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driyabhāvanāsuttaṃ (MN 152-기능수행 경)
5. saḷāyatanavaggo, 10. indriyabhāvanāsuttaṃ (MN 152-기능수행 경)
이렇게 나는 들었다. 한때 세존은 가장갈라의 수웰루 숲에 머물렀다. 그때 빠라시위야의 제자인 젊은 바라문 웃따라가 세존에게 왔다. 와서는 세존과 함께 인사를 나누었다. 유쾌하고 기억할만한 이야기를 주고받은 뒤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빠라시위야의 제자인 젊은 바라문 웃따라에게 세존은 이렇게 말했다. — “웃따라여, 빠라시위야 바라문은 제자들에게 기능수행을 가르치는가?” “고따마 존자시여, 빠라시위야 바라문은 기능수행을 가르칩니다.” “웃따라여, 그러면 빠라시위야 바라문은 제자들에게 어떻게 기능수행을 가르치는가?” “여기, 고따마 존자시여, 안(眼)으로 색(色)을 보지 않고 이(耳)로 성(聲)을 듣지 않습니다. 이렇게, 고따마 존자시여, 빠라시위야 바라문은 제자들에게 기능수행을 가르칩니다.” “그럴 때, 웃따라여, 장님은 기능을 닦은 자일 것이고, 귀머거리도 기능을 닦은 자일 것이다. 빠라시위야 바라문의 말처럼, 웃따라여, 장님은 안(眼)으로 색(色)을 보지 않고, 귀머거리는 이(耳)로 성(聲)을 듣지 않는다.” 이렇게 말하자 빠라시위야의 제자인 젊은 바라문 웃따라는 말없이 풀이 죽어 어깨를 늘어뜨리고 고개를 숙이고 곰곰이 생각하면서 이해하지 못한 채 앉아 있었다.
그러자 세존은 빠라시위야의 제자인 젊은 바라문 웃따라가 말없이 풀이 죽어 어깨를 늘어뜨리고 고개를 숙이고 곰곰이 생각하면서 이해하지 못한 것을 알고 아난다 존자에게 말했다. ― “아난다여, 빠라시위야 바라문이 제자들에게 가르치는 기능수행과 성자의 율에서의 위없는 기능수행은 다르다.” “세존이시여, 지금이 바로 그때입니다. 선서시여, 지금이 세존께서 성자의 율에서의 위없는 기능수행에 대해 설하실 바로 그때입니다. 세존에게 들은 뒤 비구들은 명심할 것입니다.” “아난다여, 그렇다면 듣고 잘 사고하라. 나는 말하겠다.” “알겠습니다, 대덕이시여.”라고 아난다 존자는 세존에게 대답했다. 세존은 이렇게 말했다. —
“아난다여, 그러면 성자의 율에서는 어떻게 위없는 기능수행이 있는가? 아난다여, 여기 비구에게 안(眼)으로 색(色)을 보면서 마음에 드는 것이 생기고,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생기고, 마음에 들기도 하고 마음에 들지 않기도 한 것이 생긴다. 그는 이렇게 꿰뚫어 안다. — ‘나에게 이 마음에 드는 것이 생겼고,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생겼고, 마음에 들기도 하고 마음에 들지 않기도 한 것이 생겼다. 이것은 유위(有爲)이고 거칠고 연기(緣起)된 것이다. 이것은 평화롭고 이것은 뛰어나니 즉 평정[사(捨)]이다.’라고. 그 생겨난 마음에 드는 것과 생겨난 마음에 들지 않는 것과 생겨난 마음에 들기도 하고 마음에 들지 않기도 한 것은 그에게서 소멸하고 평정이 확립된다. 예를 들면, 아난다여, 눈 있는 사람이 눈을 떴다가는 감고 감았다가는 뜰 것이다. 이처럼, 아난다여, 생겨난 마음에 드는 것과 생겨난 마음에 들지 않는 것과 생겨난 마음에 들기도 하고 마음에 들지 않기도 한 것은 어떤 것이라도 그렇게 빠르고 그렇게 신속하고 그렇게 쉽게 소멸하고 평정이 확립된다. 아난다여, 이것이 성자의 율에서 안(眼)으로 인식되는 색(色)들에 대한 위없는 기능수행이라고 불린다.
