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pālileyyasuttaṃ (SN 22.81-빠릴레이야 경)
8. khajjanīyavaggo, 9. pālileyyasuttaṃ (SN 22.81-빠릴레이야 경)
한때 세존은 꼬삼비에서 고시따 사원에 머물렀다. 그때 세존은 오전에 옷차림을 바르게 하고 발우와 가사를 지니고 탁발을 위해서 꼬삼비로 들어갔다. 꼬삼비에서 탁발을 하여 공양을 마치고 탁발에서 돌아온 세존은 스스로 거처를 정리한 뒤에 발우와 가사를 지니고, 초청도 없이, 시자들과 비구 상가에 알리지도 않고, 동행하는 자도 없이 혼자서 유행을 떠났다.
그러자 세존이 떠나고 오래지 않아서 어떤 비구가 아난다 존자에게 왔다. 와서는 아난다 존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 “도반 아난다여, 세존께서 스스로 거처를 정리한 뒤에 발우와 가사를 지니고, 초청도 없이, 시자들과 비구 상가에 알리지도 않고, 동행하는 자도 없이 혼자서 유행을 떠나셨습니다.”라고. “도반이여, 세존께서 스스로 거처를 정리한 뒤에 발우와 가사를 지니고, 초청도 없이, 시자들과 비구 상가에 알리지도 않고, 동행하는 자도 없이 혼자서 유행을 떠나신 때는 세존께서 홀로 머물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그때는 누구라도 세존을 뒤따르지 않아야 합니다.”
그때, 돌아다니며 살던 세존은 이윽고 빠릴레이야에 도착했다. 거기서 세존은 빠릴레이야에 있는 장엄한 살라 나무 아래 머물렀다. 그때 많은 비구가 아난다 존자에게 왔다. 와서는 아난다 존자와 함께 인사를 나누었다. 유쾌하고 기억할만한 이야기를 주고받은 뒤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그 비구들은 아난다 존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 “도반 아난다여, 세존의 앞에서 법의 말씀을 들은지 오래되었습니다. 도반 아난다여, 우리는 세존의 곁에서 법의 말씀을 듣기를 원합니다.”라고.
그러자 아난다 존자는 그 비구들과 함께 장엄한 살라 나무 아래 머무는 세존에게 왔다. 와서는 세존에게 절한 뒤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그 비구들에게 세존은 법의 말씀으로 가리키고 부추기고 열중케 하고 만족하게 했다. 그때 어떤 비구에게 이런 심(心)의 온전한 생각이 떠올랐다. ― “어떻게 알고 어떻게 보는 자에게 뒤이어 번뇌들이 부서질까?”라고. 그때 세존은 심(心)으로 그 비구의 심(心)의 온전한 생각 떠오름을 안 뒤에 비구들에게 말했다. ― “비구들이여, 나에 의해 검증된 뒤 설해진 법이 있다. 검증된 뒤 설해진 사념처(四念處), 검증된 뒤 설해진 사정근(四正勤), 검증된 뒤 설해진 사여의족(四如意足), 검증된 뒤 설해진 오근(五根), 검증된 뒤 설해진 오력(五力), 검증된 뒤 설해진 칠각지(七覺支), 검증된 뒤 설해진 팔정도(八正道)이다. 이렇게 나에 의해 검증된 뒤 설해진 법이 있다. 나에 의해 검증된 뒤 설해진 법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여기 어떤 비구에게 이런 심(心)의 온전한 생각이 떠올랐다. ― ‘어떻게 알고 어떻게 보는 자에게 뒤따라 번뇌들이 부서질까?’”라고.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떻게 알고 어떻게 보는 자에게 뒤따라 번뇌들이 부서지는가? 여기, 비구들이여, 성스러운 사람을 만나지 못하고, 성스러운 법에 대해 능숙하지 못하고, 성스러운 법에서 훈련되지 못하고, 고결한 사람을 만나지 못하고, 고결한 법에 대해 능숙하지 못하고, 고결한 법에서 훈련되지 못한 배우지 못한 범부는 아(我)로부터 색(色)을 관찰한다. 비구들이여, 그 관찰은 행(行)이다. 그러면 그 행(行)은 무엇이 원인이고, 무엇이 자라남이고, 무엇이 생김이고, 무엇이 근원인가? 비구들이여, 무명(無明)의 촉(觸)에서 생긴 경험된 것에 의해 닿아진 배우지 못한 범부에게 생겨난 애(愛), 그 행(行)은 그것으로부터 생긴 것이다. 이렇게, 비구들이여, 그 행(行)도 무상(無常)하고 유위(有爲)이고 연기(緣起)된 것이다. 그 애(愛)도 무상(無常)하고 유위(有爲)이고 연기(緣起)된 것이다. 그 수(受)도 무상(無常)하고 유위(有爲)이고 연기(緣起)된 것이다. 그 촉(觸)도 무상(無常)하고 유위(有爲)이고 연기(緣起)된 것이다. 그 무명(無明)도 무상(無常)하고 유위(有爲)이고 연기(緣起)된 것이다. 비구들이여, 이렇게 알고 이렇게 보는 자에게 뒤따라 번뇌들이 부서진다.
