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puṇṇamasuttaṃ (SN 22.82-보름달 경) ㅡ 무아 이면의 아 없음
8. khajjanīyavaggo, 10. puṇṇamasuttaṃ (SN 22.82-보름달 경)
; mahāpuṇṇamasuttaṃ (MN 109-보름달 큰 경)과 같은 내용이면서 서술만 약간의 차이가 있음.
한때 세존은 사왓티에서 동쪽 사원의 미가라마뚜 강당에서 많은 비구상가와 함께 머물렀다. 그때 세존은 보름 포살일 밤에 비구상가에 둘러싸여 열린 장소에 앉아있었다.
그때 어떤 비구가 자리에서 일어나 윗옷을 한쪽 어깨가 드러나게 입고 세존을 향해 합장한 채 세존에게 이렇게 말했다. ㅡ “대덕이시여, 만약 세존께서 저를 위해 질문에 대해 설명해 주신다면, 저는 세존께 어떤 부분을 여쭙고자 합니다.”라고. “그렇다면, 비구여, 그대는 그대의 자리에 앉아서 원하는 것을 질문하라.” “알겠습니다, 대덕이시여.”라고 그 비구는 세존에게 대답하고 자리에 앉은 뒤 세존에게 이렇게 말했다. ㅡ “대덕이시여, 색취온(色取蘊), 수취온(受取蘊), 상취온(想取蘊), 행취온(行取蘊) 식취온(識取蘊)의 이런 오취온(五取蘊)이 있지 않습니까?”
“비구여, 색취온(色取蘊), 수취온(受取蘊), 상취온(想取蘊), 행취온(行取蘊) 식취온(識取蘊)의 이런 오취온(五取蘊)이 있다.” “고맙습니다, 대덕이시여.”라고 그 비구는 세존의 말씀을 기뻐하고 감사한 뒤에 세존에게 이어지는 질문을 했다. ㅡ
“대덕이시여, 이 오취온의 뿌리는 무엇입니까?” “비구여, 이 오취온의 뿌리는 관심이다.” … “대덕이시여, 집착과 오취온은 같은 것입니까, 아니면 집착과 오취온은 다른 것입니까?” “비구여, 집착과 오취온은 같은 것이 아니다. 그러나 집착과 오취온은 다른 것도 아니다. 그보다는 거기에 있는 욕탐(欲貪)이 거기서 집착이다.” “고맙습니다, 대덕이시여.”라고 그 비구는 세존의 말씀을 기뻐하고 감사한 뒤에 세존에게 이어지는 질문을 했다. ㅡ
“대덕이시여, 오취온에 대한 욕탐(欲貪)은 차이가 있습니까?” “있다, 비구여.”라고 세존은 말했다. “여기, 비구여, 어떤 사람에게 ‘미래에 나는 이런 색(色)을 가지기를, 미래에 나는 이런 수(受)를 가지기를, 미래에 나는 이런 상(想)을 가지기를, 미래에 나는 이런 행(行)을 가지기를, 미래에 나는 이런 식(識)을 가지기를!’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비구여, 오취온에 대한 욕탐(欲貪)은 차이가 있다.” “고맙습니다, 대덕이시여.”라고 그 비구는 세존의 말씀을 기뻐하고 감사한 뒤에 세존에게 이어지는 질문을 했다. ㅡ
“대덕이시여, 왜 온(蘊)들에게 온(蘊)이라는 이름이 있습니까?” “비구여, 안의 것이든 밖의 것이든, 거친 것이든 미세한 것이든, 저열한 것이든 수승한 것이든 과거-미래-현재의 어떤 색(色)에 대해서도, 멀리 있는 것이든 가까이 있는 것이든 이것은 색온(色蘊)이라고 불린다. 어떤 수(受)에 대해서도 … 어떤 상(想)에 대해서도 … 어떤 행(行)들에 대해서도 … 안의 것이든 밖의 것이든, 거친 것이든 미세한 것이든, 저열한 것이든 수승한 것이든 과거-미래-현재의 어떤 식(識)에 대해서도, 멀리 있는 것이든 가까이 있는 것이든 이것은 식온(識蘊)이라고 불린다. 이만큼, 비구여, 온(蘊)들에게 온(蘊)이라는 이름이 있다.” “고맙습니다, 대덕이시여.”라고 그 비구는 세존의 말씀을 기뻐하고 감사한 뒤에 세존에게 이어지는 질문을 했다. ㅡ
“대덕이시여, 색온(色蘊)의 선언을 위해서는 어떤 원인, 어떤 조건이 있습니까? 수온(受蘊)의 선언을 위해서는 어떤 원인, 어떤 조건이 있습니까? 상온(想薀)의 선언을 위해서는 어떤 원인, 어떤 조건이 있습니까? 행온(行蘊)의 선언을 위해서는 어떤 원인, 어떤 조건이 있습니까? 식온(識蘊)의 선언을 위해서는 어떤 원인, 어떤 조건이 있습니까?” “비구여, 색온(色蘊)의 선언을 위해서는 사대(四大)[네 가지 근본 물질]이 원인이고, 사대(四大)가 조건이다. 수온(受蘊)의 선언을 위해서는 촉(觸)이 원인이고, 촉(觸)이 조건이다. 상온(想薀)의 선언을 위해서는 촉(觸)이 원인이고, 촉(觸)이 조건이다. 행온(行蘊)의 선언을 위해서는 촉(觸)이 원인이고, 촉(觸)이 조건이다. 식온(識蘊)의 선언을 위해서는 명색(名色)이 원인이고, 명색(名色)이 조건이다.” “고맙습니다, 대덕이시여.”라고 그 비구는 세존의 말씀을 기뻐하고 감사한 뒤에 세존에게 이어지는 질문을 했다. ㅡ