다시, 아난다여, 여기 비구에게 이(耳)로 성(聲)을 들으면서 마음에 드는 것이 생기고,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생기고, 마음에 들기도 하고 마음에 들지 않기도 한 것이 생긴다. 그는 이렇게 꿰뚫어 안다. — '나에게 이 마음에 드는 것이 생겼고,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생겼고, 마음에 들기도 하고 마음에 들지 않기도 한 것이 생겼다. 이것은 유위(有爲)이고 거칠고 연기(緣起)된 것이다. 이것은 평화롭고 이것은 뛰어나니 즉 평정[사(捨)]이다.'라고. 그 생겨난 마음에 드는 것과 생겨난 마음에 들지 않는 것과 생겨난 마음에 들기도 하고 마음에 들지 않기도 한 것은 그에게서 소멸하고 평정이 확립된다. 예를 들면, 아난다여, 힘 있는 사람은 어려움 없이 손가락을 튕길 것이다. 이처럼, 아난다여, 생겨난 마음에 드는 것과 생겨난 마음에 들지 않는 것과 생겨난 마음에 들기도 하고 마음에 들지 않기도 한 것은 어떤 것이라도 그렇게 빠르고 그렇게 신속하고 그렇게 쉽게 소멸하고 평정이 확립된다. 아난다여, 이것이 성자의 율에서 이(耳)로 인식되는 성(聲)들에 대한 위없는 기능수행이라고 불린다.
다시, 아난다여, 여기 비구에게 비(鼻)로 향(香)을 맡으면서 마음에 드는 것이 생기고,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생기고, 마음에 들기도 하고 마음에 들지 않기도 한 것이 생긴다. 그는 이렇게 꿰뚫어 안다. — '나에게 이 마음에 드는 것이 생겼고,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생겼고, 마음에 들기도 하고 마음에 들지 않기도 한 것이 생겼다. 이것은 유위(有爲)이고 거칠고 연기(緣起)된 것이다. 이것은 평화롭고 이것은 뛰어나니 즉 평정[사(捨)]이다.'라고. 그 생겨난 마음에 드는 것과 생겨난 마음에 들지 않는 것과 생겨난 마음에 들기도 하고 마음에 들지 않기도 한 것은 그에게서 소멸하고 평정이 확립된다. 예를 들면, 아난다여, 약간 기울어진 연잎에 있는 물방울은 움직이지 정지하지 않는다. 이처럼, 아난다여, 생겨난 마음에 드는 것과 생겨난 마음에 들지 않는 것과 생겨난 마음에 들기도 하고 마음에 들지 않기도 한 것은 어떤 것이라도 그렇게 빠르고 그렇게 신속하고 그렇게 쉽게 소멸하고 평정이 확립된다. 아난다여, 이것이 성자의 율에서 비(鼻)로 인식되는 향(香)들에 대한 위없는 기능수행이라고 불린다.
다시, 아난다여, 여기 비구에게 설(舌)로 미(味)를 맛보면서 마음에 드는 것이 생기고,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생기고, 마음에 들기도 하고 마음에 들지 않기도 한 것이 생긴다. 그는 이렇게 꿰뚫어 안다. — '나에게 이 마음에 드는 것이 생겼고,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생겼고, 마음에 들기도 하고 마음에 들지 않기도 한 것이 생겼다. 이것은 유위(有爲)이고 거칠고 연기(緣起)된 것이다. 이것은 평화롭고 이것은 뛰어나니 즉 평정[사(捨)]이다.'라고. 그 생겨난 마음에 드는 것과 생겨난 마음에 들지 않는 것과 생겨난 마음에 들기도 하고 마음에 들지 않기도 한 것은 그에게서 소멸하고 평정이 확립된다. 예를 들면, 아난다여, 힘센 사람이 혀끝에 침 덩어리를 만든 뒤에 어려움 없이 뱉을 것이다. 이처럼, 아난다여, 생겨난 마음에 드는 것과 생겨난 마음에 들지 않는 것과 생겨난 마음에 들기도 하고 마음에 들지 않기도 한 것은 어떤 것이라도 그렇게 빠르고 그렇게 신속하고 그렇게 쉽게 소멸하고 평정이 확립된다. 아난다여, 이것이 성자의 율에서 설(舌)로 인식되는 미(味)들에 대한 위없는 기능수행이라고 불린다.