그는 아(我)로부터 색(色)을 관찰하지 않는다. 그런데 색(色)을 가진 자로서의 아(我)를 관찰한다. 비구들이여, 그 관찰은 행(行)이다. 그러면 그 행(行)은 무엇이 원인이고, 무엇이 자라남이고, 무엇이 생김이고, 무엇이 근원인가? 비구들이여, 무명(無明)의 촉(觸)에서 생긴 경험된 것에 의해 닿아진 배우지 못한 범부에게 생겨난 애(愛), 그 행(行)은 그것으로부터 생긴 것이다. 이렇게, 비구들이여, 그 행(行)도 무상(無常)하고 유위(有爲)이고 연기(緣起)된 것이다. 그 애(愛)도 … 그 수(受)도 … 그 촉(觸)도 … 그 무명(無明)도 무상(無常)하고 유위(有爲)이고 연기(緣起)된 것이다. 비구들이여, 이렇게 알고 이렇게 보는 자에게 뒤따라 번뇌들이 부서진다.
그는 아(我)로부터 색(色)을 관찰하지 않는다. 색(色)을 가진 자로서의 아(我)를 관찰하지 않는다. 그러나 아(我)에서 색(色)을 관찰한다. 비구들이여, 그 관찰은 행(行)이다. 그러면 그 행(行)은 무엇이 원인이고, 무엇이 자라남이고, 무엇이 생김이고, 무엇이 근원인가? 비구들이여, 무명(無明)의 촉(觸)에서 생긴 경험된 것에 의해 닿아진 배우지 못한 범부에게 생겨난 애(愛), 그 행(行)은 그것으로부터 생긴 것이다. 이렇게, 비구들이여, 그 행(行)도 무상(無常)하고 유위(有爲)이고 연기(緣起)된 것이다. 그 애(愛)도 … 그 수(受)도 … 그 촉(觸)도 … 그 무명(無明)도 무상(無常)하고 유위(有爲)이고 연기(緣起)된 것이다. 비구들이여, 이렇게 알고 이렇게 보는 자에게 뒤따라 번뇌들이 부서진다.
그는 아(我)로부터 색(色)을 관찰하지 않는다. 색(色)을 가진 자로서의 아(我)를 관찰하지 않고, 아(我)에서 색(色)을 관찰하지 않는다. 그러나 색(色)에서 아(我)를 관찰한다. 비구들이여, 그 관찰은 행(行)이다. 그러면 그 행(行)은 무엇이 원인이고, 무엇이 자라남이고, 무엇이 생김이고, 무엇이 근원인가? 비구들이여, 무명(無明)의 촉(觸)에서 생긴 경험된 것에 의해 닿아진 배우지 못한 범부에게 생겨난 애(愛), 그 행(行)은 그것으로부터 생긴 것이다. 이렇게, 비구들이여, 그 행(行)도 무상(無常)하고 유위(有爲)이고 연기(緣起)된 것이다. 그 애(愛)도 … 그 수(受)도 … 그 촉(觸)도 … 그 무명(無明)도 무상(無常)하고 유위(有爲)이고 연기(緣起)된 것이다. 비구들이여, 이렇게 알고 이렇게 보는 자에게 뒤따라 번뇌들이 부서진다.
그는 아(我)로부터 색(色)을 관찰하지 않는다. 색(色)을 가진 자로서의 아(我)를 관찰하지 않고, 아(我)에서 색(色)을 관찰하지 않고, 색(色)에서 아(我)를 관찰하지 않는다. 그러나 아(我)로부터 수(受)를 관찰한다. 수(受)를 가진 자로서의 아(我)를 관찰하고, 아(我)에서 수(受)를 관찰하고, 수(受)에서 아(我)를 관찰한다. 상(想)을 … 아(我)로부터 행(行)들을 관찰한다. 행(行)들을 가진 자로서의 아(我)를 관찰하고, 아(我)에서 행(行)들을 관찰하고, 행(行)들에서 아(我)를 관찰한다. 아(我)로부터 식(識)을 관찰한다. 식(識)을 가진 자로서의 아(我)를 관찰하고, 아(我)에서 식(識)을 관찰하고, 식(識)에서 아(我)를 관찰한다. 비구들이여, 그 관찰은 행(行)이다. 그러면 그 행(行)은 무엇이 원인이고 … 무엇이 근원인가? 비구들이여, 무명(無明)의 촉(觸)에서 생긴 경험된 것에 의해 닿아진 배우지 못한 범부에게 생겨난 애(愛), 그 행(行)은 그것으로부터 생긴 것이다. 이렇게, 비구들이여, 그 행(行)도 무상(無常)하고 유위(有爲)이고 연기(緣起)된 것이다. 그 애(愛)도 … 그 수(受)도 … 그 촉(觸)도 … 그 무명(無明)도 무상(無常)하고 유위(有爲)이고 연기(緣起)된 것이다. 비구들이여, 이렇게 알고 이렇게 보는 자에게 뒤따라 번뇌들이 부서진다.
