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영상] (SN 6.4-바까 범천 경) (무명이 스민 & 과거에 부처님의 스승이었던) 바까 범천의 악하고 치우친 견해(근본경…
▣ (SN 6.4-바까 범천 경) (무명이 스민 & 과거에 부처님의 스승이었던) 바까 범천의 악하고 치우친 견해(근본경전연구회 해피스님 250502)
[동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ndk5L659ewQ
바까 범천에게 “이것은 상(常)하고, 이것은 안정되고, 이것은 영원하고, 이것은 완전하고, 이것은 변하지 않는 것이다. 참으로 이것은 태어나지 않고, 늙지 않고, 죽지 않고, 옮겨가지 않고, 다시 태어나지 않는다. 이것보다 더 높은 다른 해방은 없다.”라는 악하고 치우친 견해가 생기고, 부처님은 바까 범천을 찾아가 무명이 스민 탓이라고 지적합니다.
바까 범천은 “고따마여, 공덕의 업에 의해 태어남과 늙음을 극복한, 지배력을 가진 72명이 있습니다. 이것이 높은 앎을 이룩한 자, 범천으로 태어남의 궁극입니다. 우리에게 많은 사람들이 진정으로 기도합니다.”라고 반발하는데, 부처님이 설득합니다.
범천으로 태어남의 궁극이란 비상비비상처를 의미하는데, 웃다까 라마뿟따의 일화로써 비교할 수 있습니다.
1. (DN 29.7-정신(淨信) 경, 범행이 완성되지 않음 등의 이야기 ☞ https://sutta.kr/bbs/board.php?bo_table=nikaya04_03_06&wr_id=7)는 「‘passaṃ na passatī’ti 보면서 보지 못함」을 말하는데, 웃다까 라마뿟따가 말하는 이 말에 대해 불완전함을 지적하고 정등각의 깨달음이야말로 이런 가르침이라고 말합니다.
2. (SN 35.103-우다까 경 ☞ https://sutta.kr/bbs/board.php?bo_table=nikaya06_04_01&wr_id=19)에서 웃다까 라마뿟따는 바까 범천과 같이 ‘높은 앎을 이룩한 자(vedagū)’를 선언하지만, 부처님은 그가 높은 앎을 이룩한 자가 아니라고 말하면서 높은 앎을 이룩한 자가 누구인지 설명합니다. ― 「“kathañca, bhikkhave, vedagū hoti? yato kho, bhikkhave, bhikkhu channaṃ phassāyatanānaṃ samudayañca atthaṅgamañca assādañca ādīnavañca nissaraṇañca yathābhūtaṃ pajānāti; evaṃ kho, bhikkhave, bhikkhu vedagū hoti. 비구들이여, 어떻게 높은 앎을 이룩한 자가 되는가? 비구들이여, 비구가 육촉처(六觸處)의 자라남과 줄어듦과 매력과 위험과 해방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 비구들이여, 이렇게 비구는 높은 앎을 이룩한 자가 된다.」
경은 예류자의 성취(여실지견)으로의 높은 앎을 이룩한 자(vedagū)와 차별하여 아라한의 성취(해탈지견)는 일체의 승리자(sabbajī)라고 말하는데, ‘육촉처의 자라남과 줄어듦과 매력과 위험과 해방을 있는 그대로 안 뒤에 집착 없이 해탈한 자’입니다.
웃다까 라마뿟따는 종기의 뿌리를 파내었다고 말하지만, 부처님은 몸이 종기이고, 애(愛)가 종기의 뿌리라고 말하면서 그는 종기의 뿌리를 파내지 못했으면서 ‘나에게 종기의 뿌리를 파내어졌다.’라고 말한다고 비판합니다.
한편, 바까 범천은 ‘공덕의 업에 의해 태어남과 늙음을 극복’했다고 말하는데, (MN 117-커다란 마흔의 경 ☞ https://sutta.kr/bbs/board.php?bo_table=nikaya05_12_07&wr_id=1)에 의하면, 공덕의 업은 번뇌와 함께하는 유위의 업입니다. 생(生)-노사(老死)의 극복은 번뇌 없고 세상을 넘어섰고 길의 요소인 무위의 업에 의해 실현됩니다. 그래서 바까 범천의 선언은 사실이 아니라는 점도 지적되어야 하는데, 무명이 스몄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 경에서 주목할 다른 주제는 바까 범천이 부처님의 전생에서의 스승이었다는 사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