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ñāṇavatthusuttaṃ (SN 12.33-앎의 영역 경1)[예류자의 정의]
4. kaḷārakhattiyavaggo, 3. ñāṇavatthusuttaṃ (SN 12.33-앎의 영역 경1)
사왓티에서. "비구들이여, 그대들에게 44가지 앎의 영역을 설할 것이다. 그것을 듣고 잘 사고하라. 나는 말하겠다. '알겠습니다, 대덕이시여'라고 비구들은 세존께 대답했다. 세존은 이렇게 말했다. ―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것이 44가지 앎의 영역인가? 노사(老死)에 대한 앎, 노사의 자라남에 대한 앎, 노사의 소멸에 대한 앎, 노사의 소멸로 이끄는 실천에 대한 앎, 생(生)에 대한 앎, 생의 자라남에 대한 앎, 생의 소멸에 대한 앎, 생의 소멸로 이끄는 실천에 대한 앎, 유(有)에 대한 앎, 유의 자라남에 대한 앎, 유의 소멸에 대한 앎, 유의 소멸로 이끄는 실천에 대한 앎, 취(取)에 대한 앎, 취의 자라남에 대한 앎, 취의 소멸에 대한 앎, 취의 소멸로 이끄는 실천에 대한 앎, 애(愛)에 대한 앎, 애의 자라남에 대한 앎, 애의 소멸에 대한 앎, 애의 소멸로 이끄는 실천에 대한 앎, 수(受)에 대한 앎, 수의 자라남에 대한 앎, 수의 소멸에 대한 앎, 수의 소멸로 이끄는 실천에 대한 앎, 촉(觸)에 대한 앎, 촉의 자라남에 대한 앎, 촉의 소멸에 대한 앎, 촉의 소멸로 이끄는 실천에 대한 앎, 육입(六入)에 대한 앎, 육입의 자라남에 대한 앎, 육입의 소멸에 대한 앎, 육입의 소멸로 이끄는 실천에 대한 앎, 명색(名色)에 대한 앎, 명색의 자라남에 대한 앎, 명색의 소멸에 대한 앎, 명색의 소멸로 이끄는 실천에 대한 앎, 식(識)에 대한 앎, 식의 자라남에 대한 앎, 식의 소멸에 대한 앎, 식의 소멸로 이끄는 실천에 대한 앎, 행에 대한 앎, 행의 자라남에 대한 앎, 행의 소멸에 대한 앎, 행의 소멸로 이끄는 실천에 대한 앎, 이것이, 비구들이여, 44가지 앎의 영역이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무엇이 노사(老死-늙음-죽음)인가? 이런저런 중생에 속하는 그러그러한 중생의 무리에서 늙음, 노쇠함, 치아가 부러짐, 머리가 흼, 주름진 피부, 수명의 감소, 기능[근(根)]의 파괴, 이것이 노(老-늙음)이라고 불린다. 이런저런 중생에 속하는 그러그러한 중생의 무리로부터 종말, 제거됨, 해체, 사라짐, 사망, 죽음, 서거, 온(蘊)의 해체, 육체를 내려놓음, 이것이 사(死-죽음)이라고 불린다. 이렇게 이것이 노(老-늙음)고, 이것이 사(死-죽음)다. 이것이, 비구들이여, 노사(老死-늙음-죽음)라고 불린다.
생(生)이 자라날 때 노사(老死)가 자라나고, 생이 소멸할 때 노사가 소멸한다. 오직 이것, 정견-정사유-정어-정업-정명-정정진-정념-정정의 여덟 요소로 구성된 성스러운 도가 노사의 소멸로 이끄는 실천이다.
비구들이여, 성스러운 제자가 이렇게 노사를 꿰뚫어 알고, 이렇게 노사의 자라남을 꿰뚫어 알고, 이렇게 노사의 소멸을 꿰뚫어 알고, 이렇게 노사의 소멸로 이끄는 실천을 꿰뚫어 알 때, 이것이 법에 대한 앎이다. 그는 보고 알고 시간을 넘어서고 성취하고 꿰뚫은 이러한 법을 과거와 미래에 적용하여 법에 대한 앎을 이끈다.
