리/여섯 가지 수(受)의 무리/여섯 가지 애(愛)의 무리
(*) 활성화된 일체 + 애(愛)
• 여섯 가지 안의 처(處) ― 안처(眼處), 이처(耳處), 비처(鼻處), 설처(舌處), 신처(身處), 의처(意處)
• 여섯 가지 밖의 처(處) ― 색처(色處), 성처(聲處), 향처(香處), 미처(味處), 촉처(觸處), 법처(法處)
• 여섯 가지 식(識)의 무리 ― 안(眼)과 색(色)들을 조건으로 생기는 안식(眼識) ~ 의(意)와 법(法)들을 조건으로 생기는 의식(意識)
• 여섯 가지 촉(觸)의 무리 ― 안(眼)과 색(色)들을 조건으로 생긴 안식(眼識). 이 셋의 만남인 촉(觸) ~ 의(意)와 법(法)들을 조건으로 생긴 의식(意識). 이 셋의 만남인 촉(觸)
• 여섯 가지 수(受)의 무리 ― 안(眼)과 색(色)들을 조건으로 생긴 안식(眼識). 이 셋의 만남인 촉(觸)을 조건으로 생기는 수(受) ~ 의(意)와 법(法)들을 조건으로 생긴 의식(意識). 이 셋의 만남인 촉(觸)을 조건으로 생기는 수(受)
• 여섯 가지 애(愛)의 무리 ― 안(眼)과 색(色)들을 조건으로 생긴 안식(眼識). 이 셋의 만남인 촉(觸)을 조건으로 생긴 수(受)를 조건으로 생기는 애(愛) ~ 의(意)와 법(法)들을 조건으로 생긴 의식(意識). 이 셋의 만남인 촉(觸)을 조건으로 생긴 수(受)를 조건으로 생기는 애(愛)
2. 여섯의 여섯으로 구성된 조(組)는 무아(無我)다 ― 「경이 설명하는 무아(無我)」
; ‘안(眼)은 아(我)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생겨나지 않는다. 안(眼)에게 생겨남도 무너짐도 알려진다. 그러면 생겨남도 무너짐도 알려지는 것에게 ‘나의 아(我)는 생겨나기도 하고 무너지기도 한다.’라고 다가간 것이 된다. 그러므로 ‘안(眼)은 아(我)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생겨나지 않는다. 이렇게 안(眼)은 무아(無我)다.(여섯의 여섯으로 구성된 36개 법에 반복)
▣ 주제의 확장 ― 「경이 설명하는 무아(無我)」 ― 아(我)라면 ①결점으로 이끌리지 않을 것, ②권한이 있을 것, ③생겨나지도 무너지지도 않을 것(不生不滅) ☞ https://nikaya.kr/bbs/board.php?bo_table=happy02_11&wr_id=448
3. 유신(有身)의 집(集)으로 이끄는 실천(sakkāyasamudayagāminī paṭipadā) ― 여섯의 여섯으로 구성된 36개 법을 ‘이것은 나의 것이다. 이것은 나다. 이것은 나의 아(我)다.’라고 관찰함
4. 유신(有身)의 멸(滅)로 이끄는 실천(sakkāyanirodhagāminī paṭipadā) ― 여섯의 여섯으로 구성된 36개 법을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내가 아니다. 이것은 나의 아(我)가 아니다.’라고 관찰함
※ (SN 22.44-실천 경) ― 유신(有身)의 집(集)으로 이끄는 실천과 유신의 멸(滅)로 이끄는 실천 → 배우지 못한 범부의 용례 ― 아(我)로부터 색(色)을 관찰한다. 색(色)을 가진 자로서의 아(我)를 관찰하거나, 아(我)에서 색(色)을 관찰하거나, 색(色)에서 아(我)를 관찰한다.(오온(五蘊)에 반복) ☞ http://sutta.kr/bbs/board.php?bo_table=nikaya06_03_01&wr_id=120
; ‘이것은 나의 것이다. 이것은 나다. 이것은 나의 아(我)다.’라는 관찰 = ‘아(我)로부터 색(色)을 관찰한다. 색(色)을 가진 자로서의 아(我)를 관찰하거나, 아(我)에서 색(色)을 관찰하거나, 색(色)에서 아(我)를 관찰’
