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khemakasuttaṃ (SN 22.89-케마까 경) 뒷부분
9. theravaggo, 7. khemakasuttaṃ (SN 22.89-케마까 경) 뒷부분
그러자 케마까 존자는 지팡이에 기댄 채 장로 비구들에게 왔다. 와서는 장로 비구들과 함께 인사를 나누었다. 유쾌하고 기억할만한 이야기를 주고받은 뒤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케마까 존자에게 장로 비구들은 이렇게 말했다. — “도반 케마까여, 그대가 ‘나는 있다’라고 말하는 그것은 무엇입니까? 색(色)에 대해 ‘나는 있다’라고 그대는 말합니까, 색(色)과 다른 곳에서 ‘나는 있다’라고 그대는 말합니까? 수(受)에 대해 … 상(想)에 대해 … 행(行)들에 대해 … 식(識)에 대해 ‘나는 있다’라고 그대는 말합니까, 식(識)과 다른 곳에서 ‘나는 있다’라고 그대는 말합니까? 도반 케마까여, 그대가 ‘나는 있다’라고 말하는 그것은 무엇입니까?”
“도반들이여, 나는 색(色)에 대해 ‘나는 있다’라고 말하지 않고, 색(色)과 다른 곳에서 ‘나는 있다’라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수(受)에 대해 … 상(想)에 대해 … 행(行)들에 대해 … 식(識)에 대해 ‘나는 있다’라고 말하지 않고, 식(識)과 다른 곳에서 ‘나는 있다’라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도반들이여, 비록 오취온(五取蘊)에 대해 ‘나는 있다’라는 얻음이 나에게 있지만 나는 ‘이것이 나다’라고 관찰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도반들이여, 청련이나 홍련이나 백련의 냄새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꽃잎의 냄새다’라거나, ‘줄기의 냄새다’라거나 ‘꽃가루의 냄새다’라고 말한다면 그는 바르게 말하는 자로서 말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도반이여.” “그것에 대해 어떻게 설명하는 것이 바르게 설명하는 자로서 설명하는 것입니까?” “도반이여, 바르게 설명하는 자는 ‘꽃의 향기다’라고 설명해야 합니다.” “이처럼, 도반들이여, 나는 색(色)에 대해 ‘나는 있다’라고 말하지 않고, 색(色)과 다른 곳에서 ‘나는 있다’라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수(受)에 대해 … 상(想)에 대해 … 행(行)들에 대해 … 식(識)에 대해 ‘나는 있다’라고 말하지 않고, 식(識)과 다른 곳에서 ‘나는 있다’라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도반들이여, 비록 오취온(五取蘊)에 대해 ‘나는 있다’라는 얻음이 나에게 있지만 나는 ‘이것이 나다’라고 관찰하지 않습니다.
도반들이여, 성스러운 제자에게 오하분결(五下分結)이 버려진다 해도 오취온(五取蘊)에 대한 ‘나는 있다’라는 자기화, ‘나는 있다’라는 관심, ‘나는 있다’라는 잠재성향은 계속 함께하고 뿌리 뽑히지 않습니다. 그는 나중에 오취온에서 생겨남과 무너짐을 이어보면서 머뭅니다. — ‘이렇게 색(色)이 있고, 이렇게 색(色)의 자라남이 있고, 이렇게 색(色)의 줄어듦이 있다. 이렇게 수(受)가 있고 … 이렇게 상(想)이 있고 … 이렇게 행(行)들이 있고 … 이렇게 식(識)이 있고, 이렇게 식(識)의 자라남이 있고, 이렇게 식(識)의 줄어듦이 있다.’라고. 오취온에서 생겨남과 무너짐을 이어보면서 그에게 오취온(五取蘊)에 대해 계속 함께하고 뿌리 뽑히지 않은 ‘나는 있다’라는 자기화, ‘나는 있다’라는 관심, ‘나는 있다’라는 잠재성향도 뿌리뽑힙니다.
예를 들면, 도반들이여, 천이 오염되고 때가 묻었습니다. 그것을 주인이 세탁업자에게 넘겨줄 것입니다. 그것을 세탁업자는 소금물이나 양잿물이나 쇠똥에서 밟은 뒤에 맑은 물에서 씻습니다. 비록 그 천은 깨끗하고 아주 깨끗해지겠지만 소금 냄새거나 양잿물 냄새거나 쇠똥 냄새는 계속 함께하고 뿌리 뽑히지 않았습니다. 세탁업자는 그것을 주인에게 줍니다. 주인은 그것을 냄새를 제거하는 통에 넣습니다. 계속 함께하고 뿌리 뽑히지 않은 소금 냄새거나 양잿물 냄새거나 쇠똥 냄새도 제거됩니다.
이처럼, 도반들이여, 성스러운 제자에게 오하분결(五下分結)이 버려진다 해도 오취온(五取蘊)에 대한 ‘나는 있다’라는 자기화, ‘나는 있다’라는 관심, ‘나는 있다’라는 잠재성향은 계속 함께하고 뿌리 뽑히지 않습니다. 그는 나중에 오취온에서 생겨남과 무너짐을 이어보면서 머뭅니다. — ‘이렇게 색(色)이 있고, 이렇게 색(色)의 자라남이 있고, 이렇게 색(色)의 줄어듦이 있다. 이렇게 수(受)가 있고 … 이렇게 상(想)이 있고 … 이렇게 행(行)들이 있고 … 이렇게 식(識)이 있고, 이렇게 식(識)의 자라남이 있고, 이렇게 식(識)의 줄어듦이 있다.’라고. 오취온에서 생겨남과 무너짐을 이어보면서 그에게 오취온(五取蘊)에 대해 계속 함께하고 뿌리 뽑히지 않은 ‘나는 있다’라는 자기화, ‘나는 있다’라는 관심, ‘나는 있다’라는 잠재성향도 뿌리뽑힙니다.”
이렇게 말하자, 장로 비구들은 케마까 존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 “우리는 케마까 존자에게 불편을 주려고 질문한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케마까 존자는 그분 세존의 가르침을 상세하게 공표하고, 전달하고, 선언하고, 시작하고, 드러내고, 분석하고, 해설하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케마까 존자에 의해서 그분 세존의 이 가르침은 상세하게 공표되고, 전달되고, 선언되고, 시작되고, 드러나고, 분석되고, 해설되었습니다.”
케마까 존자는 이렇게 말했다. 장로 비구들은 즐거워하면서 케마까 존자의 말을 기뻐했다. 그리고 이런 설명이 말해졌을 때 육십 명의 비구들은 집착에서 벗어나 번뇌들로부터 심(心)이 해탈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