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bhūmijasuttaṃ (SN 12.25-부미자 경) ㅡ 몸이 있을 때, 말이 있을 때, 의(意)가 있을 때/무명이 따…
3. dasabalavaggo, 5. bhūmijasuttaṃ (SN 12.25-부미자 경)
사왓티에 머물다. 오후에 홀로 머묾에서 나온 부미자 존자가 사리뿟따 존자에게 왔다. 와서는 사리뿟따 존자와 함께 인사를 나누었다. 유쾌하고 기억할만한 이야기를 주고받은 뒤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부미자 존자는 사리뿟따 존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
“도반 사리뿟따여, ‘자신이 짓는 즐거움과 괴로움’을 선언하는, 업(業)을 설하는 어떤 사문-바라문들이 있습니다. 도반 사리뿟따여, ‘남이 짓는 즐거움과 괴로움’을 선언하는, 업(業)을 설하는 어떤 사문-바라문들이 있습니다. 도반 사리뿟따여, ‘자신도 짓고, 남도 짓는 즐거움과 괴로움’을 선언하는, 업(業)을 설하는 어떤 사문-바라문들이 있습니다. 도반 사리뿟따여, ‘자신도 짓지 않고, 남도 짓지 않고, 원인 없이 생기는 즐거움과 괴로움’을 선언하는, 업(業)을 설하는 어떤 사문-바라문들이 있습니다. 도반 사리뿟따여, 여기에 대해 세존께서는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가르칩니까? 우리가 어떻게 말하면 세존께서 설하신 것을 말하는 것이고, 사실 아닌 것으로 세존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고, 가르침을 가르침에 일치하게 설명하는 것이고, 법에 맞게 질책하여 말하는 어떤 사람에게도 비난받지 않겠습니까?”라고.
“도반들이여, ‘연기(緣起)된 즐거움과 괴로움’을 세존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무엇을 연(緣)하였습니까? 촉(觸)을 연(緣)하였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세존께서 설하신 것을 말하는 것이고, 사실 아닌 것으로 세존을 비방하지 않고, 가르침을 가르침에 일치하게 설명하고, 법에 맞게 질책하여 말하는 어떤 사람에게도 비난받지 않습니다.
거기서, 도반들이여, 업(業)을 설하는 그 사문-바라문들이 선언하는 ‘자신이 짓는 즐거움과 괴로움’도 촉(觸)을 조건으로 생깁니다. 업(業)을 설하는 그 사문-바라문들이 선언하는 ‘남이 짓는 즐거움과 괴로움’도 촉(觸)을 조건으로 생깁니다. 업(業)을 설하는 그 사문-바라문들이 선언하는 ‘자신도 짓고, 남도 짓는 즐거움과 괴로움’도 촉(觸)을 조건으로 생깁니다. 업(業)을 설하는 그 사문-바라문들이 선언하는 ‘자신도 짓지 않고, 남도 짓지 않고, 원인 없이 생기는 즐거움과 괴로움’도 촉(觸)을 조건으로 생깁니다.
거기서, 도반들이여, ‘스스로 짓는 즐거움과 괴로움’을 선언하는 업(業)을 설하는 사문-바라문들이 참으로 촉(觸)과 다른 곳에서 경험할 것이라는 경우는 없습니다. ‘남이 짓는 즐거움과 괴로움’을 선언하는 업(業)을 설하는 사문-바라문들도 참으로 촉(觸)과 다른 곳에서 경험할 것이라는 경우는 없습니다. ‘자신도 짓고, 남도 짓는 즐거움과 괴로움’을 선언하는 업(業)을 설하는 사문-바라문들도 참으로 촉(觸)과 다른 곳에서 경험할 것이라는 경우는 없습니다. ‘자신도 짓지 않고, 남도 짓지 않고, 원인 없이 생기는 즐거움과 괴로움’을 선언하는 업(業)을 설하는 사문-바라문들도 참으로 촉(觸)과 다른 곳에서 경험할 것이라는 경우는 없습니다.”
사리뿟따 존자와 부미자 존자가 함께한 이 우정의 대화를 아난다 존자가 들었다. 그리고 라자가하에서 탁발을 위해 돌아다닌 뒤에 오후에 탁발에서 돌아온 아난다 존자는 세존에게 왔다. 와서는 세존에게 절한 뒤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아난다 존자는 사리뿟따 존자와 부미자 존자가 함께한 이 우정의 대화를 들은 그대로 모두 세존에게 말했다.
“훌륭하고 훌륭하다, 아난다여! 사리뿟따가 바르게 말하였듯이, 아난다여, 나는 ‘연기(緣起)된 즐거움과 괴로움’을 말했다. 무엇을 연(緣)했는가? 촉(觸)을 연(緣)하였다. 이렇게 말하면, 내가 말한 것을 말하는 것이고, 나를 거짓으로 비난하는 것이 아니고, 가르침에 일치하는 법을 설명하는 것이고, 이어서 말하는 동료수행자가 누구라도 낮은 상태로 오게 되지 않는다.
