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aññatitthiyasuttaṃ (SN 12.24-외도 경)
3. dasabalavaggo, 4. aññatitthiyasuttaṃ (SN 12.24-외도 경)
라자가하에서 웰루와나에 머물다. 거기서 사리뿟따 존자는 오전에 옷차림을 바르게 하고 발우와 가사를 지니고 탁발을 위해서 라자가하로 들어갔다. 그때 사리뿟따 존자에게 “탁발을 위해 라자가하로 가기에는 너무 이르다. 나는 외도 유행승들의 사원으로 가야겠다.”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래서 사리뿟따 존자는 외도 유행승들의 사원으로 갔다. 가서는 그 외도 유행승들과 함께 인사를 나누었다. 유쾌하고 기억할만한 이야기를 주고받은 뒤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사리뿟따 존자에게 그 외도 유행승들은 이렇게 말했다. ―
“도반 사리뿟따여, ‘자신이 짓는 괴로움’을 선언하는, 업(業)을 설하는 어떤 사문-바라문들이 있습니다. 도반 사리뿟따여, ‘남이 짓는 괴로움’을 선언하는, 업(業)을 설하는 어떤 사문-바라문들이 있습니다. 도반 사리뿟따여, ‘자신도 짓고, 남도 짓는 괴로움’을 선언하는, 업(業)을 설하는 어떤 사문-바라문들이 있습니다. 도반 사리뿟따여, ‘자신도 짓지 않고, 남도 짓지 않고, 원인 없이 생기는 괴로움’을 선언하는, 업(業)을 설하는 어떤 사문-바라문들이 있습니다. 도반 사리뿟따여, 여기에 대해 사문 고따마는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가르칩니까? 우리가 어떻게 말하면 사문 고따마가 설하신 것을 말하는 것이고, 사실 아닌 것으로 사문 고따마를 비난하는 것이 아니고, 가르침을 가르침에 일치하게 설명하는 것이고, 법에 맞게 질책하여 말하는 어떤 사람에게도 비난받지 않겠습니까?”라고.
“도반들이여, ‘연기(緣起)된 괴로움’을 세존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무엇을 연(緣)하였습니까? 촉(觸)을 연(緣)하였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세존께서 설하신 것을 말하는 것이고, 사실 아닌 것으로 세존을 비방하지 않고, 가르침을 가르침에 일치하게 설명하고, 법에 맞게 질책하여 말하는 어떤 사람에게도 비난받지 않습니다.
거기서, 도반들이여, 업(業)을 설하는 그 사문-바라문들이 선언하는 ‘자신이 짓는 괴로움’도 촉(觸)을 조건으로 생깁니다. 업(業)을 설하는 그 사문-바라문들이 선언하는 ‘남이 짓는 괴로움’도 촉(觸)을 조건으로 생깁니다. 업(業)을 설하는 그 사문-바라문들이 선언하는 ‘자신도 짓고, 남도 짓는 괴로움’도 촉(觸)을 조건으로 생깁니다. 업(業)을 설하는 그 사문-바라문들이 선언하는 ‘자신도 짓지 않고, 남도 짓지 않고, 원인 없이 생기는 괴로움’도 촉(觸)을 조건으로 생깁니다.
거기서, 도반들이여, ‘스스로 짓는 괴로움’을 선언하는 업(業)을 설하는 사문-바라문들이 참으로 촉(觸)과 다른 곳에서 경험할 것이라는 경우는 없습니다. ‘남이 짓는 괴로움’을 선언하는 업(業)을 설하는 사문-바라문들도 참으로 촉(觸)과 다른 곳에서 경험할 것이라는 경우는 없습니다. ‘자신도 짓고, 남도 짓는 괴로움’을 선언하는 업(業)을 설하는 사문-바라문들도 참으로 촉(觸)과 다른 곳에서 경험할 것이라는 경우는 없습니다. ‘자신도 짓지 않고, 남도 짓지 않고, 원인 없이 생기는 괴로움’을 선언하는 업(業)을 설하는 사문-바라문들도 참으로 촉(觸)과 다른 곳에서 경험할 것이라는 경우는 없습니다.”
사리뿟따 존자와 외도 유행승들이 함께한 이 우정의 대화를 아난다 존자가 들었다. 그리고 라자가하에서 탁발을 위해 돌아다닌 뒤에 오후에 탁발에서 돌아온 아난다 존자는 세존에게 왔다. 와서는 세존에게 절한 뒤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아난다 존자는 사리뿟따 존자와 외도 유행승들이 함께한 이 우정의 대화를 들은 그대로 모두 세존에게 말했다.
