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kaccānagottasuttaṃ (SN 12.15-깟짜나곳따 경)ㅡ중(中)에 의해 설해진 법(法)
2. āhāravaggo, 5. kaccānagottasuttaṃ (SN 12.15-깟짜나곳따 경)
사왓티에 머물다. 그때 깟짜나곳따 존자가 세존에게 갔다. 가서는 세존에게 절한 뒤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깟짜나곳따 존자는 세존에게 이렇게 말했다. — “대덕이시여, ‘바른 견해, 바른 견해’라고 불립니다. 어떤 점에서 바른 견해입니까?”
“깟짜나여, 세상은 대부분 ‘있음’과 ‘없음’이라는 쌍(雙)에 의지한다. 그러나 깟짜나여, 세상에서 자라남을 있는 그대로 바른 지혜로 보는 자에게 세상에서 없음이라는 견해가 없다. 깟짜나여, 세상에서 소멸을 있는 그대로 바른 지혜로 보는 자에게 세상에서 있음이라는 견해가 없다. 깟짜나여, 세상은 주로 다가가서 붙잡음에 의한 경향과 집착에 묶여 있다. 그런 심(心)의 다가가서 붙잡음에 의한 결정-경향-잠재성향에게 ‘나의 아(我)’라고 접근하지 않고, 붙잡지 않고, 결정하지 않는다. ‘생겨나는 것인 괴로움이 생겨나고, 소멸하는 것인 괴로움이 소멸한다.’라고 회의하지 않고, 의심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조건으로 하지 않는 앎이 여기에 있다. 깟짜나여, 이런 점에서 바른 견해이다.
깟짜나여, ‘모든 것은 있다.’라는 것은 한끝이다. ‘모든 것은 없다.’라는 것은 두 번째 끝이다. 깟짜나여, 이런 두 끝으로 접근하지 않고 여래는 그대에게 중(中)에 의해서 법을 설한다. — ‘무명(無明)을 조건으로 행(行)들이, 행들을 조건으로 식(識)이, 식을 조건으로 명색(名色)이, 명색을 조건으로 육입(六入)이, 육입을 조건으로 촉(觸)이, 촉을 조건으로 수(受)가, 수를 조건으로 애(愛)가, 애를 조건으로 취(取)가, 취를 조건으로 유(有)가, 유를 조건으로 생이, 생을 조건으로 노사(老死)와 수비고우뇌(愁悲苦憂惱)가 생긴다. 이렇게 이 모든 괴로움 무더기가 자라난다[고집(苦集)]. 그러나 무명이 남김없이 바래어 소멸할 때 행들이 소멸하고, 행들이 소멸할 때 식이 소멸하고, 식이 소멸할 때 명색이 소멸하고, 명색이 소멸할 때 육입이 소멸하고, 육입이 소멸할 때 촉이 소멸하고, 촉이 소멸할 때 수가 소멸하고, 수가 소멸할 때 애가 소멸하고, 애가 소멸할 때 취가 소멸하고, 취가 소멸할 때 유가 소멸하고, 유가 소멸할 때 생이 소멸하고, 생이 소멸할 때 노사와 수비고우뇌가 소멸한다. 이렇게 이 모든 괴로움 무더기가 소멸한다[고멸(苦滅)].’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