누구든지 노사를 실답게 알고, 노사의 자라남을 실답게 알고, 노사의 소멸을 실답게 알고, 노사의 소멸로 이끄는 실천을 실답게 알았던 과거의 사문들이나 바라문들은 모두 지금의 나와 같이 실답게 알았다.
누구든지 노사를 실답게 알고, 노사의 자라남을 실답게 알고, 노사의 소멸을 실답게 알고, 노사의 소멸로 이끄는 실천을 실답게 알 미래의 사문들이나 바라문들은 모두 지금의 나와 같이 실답게 알 것이다. 이것이 뒤따르는 앎이다.
비구들이여, 성스러운 제자에게 법에 대한 앎과 뒤따르는 앎이라는 청정하고 깨끗한 이런 두 가지 앎이 있을 때, 비구들이여, 이것이 성스러운 제자는 견해를 갖춘 자라고도, 봄을 갖춘 자라고도, 이런 정법(正法)에 온 자라고도, ‘이런 정법을 본다.’라고도, 유학의 지(知)를 갖춘 자라고도, 유학의 명(明)을 갖춘 자라고도, 법의 흐름을 증득한 자라고도, 성스러운 꿰뚫음의 지혜를 가진 자라고도, ‘불사(不死)의 문을 두드리며 머문다.’라고도 불린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무엇이 생(生)인가? … 그러면 비구들이여, 무엇이 유(有)인가? … 그러면 비구들이여, 무엇이 취(取)인가? … 그러면 비구들이여, 무엇이 애(愛)인가? … 그러면 비구들이여, 무엇이 수(受)인가? … 그러면 비구들이여, 무엇이 촉(觸)인가? … 그러면 비구들이여, 무엇이 육입(六入)인가? … 그러면 비구들이여, 무엇이 명색(名色)인가? … 그러면 비구들이여, 무엇이 식(識)인가? … 그러면 비구들이여, 무엇이 행(行)들인가? 비구들이여, 이런 세 가지 행들이 있다. ― 신행(身行), 구행(口行), 심행(心行). 비구들이여, 이것이 행들이라고 불린다.
무명이 자라날 때 행들이 자라나고, 무명이 소멸할 때 행들이 소멸한다. 오직 이것, 정견-정사유-정어-정업-정명-정정진-정념-정정의 여덟 요소로 구성된 성스러운 도가 행들의 소멸로 이끄는 실천이다.
비구들이여, 성스러운 제자가 이렇게 행들을 꿰뚫어 알고, 이렇게 행들의 자라남을 꿰뚫어 알고, 이렇게 행들의 소멸을 꿰뚫어 알고, 이렇게 행들의 소멸로 이끄는 실천을 꿰뚫어 알 때, 이것이 법에 대한 앎이다. 그는 보고 알고 시간을 넘어서고 성취하고 꿰뚫은 이러한 법을 과거와 미래에 적용하여 법에 대한 앎을 이끈다.
누구든지 행들을 실답게 알고, 행들의 자라남을 실답게 알고, 행들의 소멸을 실답게 알고, 행들의 소멸로 이끄는 실천을 실답게 알았던 과거의 사문들이나 바라문들은 모두 지금의 나와 같이 실답게 알았다.
누구든지 행들을 실답게 알고, 행들의 자라남을 실답게 알고, 행들의 소멸을 실답게 알고, 행들의 소멸로 이끄는 실천을 실답게 알 미래의 사문들이나 바라문들은 모두 지금의 나와 같이 실답게 알 것이다. 이것이 뒤따르는 앎이다.
비구들이여, 성스러운 제자에게 법에 대한 앎과 뒤따르는 앎이라는 청정하고 깨끗한 이런 두 가지 앎이 있을 때, 비구들이여, 이것이 성스러운 제자는 견해를 갖춘 자라고도, 봄을 갖춘 자라고도, 이런 정법(正法)에 온 자라고도, ‘이런 정법을 본다.’라고도, 유학의 지(知)를 갖춘 자라고도, 유학의 명(明)을 갖춘 자라고도, 법의 흐름에 든 자라고도, 성스러운 꿰뚫음의 지혜를 가진 자라고도, ‘불사(不死)의 문을 두드리며 머문다.’라고도 불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