; 그림 「배우지 못한 범부의 아(我)를 전제한 관찰 ①②」 → 「[7] 무아(無我) ‒ 아(我)가 전제된 관찰」 참조 ☞ http://nikaya.kr/bbs/board.php?bo_table=happy09_03&wr_id=89
5. 삼사화합(三事和合) 촉(觸) → 수(受)① ⇒ 고집(苦集)
; 즐거운 느낌에 닿아있는 자 → 기뻐하고 드러내고 묶여 머묾 → 탐(貪)의 잠재성향 잠재
; 괴로운 느낌에 닿아있는 자 → 슬퍼하고 힘들어하고 비탄에 빠지고 가슴을 치며 울부짖고 당황함 → 저항의 잠재성향이 잠재
;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에 닿아있는 자 → 그 느낌의 자라남과 줄어듦과 매력과 위험과 해방을 꿰뚫어 알지 못함 → 무명(無明)의 잠재성향이 잠재
⇒ 탐(貪)의 잠재성향을 버리지 못하고(appahāya), 저항의 잠재성향을 제거하지 못하고(appaṭivinodetvā), 무명(無明)의 잠재성향을 뿌리 뽑지 못하고(asamūhanitvā), 무명(無明)을 버리지 못하고 명(明)을 일으키지 못한 채 지금여기에서 괴로움의 끝을 만들 것이라는 경우는 없음
6. 삼사화합(三事和合) 촉(觸) → 수(受)② ⇒ 고멸(苦滅)
※ ‘dukkhāya vedanāya phuṭṭho samāno의 용례’ 참조 ☞ http://nikaya.kr/bbs/board.php?bo_table=happy02_11&wr_id=397
특히, (SN 36.6-화살 경)은 이 경과 유사한 주제를 설명하는데, 유명한 두 번째 화살의 비유를 포함합니다.
▣ 주제의 확장 ― 「두 번째 화살 맞지 않기」 ☞ http://nikaya.kr/bbs/board.php?bo_table=happy02_11&wr_id=398
; 즐거운 느낌에 닿아있는 자 → 기뻐하지 않고 드러내지 않고 묶여 머물지 않음 → 탐(貪)의 잠재성향 잠재하지 않음
; 괴로운 느낌에 닿아있는 자 → 슬퍼하지 않고 힘들어하지 않고 비탄에 빠지지 않고 가슴을 치며 울부짖지 않고 당황하지 않음 → 저항의 잠재성향이 잠재하지 않음
;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에 닿아있는 자 → 그 느낌의 자라남과 줄어듦과 매력과 위험과 해방을 꿰뚫어 앎 → 무명(無明)의 잠재성향이 잠재하지 않음
⇒ 탐(貪)의 잠재성향을 버리고(pahāya), 저항의 잠재성향을 제거하고(paṭivinodetvā), 무명(無明)의 잠재성향을 뿌리 뽑고(samūhanitvā), 무명(無明)을 버리고 명(明)을 일으킨 뒤 지금여기에서 괴로움의 끝을 만들 것이라는 경우는 있음
※ ‘촉(觸) → 수(受)① ⇒ 고집(苦集)’과 ‘촉(觸) → 수(受)② ⇒ 고멸(苦滅)’은 (SN 12.45-냐띠까 경)의 고집(苦集)-고멸(苦滅)의 두 갈래 삶의 길과 연결됩니다. ☞ http://nikaya.kr/bbs/board.php?bo_table=happy02_13&wr_id=238
7. 이렇게 보는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 ― 여섯의 여섯으로 구성된 36개 법에 대해 염오 → 이탐 → 해탈 → 해탈지견
8. 육십 명의 비구들의 심(心)은 집착에서 벗어나 번뇌들로부터 해탈함 → ‘심(心)은 집착에서 벗어나 번뇌들로부터 해탈하였다.’의 용례 참조 ☞ http://nikaya.kr/bbs/board.php?bo_table=happy02_11&wr_id=3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