“훌륭하고 훌륭하다, 아난다여! 사리뿟따가 바르게 말하였듯이, 아난다여, 나는 ‘연기(緣起)된 괴로움’을 말했다. 무엇을 연(緣)했는가? 촉(觸)을 연(緣)하였다. 이렇게 말하면, 내가 설한 것을 말하는 것이고, 사실 아닌 것으로 나를 비방하지 않고, 가르침을 가르침에 일치하게 설명하고, 법에 맞게 질책하여 말하는 어떤 사람에게도 비난받지 않는다.
거기서, 아난다여, 업(業)을 설하는 그 사문-바라문들이 선언하는 ‘자신이 짓는 괴로움’도 촉(觸)을 조건으로 생긴다. 업(業)을 설하는 그 사문-바라문들이 선언하는 ‘남이 짓는 괴로움’도 촉(觸)을 조건으로 생긴다. 업(業)을 설하는 그 사문-바라문들이 선언하는 ‘자신도 짓고, 남도 짓는 괴로움’도 촉(觸)을 조건으로 생긴다. 업(業)을 설하는 그 사문-바라문들이 선언하는 ‘자신도 짓지 않고, 남도 짓지 않고, 원인 없이 생기는 괴로움’도 촉(觸)을 조건으로 생긴다.
거기서, 아난다여, ‘스스로 짓는 괴로움’을 선언하는 업(業)을 설하는 사문-바라문들이 참으로 촉(觸)과 다른 곳에서 경험할 것이라는 경우는 없다. ‘남이 짓는 괴로움’을 선언하는 업(業)을 설하는 사문-바라문들도 참으로 촉(觸)과 다른 곳에서 경험할 것이라는 경우는 없다. ‘자신도 짓고, 남도 짓는 괴로움’을 선언하는 업(業)을 설하는 사문-바라문들도 참으로 촉(觸)과 다른 곳에서 경험할 것이라는 경우는 없다. ‘자신도 짓지 않고, 남도 짓지 않고, 원인 없이 생기는 괴로움’을 선언하는 업(業)을 설하는 사문-바라문들도 참으로 촉(觸)과 다른 곳에서 경험할 것이라는 경우는 없다.
한때, 아난다여, 나는 여기 라자가하에서 웰루와나의 다람쥐 기르는 곳에 머물렀다. 그때 아난다여, 나는 오전에 옷차림을 바르게 하고 발우와 가사를 지니고 탁발을 위해서 라자가하로 들어갔다. 아난다여, 그런 나에게 “탁발을 위해 라자가하로 가기에는 너무 이르다. 나는 외도 유행승들의 사원으로 가야겠다.”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래서 아난다여, 나는 외도 유행승들의 사원으로 갔다. 가서는 그 외도 유행승들과 함께 인사를 나누었다. 유쾌하고 기억할만한 이야기를 주고받은 뒤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나에게, 아난다여, 그 외도 유행승들은 이렇게 말했다. ―
‘도반 고따마여, ‘자신이 짓는 괴로움’을 선언하는, 업(業)을 설하는 어떤 사문-바라문들이 있습니다. 도반 고따마여, ‘남이 짓는 괴로움’을 선언하는, 업(業)을 설하는 어떤 사문-바라문들이 있습니다. 도반 고따마여, ‘자신도 짓고, 남도 짓는 괴로움’을 선언하는, 업(業)을 설하는 어떤 사문-바라문들이 있습니다. 도반 고따마여, ‘자신도 짓지 않고, 남도 짓지 않고, 원인 없이 생기는 괴로움’을 선언하는, 업(業)을 설하는 어떤 사문-바라문들이 있습니다. 도반 고따마여, 여기에 대해 고따마 존자께서는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가르칩니까? 우리가 어떻게 말하면 고따마 존자께서 설하신 것을 말하는 것이고, 사실 아닌 것으로 고따마 존자를 비난하는 것이 아니고, 가르침을 가르침에 일치하게 설명하는 것이고, 법에 맞게 질책하여 말하는 어떤 사람에게도 비난받지 않겠습니까?’라고.
그렇게 말했을 때, 아난다여, 나는 그 외도 유행승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 ‘도반들이여, ‘연기(緣起)된 괴로움’을 나는 말했습니다. 무엇을 연(緣)하였습니까? 촉(觸)을 연(緣)하였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내가 설한 것을 말하는 것이고, 사실 아닌 것으로 나를 비방하지 않고, 가르침을 가르침에 일치하게 설명하고, 법에 맞게 질책하여 말하는 어떤 사람에게도 비난받지 않습니다.