“대덕이시여, 어떻게 유신견(有身見)이 있습니까?” “여기, 비구여, 성스러운 사람을 만나지 못하고, 성스러운 법에 대해 능숙하지 못하고, 성스러운 법에서 훈련되지 못하고, 고결한 사람을 만나지 못하고, 고결한 사람의 법에 대해 능숙하지 못하고, 고결한 사람의 법에서 훈련되지 못한 배우지 못한 범부는 아(我)로부터 색(色)을 관찰한다. 색(色)을 가진 자로서의 아(我)를 관찰하거나, 아(我)에서 색(色)을 관찰하거나, 색(色)에서 아(我)를 관찰한다. 수(受)를 … 상(想)을 … 행(行)들을 … 아(我)로부터 식(識)을 관찰한다. 식(識)을 가진 자로서의 아(我)를 관찰하거나, 아(我)에서 식(識)을 관찰하거나, 식(識)에서 아(我)를 관찰한다. 이렇게, 비구여, 유신견(有身見)이 있다.” “고맙습니다, 대덕이시여.”라고 그 비구는 세존의 말씀을 기뻐하고 감사한 뒤에 세존에게 이어지는 질문을 했다. ㅡ
“대덕이시여, 어떻게 유신견(有身見)이 없습니까?” “여기, 비구여, 성스러운 사람을 만나고, 성스러운 법에 대해 능숙하고, 성스러운 법에서 훈련되고, 고결한 사람을 만나고, 고결한 사람의 법에 대해 능숙하고, 고결한 사람의 법에서 훈련된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는 아(我)로부터 색(色)을 관찰하지 않는다. 색(色)을 가진 자로서의 아(我)를 관찰하거나, 아(我)에서 색(色)을 관찰하거나, 색(色)에서 아(我)를 관찰하지 않는다. 수(受)를 … 상(想)을 … 행(行)들을 … 아(我)로부터 식(識)을 관찰하지 않는다. 식(識)을 가진 자로서의 아(我)를 관찰하거나, 아(我)에서 식(識)을 관찰하거나, 식(識)에서 아(我)를 관찰하지 않는다. 이렇게, 비구여, 유신견(有身見)이 없다.” “고맙습니다, 대덕이시여.”라고 그 비구는 세존의 말씀을 기뻐하고 감사한 뒤에 세존에게 이어지는 질문을 했다. ㅡ
“대덕이시여, 무엇이 색(色)의 매력(魅力)이고, 무엇이 위험(危險)이고, 무엇이 해방(解放)입니까? 무엇이 수(受)의 … 무엇이 상(想)의 … 무엇이 행(行)들의 … 무엇이 식(識)의 매력(魅力)이고, 무엇이 위험(危險)이고, 무엇이 해방(解放)입니까? 비구여, 색(色)을 연(緣)하여 생기는 즐거움과 만족 ㅡ 이것이 색(色)의 매력이다. 색(色)의 무상(無常)-고(苦)-변하는 성질ㅡ 이것이 색(色)의 위험이다. 색(色)에 대한 욕탐(欲貪)의 제어와 욕탐(欲貪)의 버림 ㅡ 이것이 색(色)의 해방이다. 수(受)를 연하여 … 상(想)을 연하여 … 행(行)들을 연하여 … 식(識)을 연하여 생기는 즐거움과 만족 ㅡ 이것이 식(識)의 매력이다. 식(識)의 무상(無常)-고(苦)-변하는 성질ㅡ 이것이 식(識)의 위험이다. 식(識)에 대한 욕탐(欲貪)의 제어와 욕탐(欲貪)의 버림 ㅡ 이것이 식(識)의 해방이다.” “고맙습니다, 대덕이시여.”라고 그 비구는 세존의 말씀을 기뻐하고 감사한 뒤에 세존에게 이어지는 질문을 했다. ㅡ
“대덕이시여, 어떻게 알고 어떻게 보는 자에게 식(識)과 함께한 이 몸과 밖의 모든 상(相)에서 나를 만들고, 나의 것을 만드는 자기화의 잠재성향들이 없습니까?” “비구여, 안의 것이든 밖의 것이든, 거친 것이든 미세한 것이든, 저열한 것이든 수승한 것이든 과거-미래-현재의 어떤 색(色)에 대해서도, 멀리 있는 것이든 가까이 있는 것이든 모든 색(色)에 대해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내가 아니다. 이것은 나의 아(我)가 아니다.’라고 이렇게 이것을 바른 지혜에 의해 있는 그대로 본다. 어떤 수(受)에 대해서도 … 어떤 상(想)에 대해서도 … 어떤 행(行)들에 대해서도 … 안의 것이든 밖의 것이든, 거친 것이든 미세한 것이든, 저열한 것이든 수승한 것이든 과거-미래-현재의 어떤 식(識)에 대해서도, 멀리 있는 것이든 가까이 있는 것이든 모든 식(識)에 대해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내가 아니다. 이것은 나의 아(我)가 아니다.’라고 이렇게 이것을 바른 지혜에 의해 있는 그대로 본다. 비구여, 이렇게 알고 이렇게 보는 자에게 식(識)과 함께한 이 몸과 밖의 모든 상(相)에서 나를 만들고, 나의 것을 만드는 자기화의 잠재성향들이 없다.”
