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puttamaṃsūpamasuttaṃ (SN 12.63-아들의 고기 비유 경)
7. mahāvaggo, 3. puttamaṃsūpamasuttaṃ (SN 12.63-아들의 고기 비유 경)
“비구들이여, 누적된 것인 중생을 유지하고 존재를 추구하는 자를 도와주기 위한 네 가지 자량(資糧)[사식(四食)]이 있다. 무엇이 넷인가? 거칠거나 미세한 덩어리진 자량(資糧)[단식(段食)], 촉(觸)이 두 번째이고[촉식(觸食)], 의사(意思)가 세 번째이고[의사식(意思食)], 식(識)이 네 번째이다[식식(識食)].
그러면 비구들이여, 덩어리진 자량(資糧)[단식(段食)]은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예를 들면, 비구들이여, 남편과 아내인 두 사람이 적은 식량을 가지고 사막의 길을 떠날 것이다. 그들에게 사랑스럽고 마음에 드는 외아들이 있다. 그런데 비구들이여, 사막의 길을 떠난 남편과 아내인 두 사람에게 적은 양식은 다 소비되고 떨어질 것이다. 그들에게 건너지 못한 남아있는 사막이 있을 것이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남편과 아내인 두 사람에게 이런 생각이 들 것이다. ― ‘우리들의 적은 양식은 다 소비되고 떨어졌고, 건너지 못한 남아있는 사막이 있다. 참으로 우리는 이 사랑스럽고 마음에 드는 외아들을 죽여서 마른고기를 후추를 뿌려 만든 뒤 아들의 고기를 먹으면서 남아있는 사막을 건너야 할 것이다. 우리 셋 모두 다 죽어서는 안 된다.’라고. 그래서 비구들이여, 남편과 아내인 두 사람은 사랑스럽고 마음에 드는 그 외아들을 죽여서 마른고기를 후추를 뿌려 만든 뒤 아들의 고기를 먹으면서 남아있는 사막을 건널 것이다. 그들은 아들의 고기를 먹을 것이고, ‘외아들아, 어디에 있느냐! 외아들아, 어디에 있느냐!’라고 하면서 가슴을 찧을 것이다."
비구들이여, 그것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들이 달리기 위해서 자량(資糧)을 먹고, 여분을 위해서 자량(資糧)을 먹고, 꾸밈을 위해서 자량(資糧)을 먹고, 장식을 위해서 자량(資糧)을 먹겠는가?” “아닙니다, 대덕이시여.” “비구들이여, 참으로 그들은 사막을 건너기 위한 만큼만 자량(資糧)을 먹지 않았겠는가?” “그렇습니다, 대덕이시여.”
“비구들이여, ‘덩어리진 자량(資糧)은 단지 이렇게 보아야 한다.’라고 나는 말한다. 비구들이여, 덩어리진 자량(資糧)이 완전히 알려질 때 다섯 가지 소유의 사유에 묶인 것들에 대한 탐(貪)이 완전히 알려진다. 다섯 가지 소유의 사유에 묶인 것들에 대한 탐(貪)이 완전히 알려질 때 성스러운 제자를 다시 이 세상으로 돌아오게 되는 묶는 족쇄가 없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촉식(觸食)은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예를 들면, 비구들이여, 만약 가죽이 벗겨진 소가 벽을 의지해서 서 있으면 그 벽을 의지하는 존재들이 그것을 깨물 것이다. 만약 나무를 의지해서 서 있으면 나무를 의지하는 존재들이 그것을 깨물 것이다. 만약 물을 의지해서 서 있으면 물을 의지하는 존재들이 그것을 깨물 것이다. 만약 허공을 의지해서 서 있으면 허공을 의지하는 존재들이 그것을 깨물 것이다. 이렇게, 비구들이여, 가죽이 벗겨진 소가 어떤 것을 의지해서 서 있더라도 그것을 의지하는 존재들이 그것을 깨물 것이다. 비구들이여, ‘촉식(觸食)은 단지 이렇게 보아야 한다.’라고 나는 말한다. 비구들이여, 촉식(觸食)이 완전히 알려질 때 세 가지 수(受)가 완전히 알려진다. 세 가지 수(受)가 완전히 알려질 때 성스러운 제자에게 ‘어떤 것이든 더 해야 할 것이 없다.’라고 나는 말한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의사식(意思食)은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예를 들면, 비구들이여, 사람 키 남짓하고 불꽃이나 연기가 없는 숯으로 가득한 숯불 구덩이가 있다. 거기에 삶을 원하고 죽음을 원하지 않고 행복을 원하고 괴로움을 싫어하는 사람이 올 것이다. 그를 두 명의 힘센 사람이 각각 다른 팔들을 잡고서 그 숯불 구덩이로 끌고 갈 것이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이것은 그 사람의 의도와는 거리가 멀고 기대와도 거리가 멀고 지향과도 거리가 멀 것이다. 그것의 원인은 무엇인가? 비구들이여, 그 사람은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 ‘나는 이 숯불 구덩이에 빠질 것이다. 그래서 죽거나 죽을 만큼의 괴로움을 당하게 될 것이다.’라고. 비구들이여, ‘의사식(意思食)은 단지 이렇게 보아야 한다.’라고 나는 말한다. 비구들이여, 의사식(意思食)이 완전히 알려질 때 세 가지 애(愛)가 완전히 알려진다. 세 가지 애(愛)가 완전히 알려질 때 성스러운 제자에게 ‘어떤 것이든 더 해야 할 것이 없다.’라고 나는 말한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식식(識食)은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예를 들면, 비구들이여, 범죄를 저지른 도둑을 붙잡아 '왕이시여, 이 자는 범죄를 저지른 도둑입니다. 왕께서 원하시는 처벌을 명령하십시오.'라고 하면서 왕에게 데려올 것이다. 그런 그에 대해 왕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 ‘여보게들, 그대들은 가서 그 사람을 아침에 백 자루의 창으로 찌르시오.’ 그러면 그들은 그를 아침에 백 자루의 창으로 찌를 것이다. 다시 왕은 한낮에 이렇게 말할 것이다. ‘여보게들, 그 사람은 어떻게 되었는가?’ ‘왕이시여, 그렇게 살아있습니다.’ 그런 그를 왕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 ‘여보게들, 그대들은 가서 그 사람을 낮에 백 자루의 창으로 찌르시오.’ 그러면 그를 그들은 낮에 백 자루의 창으로 찌를 것이다. 다시 왕은 저녁에 이렇게 말할 것이다. ‘여보게들, 그 사람은 어떻게 되었는가?’ ‘왕이시여, 그렇게 살아있습니다.’ 그런 그를 왕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 ‘여보게들, 그대들은 가서 그 사람을 저녁에 백 자루의 창으로 찌르시오.’ 그러면 그를 그들은 저녁에 백 자루의 창으로 찌를 것이다. 비구들이여, 그것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루 동안 삼백 자루의 창에 찔린 그 사람은 그 때문에 괴로움[고(苦)]과 고뇌[우(憂)]를 겪지 않겠는가?” “대덕이시여, 한 자루의 창에 찔린 사람도 그 때문에 괴로움과 고뇌를 겪을 것입니다. 삼백 자루의 창에 찔린 사람이야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비구들이여, ‘식식(識食)은 단지 이렇게 보아야 한다.’라고 나는 말한다. 비구들이여, 식식(識食)이 완전히 알려질 때 명색(名色)이 완전히 알려진다. 명색(名色)이 완전히 알려질 때 성스러운 제자에게 ‘어떤 것이든 더 해야 할 것이 없다.’라고 나는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