거기서, 아난다여, 업(業)을 설하는 그 사문-바라문들이 선언하는 ‘자신이 짓는 즐거움과 괴로움’도 촉(觸)을 조건으로 생긴다. 업(業)을 설하는 그 사문-바라문들이 선언하는 ‘남이 짓는 즐거움과 괴로움’도 촉(觸)을 조건으로 생긴다. 업(業)을 설하는 그 사문-바라문들이 선언하는 ‘자신도 짓고, 남도 짓는 즐거움과 괴로움’도 촉(觸)을 조건으로 생긴다. 업(業)을 설하는 그 사문-바라문들이 선언하는 ‘자신도 짓지 않고, 남도 짓지 않고, 원인 없이 생기는 즐거움과 괴로움’도 촉(觸)을 조건으로 생긴다.
거기서, 아난다여, ‘스스로 짓는 즐거움과 괴로움’을 선언하는 업(業)을 설하는 사문-바라문들이 참으로 촉(觸)과 다른 곳에서 경험할 것이라는 경우는 없다. ‘남이 짓는 즐거움과 괴로움’을 선언하는 업(業)을 설하는 사문-바라문들도 참으로 촉(觸)과 다른 곳에서 경험할 것이라는 경우는 없다. ‘자신도 짓고, 남도 짓는 즐거움과 괴로움’을 선언하는 업(業)을 설하는 사문-바라문들도 참으로 촉(觸)과 다른 곳에서 경험할 것이라는 경우는 없다. ‘자신도 짓지 않고, 남도 짓지 않고, 원인 없이 생기는 즐거움과 괴로움’을 선언하는 업(業)을 설하는 사문-바라문들도 참으로 촉(觸)과 다른 곳에서 경험할 것이라는 경우는 없다.
몸이 있을 때, 아난다여, 몸의 의도를 원인으로 내적인 즐거움과 괴로움이 생긴다. 말이 있을 때, 아난다여, 말의 의도를 원인으로 내적인 즐거움과 괴로움이 생긴다. 의(意)가 있을 때, 아난다여, 의(意)의 의도를 원인으로 내적인 즐거움과 괴로움이 생긴다.
아난다여, 내적인 즐거움과 괴로움이 생기는 조건이 되는 신행(身行)을 자신이 짓는다. 또는, 아난다여, 내적인 즐거움과 괴로움이 생기는 조건이 되는 신행(身行)을 남들이 짓는다. 아난다여, 내적인 즐거움과 괴로움이 생기는 조건이 되는 신행(身行)을 옳고 그름을 판단하면서 짓는다. 또는, 아난다여, 내적인 즐거움과 괴로움이 생기는 조건이 되는 신행(身行)을 옳고 그름의 판단 없이 짓는다.
아난다여, 내적인 즐거움과 괴로움이 생기는 조건이 되는 구행(口行)을 자신이 짓는다. 또는, 아난다여, 내적인 즐거움과 괴로움이 생기는 조건이 되는 구행(口行)을 남들이 짓는다. 아난다여, 내적인 즐거움과 괴로움이 생기는 조건이 되는 구행(口行)을 옳고 그름을 판단하면서 짓는다. 또는, 아난다여, 내적인 즐거움과 괴로움이 생기는 조건이 되는 신행(身行)을 옳고 그름의 판단 없이 짓는다.
아난다여, 내적인 즐거움과 괴로움이 생기는 조건이 되는 의행(意行)을 자신이 짓는다. 또는, 아난다여, 내적인 즐거움과 괴로움이 생기는 조건이 되는 의행(意行)을 남들이 짓는다. 아난다여, 내적인 즐거움과 괴로움이 생기는 조건이 되는 의행(意行)을 옳고 그름을 판단하면서 짓는다. 또는, 아난다여, 내적인 즐거움과 괴로움이 생기는 조건이 되는 의행(意行)을 옳고 그름의 판단 없이 짓는다.
아난다여, 이 법들에 대해 무명(無明)이 따라간다. 그러나 아난다여, 무명(無明)이 남김없이 바래어 소멸할 때 내적인 즐거움과 괴로움이 생기는 조건이 되는 몸이 없게 된다. 내적인 즐거움과 괴로움이 생기는 조건이 되는 말이 없게 된다. 내적인 즐거움과 괴로움이 생기는 조건이 되는 의(意)가 없게 된다. 내적인 즐거움과 괴로움이 생기는 조건이 되는 밭이 없게 된다. 내적인 즐거움과 괴로움이 생기는 조건이 되는 장소가 없게 된다. 내적인 즐거움과 괴로움이 생기는 조건이 되는 처(處)가 없게 된다. 내적인 즐거움과 괴로움이 생기는 조건이 되는 과정이 없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