거기서, 도반들이여, 업(業)을 설하는 그 사문-바라문들이 선언하는 ‘자신이 짓는 괴로움’도 촉(觸)을 조건으로 생깁니다. 업(業)을 설하는 그 사문-바라문들이 선언하는 ‘남이 짓는 괴로움’도 촉(觸)을 조건으로 생깁니다. 업(業)을 설하는 그 사문-바라문들이 선언하는 ‘자신도 짓고, 남도 짓는 괴로움’도 촉(觸)을 조건으로 생깁니다. 업(業)을 설하는 그 사문-바라문들이 선언하는 ‘자신도 짓지 않고, 남도 짓지 않고, 원인 없이 생기는 괴로움’도 촉(觸)을 조건으로 생깁니다.
거기서, 도반들이여, ‘스스로 짓는 괴로움’을 선언하는 업(業)을 설하는 사문-바라문들이 참으로 촉(觸)과 다른 곳에서 경험할 것이라는 경우는 없습니다. ‘남이 짓는 괴로움’을 선언하는 업(業)을 설하는 사문-바라문들도 참으로 촉(觸)과 다른 곳에서 경험할 것이라는 경우는 없습니다. ‘자신도 짓고, 남도 짓는 괴로움’을 선언하는 업(業)을 설하는 사문-바라문들도 참으로 촉(觸)과 다른 곳에서 경험할 것이라는 경우는 없습니다. ‘자신도 짓지 않고, 남도 짓지 않고, 원인 없이 생기는 괴로움’을 선언하는 업(業)을 설하는 사문-바라문들도 참으로 촉(觸)과 다른 곳에서 경험할 것이라는 경우는 없습니다.”라고.
“대덕이시여, 참으로 놀랍습니다. 대덕이시여, 참으로 신기합니다. 참으로 하나의 구절로써 모든 의미가 말해질 것입니다. 대덕이시여, 저는 이 의미를 상세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심오함과 심오함의 나타남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난다여, 여기서 그것을 말해보라.” “대덕이시여, 만약 저에게 ‘도반 아난다여, 노사(老死)는 무엇이 인연이고, 무엇이 자라남이고, 무엇에서 생기고, 무엇이 근원입니까?’라고 묻는다면, 이렇게 질문받은 저는, 대덕이시여, ‘도반이여, 노사(老死)는 생(生)이 인연이고, 생이 자라남이고, 생에서 생기고, 생이 근원입니다.’라고 설명할 것입니다. 이렇게 질문받은 저는, 대덕이시여, 이렇게 설명할 것입니다.
대덕이시여, 만약 저에게 ‘도반 아난다여, 생(生)은 무엇이 인연이고, 무엇이 자라남이고, 무엇에서 생기고, 무엇이 근원입니까?’라고 묻는다면, 이렇게 질문받은 저는, 대덕이시여, ‘도반이여, 생(生)은 유(有)가 인연이고, 유가 자라남이고, 유에서 생기고, 유가 근원입니다.’라고 설명할 것입니다. 이렇게 질문받은 저는, 대덕이시여, 이렇게 설명할 것입니다.
대덕이시여, 만약 저에게 ‘도반 아난다여, 유(有)는 무엇이 인연이고, 무엇이 자라남이고, 무엇에서 생기고, 무엇이 근원입니까?’라고 묻는다면, 이렇게 질문받은 저는, 대덕이시여, ‘도반들이여, 유(有)는 취(取)가 인연이고, 취가 자라남이고, 취에서 생기고, 취가 근원입니다.’라고 설명할 것입니다. 이렇게 질문받은 저는, 대덕이시여, 이렇게 설명할 것입니다.
대덕이시여, 만약 저에게 ‘도반 아난다여, 취(取)는 … 도반 아난다여, 애(愛)는 … 도반 아난다여, 수(受)는 … 대덕이시여, 만약 저에게 ‘도반 아난다여, 촉(觸)은 무엇이 인연이고, 무엇이 자라남이고, 무엇에서 생기고, 무엇이 근원입니까?’라고 묻는다면, 이렇게 질문받은 저는, 대덕이시여, ‘도반들이여, 촉(觸)은 육입(六入)이 인연이고, 육입이 자라남이고, 육입에서 생기고, 육입이 근원입니다.’라고 설명하고, ‘육촉처(六觸處)가 남김없이 바래어 소멸할 때, 도반이여, 촉(觸)이 소멸하고, 촉(觸)이 소멸할 때 수(受)가 소멸하고, 수(受)가 소멸할 때 애(愛)가 소멸하고, 애(愛)가 소멸할 때 취(取)가 소멸하고, 취(取)가 소멸할 때 유(有)가 소멸하고, 유(有)가 소멸할 때 생(生)이 소멸하고, 생(生)이 소멸할 때 노사(老死)와 수비고우뇌(愁悲苦憂惱)가 소멸합니다. 이렇게 이 모든 괴로움 무더기가 소멸합니다.’라고, 이렇게 질문받은 저는, 대덕이시여, 이렇게 설명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