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anattalakkhaṇasuttaṃ (SN 22.59-무아상(無我相) 경)
6. upayavaggo, 7. anattalakkhaṇasuttaṃ (SN 22.59-무아상(無我相) 경)
한때 세존은 바라나시에서 이시빠따나의 사슴 공원에 머물렀다. 거기서 세존은 “비구들이여.”라고 함께하는 다섯 비구를 불렀다. “대덕이시여.”라고 그 비구들은 세존에게 대답했다. 세존은 이렇게 말했다. —
• labbhati: to be obtained or received. (labh + ya) — 얻어지다 → ‘ ’ti → ‘ ’라는 것이 얻어지다 → 의도하는 대로 되다.
⇒ (MN 35-삿짜까 짧은 경)과 연계하여 ‘권한이 있다’로 해석함.
[①무아(無我)의 선언] “비구들이여, 색(色)은 무아(無我)다. 비구들이여, 참으로 이 색(色)이 아(我)라면 이 색(色)은 결점으로 이끌리지 않을 것이고, 색(色)에 대해 ‘나의 색(色)은 이런 상태로 있어라. 나의 색(色)은 이런 상태가 되지 말아라.’라는 권한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비구들이여, 색(色)은 무아(無我)이기 때문에 색(色)은 결점으로 이끌리고, 색(色)에 대해 ‘나의 색(色)은 이런 상태로 있어라. 나의 색(色)은 이런 상태가 되지 말아라.’라는 권한이 없다.
수(受)는 무아(無我)다. 비구들이여, 참으로 이 수(受)가 아(我)라면 이 수(受)는 결점으로 이끌리지 않을 것이고, 수(受)에 대해 ‘나의 수(受)는 이런 상태로 있어라. 나의 수(受)는 이런 상태가 되지 말아라.’라는 권한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비구들이여, 수(受)는 무아(無我)이기 때문에 수(受)는 결점으로 이끌리고, 수(受)에 대해 ‘나의 수(受)는 이런 상태로 있어라. 나의 수(受)는 이런 상태가 되지 말아라.’라는 권한이 없다.
상(想)은 무아(無我)다. … 행(行)들은 무아(無我)다. 비구들이여, 참으로 이 행(行)들이 아(我)라면 이 행(行)들은 결점으로 이끌리지 않을 것이고, 행(行)들에 대해 ‘나의 행(行)들은 이런 상태로 있어라. 나의 행(行)들은 이런 상태가 되지 말아라.’라는 권한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비구들이여, 행(行)들은 무아(無我)이기 때문에 행(行)들은 결점으로 이끌리고, 행(行)들에 대해 ‘나의 행(行)들은 이런 상태로 있어라. 나의 행(行)들은 이런 상태가 되지 말아라.’라는 권한이 없다.
식(識)은 무아(無我)다. 비구들이여, 참으로 이 식(識)이 아(我)라면 이 식(識)은 결점으로 이끌리지 않을 것이고, 식(識)에 대해 ‘나의 식(識)은 이런 상태로 있어라. 나의 식(識)은 이런 상태가 되지 말아라.’라는 권한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비구들이여, 식(識)은 무아(無我)이기 때문에 식(識)은 결점으로 이끌리고, 식(識)에 대해 ‘나의 식(識)은 이런 상태로 있어라. 나의 식(識)은 이런 상태가 되지 말아라.’라는 권한이 없다.”
[②제자들의 동의] “비구들이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색(色)은 상(常)한가, 무상(無常)한가?” “무상(無常)합니다, 대덕이시여.” “그러면 무상(無常)한 것은 고(苦)인가, 락(樂)인가?” “고(苦)입니다, 대덕이시여.” “그렇다면 무상(無常)하고 고(苦)이고 변하는 것을 ‘이것은 나의 것이다. 이것은 나다. 이것은 나의 아(我)다.’라고 관찰하는 것이 타당한가?” “아닙니다, 대덕이시여.” “수(受) … 상(想) … 행(行)들 … 식(識)은 상(常)한가, 무상(無常)한가?” “무상(無常)합니다, 대덕이시여.” “그러면 무상(無常)한 것은 고(苦)인가, 락(樂)인가?” “고(苦)입니다, 대덕이시여.” “그렇다면 무상(無常)하고 고(苦)이고 변하는 것을 ‘이것은 나의 것이다. 이것은 나다. 이것은 나의 아(我)다.’라고 관찰하는 것이 타당한가?” “아닙니다, 대덕이시여.”
[③기준의 제시] “그러므로 비구들이여, 안의 것이든 밖의 것이든, 거친 것이든 미세한 것이든, 저열한 것이든 뛰어난 것이든 과거-미래-현재의 어떤 색(色)에 대해서도, 멀리 있는 것이든 가까이 있는 것이든 모든 색(色)에 대해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내가 아니다. 이것은 나의 아(我)가 아니다.’라고 이렇게 바른 지혜로써 있는 그대로 보아야 한다. 안의 것이든 밖의 것이든, … 어떤 수(受)에 대해서도, 멀리 있는 것이든 가까이 있는 것이든 모든 수(受)에 대해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내가 아니다. 이것은 나의 아(我)가 아니다.’라고 이렇게 바른 지혜로써 있는 그대로 보아야 한다.
어떤 상(想)에 대해서도 … 안의 것이든 밖의 것이든, … 과거-미래-현재의 어떤 행(行)들에 대해서도, 멀리 있는 것이든 가까이 있는 것이든 모든 행(行)에 대해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내가 아니다. 이것은 나의 아(我)가 아니다.’라고 이렇게 바른 지혜로써 있는 그대로 보아야 한다.
안의 것이든 밖의 것이든, 거친 것이든 미세한 것이든, 저열한 것이든 뛰어난 것이든 과거-미래-현재의 어떤 식(識)에 대해서도, 멀리 있는 것이든 가까이 있는 것이든 모든 식(識)에 대해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내가 아니다. 이것은 나의 아(我)가 아니다.’라고 이렇게 바른 지혜로써 있는 그대로 보아야 한다.
비구들이여, 이렇게 보는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는 색(色)에 대해서도 염오(厭惡)하고, 수(受)에 대해서도 염오하고, 상(想)에 대해서도 염오하고, 행(行)들에 대해서도 염오하고, 식(識)에 대해서도 염오한다. 염오(厭惡)하는 자는 이탐(離貪)한다. 이탐(離貪)으로부터 해탈(解脫)한다. 해탈(解脫)했을 때 ‘나는 해탈했다.’라는 앎이 있다. '태어남은 다했다. 범행은 완성되었다. 해야 할 일을 했다. 다음에는 현재 상태[유(有)]가 되지 않는다.'라고 분명히 안다.”
세존은 이렇게 말했다. 함께하는 다섯 비구는 즐거워하면서 세존의 말씀을 기뻐했다.
그리고 이 가르침이 설해졌을 때 함께하는 다섯 비구의 심(心)은 집착에서 벗어나 번뇌들로부터 해탈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