다시, 아난다여, 여기 비구에게 신(身)으로 촉(觸)을 닿으면서 마음에 드는 것이 생기고,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생기고, 마음에 들기도 하고 마음에 들지 않기도 한 것이 생긴다. 그는 이렇게 꿰뚫어 안다. — '나에게 이 마음에 드는 것이 생겼고,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생겼고, 마음에 들기도 하고 마음에 들지 않기도 한 것이 생겼다. 이것은 유위(有爲)이고 거칠고 연기(緣起)된 것이다. 이것은 평화롭고 이것은 뛰어나니 즉 평정[사(捨)]이다.'라고. 그 생겨난 마음에 드는 것과 생겨난 마음에 들지 않는 것과 생겨난 마음에 들기도 하고 마음에 들지 않기도 한 것은 그에게서 소멸하고 평정이 확립된다. 예를 들면, 아난다여, 힘센 사람이 접은 팔을 펴거나 편 팔을 접을 것이다. 이처럼, 아난다여, 생겨난 마음에 드는 것과 생겨난 마음에 들지 않는 것과 생겨난 마음에 들기도 하고 마음에 들지 않기도 한 것은 어떤 것이라도 그렇게 빠르고 그렇게 신속하고 그렇게 쉽게 소멸하고 평정이 확립된다. 아난다여, 이것이 성자의 율에서 신(身)으로 인식되는 촉(觸)들에 대한 위없는 기능수행이라고 불린다.
다시, 아난다여, 여기 비구에게 의(意)로 법(法)을 인식하면서 마음에 드는 것이 생기고,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생기고, 마음에 들기도 하고 마음에 들지 않기도 한 것이 생긴다. 그는 이렇게 꿰뚫어 안다. — '나에게 이 마음에 드는 것이 생겼고,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생겼고, 마음에 들기도 하고 마음에 들지 않기도 한 것이 생겼다. 이것은 유위(有爲)이고 거칠고 연기(緣起)된 것이다. 이것은 평화롭고 이것은 뛰어나니 즉 평정[사(捨)]이다.'라고. 그 생겨난 마음에 드는 것과 생겨난 마음에 들지 않는 것과 생겨난 마음에 들기도 하고 마음에 들지 않기도 한 것은 그에게서 소멸하고 평정이 확립된다. 예를 들면, 아난다여, 힘센 사람이 낮 동안 열을 받은 쇠로 된 용기에 물 두세 방울을 떨굴 것이다. 아난다여, 물방울이 떨어지는 것은 느리지만 그것은 빠르게 증발해서 사라질 것이다. 이처럼, 아난다여, 생겨난 마음에 드는 것과 생겨난 마음에 들지 않는 것과 생겨난 마음에 들기도 하고 마음에 들지 않기도 한 것은 어떤 것이라도 그렇게 빠르고 그렇게 신속하고 그렇게 쉽게 소멸하고 평정이 확립된다. 아난다여, 이것이 성자의 율에서 의(意)로 인식되는 법(法)들에 대한 위없는 기능수행이라고 불린다.
"아난다여, 그러면 유학(有學)은 어떻게 실천하는가? 아난다여, 여기 비구에게 안(眼)으로 색(色)을 보면서 마음에 드는 것이 생기고,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생기고, 마음에 들기도 하고 마음에 들지 않기도 한 것이 생긴다. 그는 생겨난 마음에 드는 것과 생겨난 마음에 들지 않는 것과 생겨난 마음에 들기도 하고 마음에 들지 않기도 한 것 때문에 걱정하고 부끄러워하고 싫어한다. … 이(耳)로 성(聲)을 들으면서 … 비(鼻)로 향(香)을 맡으면서 … 설(舌)로 미(味)를 맛보면서 … 신(身)으로 촉(觸)을 느끼면서 … 의(意)로 법(法)들을 인식하면서 마음에 드는 것이 생기고,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생기고, 마음에 들기도 하고 마음에 들지 않기도 한 것이 생긴다. 그는 생겨난 마음에 드는 것과 생겨난 마음에 들지 않는 것과 생겨난 마음에 들기도 하고 마음에 들지 않기도 한 것 때문에 걱정하고 부끄러워하고 싫어한다. 아난다여, 이렇게 유학(有學)은 실천한다.