그는 아(我)로부터 색(色)을 관찰하지 않는다. 아(我)로부터 수(受)를 관찰하지 않는다. 상(想)을 … 행(行)들을 … 아(我)로부터 식(識)을 관찰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에게 이런 견해가 있다. ― ‘그것이 아(我)고, 그것이 세상이다. 그는 죽은 뒤에 상(常)하고 안정되고, 영원하고, 변하지 않는 것이 될 것이다.’라고. 비구들이여, 그 영원하다는 견해[상견(常見)]는 행(行)이다. 그러면 그 행(行)은 무엇이 원인이고 … 비구들이여, 이렇게 알고 이렇게 보는 자에게 뒤따라 번뇌들이 부서진다.
그는 아(我)로부터 색(色)을 관찰하지 않는다. 수(受)를 … 상(想)을 … 행(行)들을 … 아(我)로부터 식(識)을 관찰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에게 이런 견해도 없다. ― ‘그것이 아(我)고, 그것이 세상이다. 그는 죽은 뒤에 상(常)하고 안정되고, 영원하고, 변하지 않는 것이 될 것이다.’라고. 그러나 그에게 이런 견해가 있다. ― ‘내가 아니고 나의 것도 아니라면, 나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고 나의 것도 없을 것이다.’라고. 비구들이여, 그 끊어진다는 견해[단견(斷見)]는 행(行)이다. 그러면 그 행(行)은 무엇이 원인이고, 무엇이 자라남이고, 무엇이 생김이고, 무엇이 근원인가? 비구들이여, 무명(無明)의 촉(觸)에서 생긴 경험된 것에 의해 닿아진 배우지 못한 범부에게 생겨난 애(愛), 그 행(行)은 그것으로부터 생긴 것이다. 이렇게, 비구들이여, 그 행(行)도 무상(無常)하고 … 비구들이여, 이렇게 알고 이렇게 보는 자에게 뒤따라 번뇌들이 부서진다.
그는 아(我)로부터 색(色)을 관찰하지 않는다. 수(受)를 … 상(想)을 … 행(行)들을 … 아(我)로부터 식(識)을 관찰하지 않는다. 그에게 이런 견해도 없다. ― ‘그것이 아(我)고, 그것이 세상이다. 그는 죽은 뒤에 상(常)하고 안정되고, 영원하고, 변하지 않는 것이 될 것이다.’라고. 그리고 그에게 이런 견해도 없다. ― ‘내가 아니고 나의 것도 아니라면, 나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고 나의 것도 없을 것이다.’라고. 그런데 그는 회의하는 자이고, 의심하는 자이고, 정법(正法)에 대해 의지하지 않는 자이다. 비구들이여, 그 회의하고, 의심하고, 정법에 대해 의지하지 않는 것은 행(行)이다. 그러면 그 행(行)은 무엇이 원인이고, 무엇이 자라남이고, 무엇이 생김이고, 무엇이 근원인가? 비구들이여, 무명(無明)의 촉(觸)에서 생긴 경험된 것에 의해 닿아진 배우지 못한 범부에게 생겨난 애(愛), 그 행(行)은 그것으로부터 생긴 것이다. 이렇게, 비구들이여, 그 행(行)도 무상(無常)하고 유위(有爲)이고 연기(緣起)된 것이다. 그 애(愛)도 무상(無常)하고 유위(有爲)이고 연기(緣起)된 것이다. 그 수(受)도 무상(無常)하고 유위(有爲)이고 연기(緣起)된 것이다. 그 촉(觸)도 무상(無常)하고 유위(有爲)이고 연기(緣起)된 것이다. 그 무명(無明)도 무상(無常)하고 유위(有爲)이고 연기(緣起)된 것이다. 비구들이여, 이렇게 알고 이렇게 보는 자에게 뒤따라 번뇌들이 부서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