그런데 그때 어떤 비구에게 “이렇게, 참으로, 색(色)은 무아(無我)다. 수(受)는 … 상(想)은 … 행(行)들은 … 식(識)은 무아다. 무아(無我)에 의해 지어진 업(業)들은 어떤 아(我)에게 닿을 것인가?”라는 심(心)의 위딱까가 생겼다. 그러자 세존은 그 비구의 심(心)에 의해 심(心)의 생각을 안 뒤에 비구들에게 말했다. ㅡ
“비구들이여, 알지 못하고 무명(無明)이 스민 어떤 쓸모없는 자가 갈애에 지배되어 심(心)으로 스승의 가르침을 능가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런 경우가 있다. ‘이렇게, 참으로, 색(色)은 무아(無我)다. 수(受)는 … 상(想)은 … 행(行)들은 … 식(識)은 무아다. 무아(無我)에 의해 지어진 업(業)들은 어떤 아(我)에게 닿을 것인가?’라고. 비구들이여, 그대들을 위해 여기저기서 거듭 그 법들에 대하여 질의응답으로 설명한 나의 가르침이 있다.
“비구들이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색(色)은 상(常)한가 무상(無常)한가?” “무상(無常)합니다, 대덕이시여.” “그러면 무상(無常)한 것은 고(苦)인가 락(樂)인가?” “고(苦)입니다, 대덕이시여.” “그렇다면 무상(無常)하고 고(苦)이고 변하는 것에 대해 ‘이것은 나의 것이다. 이것은 나다. 이것은 나의 아(我)다.’라고 관찰하는 것이 타당한가?” “아닙니다, 대덕이시여.” “수(受) … 상(想) … 행(行)들 … 식(識)은 상(常)한가 무상(無常)한가?” “무상(無常)합니다, 대덕이시여.” “그러면 무상(無常)한 것은 고(苦)인가 락(樂)인가?” “고(苦)입니다, 대덕이시여.” “그렇다면 무상(無常)하고 고(苦)이고 변하는 것에 대해 ‘이것은 나의 것이다. 이것은 나다. 이것은 나의 아(我)다.’라고 관찰하는 것이 타당한가?” “아닙니다, 대덕이시여.” 그러므로 비구들이여, 안의 것이든 밖의 것이든, 거친 것이든 미세한 것이든, 저열한 것이든 수승한 것이든 과거-미래-현재의 어떤 색(色)에 대해서도, 멀리 있는 것이든 가까이 있는 것이든 모든 색(色)에 대해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내가 아니다. 이것은 나의 아(我)가 아니다.’라고 이렇게 이것은 바른 지혜에 의해 있는 그대로 보아야 한다. 안의 것이든 밖의 것이든, … 어떤 수(受) … 어떤 상(想) … 어떤 행(行)들 … 어떤 식(識)에 대해서도, 멀리 있는 것이든 가까이 있는 것이든 모든 식(識)에 대해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내가 아니다. 이것은 나의 아(我)가 아니다.’라고 이렇게 이것은 바른 지혜에 의해 있는 그대로 보아야 한다. 비구들이여, 이렇게 보면서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는 색(色)에 대해서도 염오(厭惡)하고, 수(受)에 대해서도 염오하고, 상(想)에 대해서도 염오하고, 행(行)들에 대해서도 염오하고, 식(識)에 대해서도 염오한다. 염오(厭惡)하면서 이탐(離貪)한다. 이탐(離貪)으로부터 해탈(解脫)한다. 해탈(解脫)에서 ‘나는 해탈했다.’라는 앎이 있다. '태어남은 다했다. 범행은 완성되었다. 해야 할 일을 했다. 다음에는 현재 상태[유(有)]가 되지 않는다.'라고 분명히 안다.”
“dve khandhā taññeva siyaṃ, adhivacanañca hetunā.
sakkāyena duve vuttā, assādaviññāṇakena ca.
ete dasavidhā vuttā, hoti bhikkhu pucchāyā”ti. dasamaṃ.
온(蘊)과 이름과 원인에 의한 것이 둘이다.
유신(有身)에 의해 둘 그리고 매력(魅力)과 식(識)에 의해 말해졌다.
비구의 질문에 의해 이 열 가지가 말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