"아난다여, 그러면 어떻게 성자는 기능을 닦은 자인가? 아난다여, 비구에게 안(眼)으로 색(色)을 보면서 마음에 드는 것이 생기고,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생기고, 마음에 들기도 하고 마음에 들지 않기도 한 것이 생긴다. 만약 그가 ‘혐오함에 대해 혐오하지 않는 상(想)으로 머물러야겠다.’라고 원하면, 혐오하지 않는 상(想)으로 거기에 머문다. 만약 ‘혐오하지 않음에 대해 혐오하는 상(想)으로 머물러야겠다.’라고 원하면, 혐오하는 상(想)으로 거기에 머문다. 만약 ‘혐오함과 혐오하지 않음에 대해 혐오하지 않는 상(想)으로 머물러야겠다.’라고 원하면, 혐오하지 않는 상(想)으로 거기에 머문다. 만약 ‘혐오하지 않음과 혐오함에 대해 혐오하는 상(想)으로 머물러야겠다.’라고 원하면, 혐오하는 상(想)으로 거기에 머문다. 만약 ‘혐오함과 혐오하지 않음의 들 모두를 버린 뒤에 평정과 사띠와 삼빠자나를 가지고 머물러야겠다.’라고 원하면, 평정과 사띠와 삼빠자나를 가지고 거기에 머문다.
다시 아난다여, 여기 비구에게 이(耳)로 성(聲)을 들으면서 … 비(鼻)로 향(香)을 맡으면서 … 설(舌)로 미(味)를 맛보면서 … 신(身)으로 촉(觸)을 느끼면서 … 의(意)로 법(法)들을 인식하면서 마음에 드는 것이 생기고,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생기고, 마음에 들기도 하고 마음에 들지 않기도 한 것이 생긴다. 만약 그가 ‘혐오함에 대해 혐오하지 않는 상(想)으로 머물러야겠다.’라고 원하면, 혐오하지 않는 상(想)으로 거기에 머문다. 만약 ‘혐오하지 않음에 대해 혐오하는 상(想)으로 머물러야겠다.’라고 원하면, 혐오하는 상(想)으로 거기에 머문다. 만약 ‘혐오함과 혐오하지 않음에 대해 혐오하지 않는 상(想)으로 머물러야겠다.’라고 원하면, 혐오하지 않는 상(想)으로 거기에 머문다. 만약 ‘혐오하지 않음과 혐오함에 대해 혐오하는 상(想)으로 머물러야겠다.’라고 원하면, 혐오하는 상(想)으로 거기에 머문다. 만약 ‘혐오함과 혐오하지 않음의 들 모두를 버린 뒤에 평정과 사띠와 삼빠자나를 가지고 머물러야겠다.’라고 원하면, 평정과 사띠와 삼빠자나를 가지고 거기에 머문다. 아난다여, 이렇게 성자는 기능을 닦은 자이다."
"아난다여, 이처럼 나는 성자의 율에서의 위없는 기능수행을 설했고 유학의 실천을 설했고 기능을 닦은 성자를 설했다. 아난다여, 제자들을 위해 베푸는 자인 스승이 행해야 하는 것을, 연민하기 때문에, 나는 그대들을 위해서 했다. 아난다여, 나무 밑이 있고, 빈집이 있다. 아난다여, 선(禪)을 하라. 방일(放逸)하지 마라. 나중에 뉘우침이 있게 하지 마라. 이것이 그대들을 위한 우리의 이어지는 가르침[가르침의 근본-교본(敎本)]이다.
세존은 이렇게 말했다. 아난다 존자는 즐거워하면서 세존의 말씀을 기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