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mārasuttaṃ (SN 23.1-마라 경)
1. paṭhamavaggo, 1. mārasuttaṃ (SN 23.1-마라 경)
사왓티에서 설해짐. 그때 라다 존자가 세존에게 갔다. 가서는 세존에게 절한 뒤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라다 존자는 세존에게 이렇게 말했다. ㅡ
“대덕이시여, ‘마라, 마라’라고 불립니다. 대덕이시여, 왜 마라입니까?” “라다여, 색(色)이 있을 때 마라 또는 죽이는 자 또는 죽는 자가 있다. 그러므로 라다여, 그대는 색(色)을 마라라고, 죽이는 자라고, 죽는 자라고, 아픔이라고, 종기라고, 화살이라고, 실망이라고, 실망이 누적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색(色)을 이렇게 보는 것이 바르게 보는 것이다. 수(受)가 있을 때 … 상(想)이 있을 때 … 행(行)들이 있을 때 … 식(識)이 있을 때 마라 또는 죽이는 자 또는 죽는 자가 있다. 그러므로 라다여, 그대는 식(識)을 마라라고, 죽이는 자라고, 죽는 자라고, 아픔이라고, 종기라고, 화살이라고, 실망이라고, 실망이 누적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식(識)을 이렇게 보는 것이 바르게 보는 것이다.
“그런데, 대덕이시여, 바르게 보는 것은 무엇을 위한 것입니까?” “라다여, 바르게 보는 것은 염오(厭惡)를 위한 것이다.” “그러면 대덕이시여, 염오는 무엇을 위한 것입니까?” “라다여, 염오는 이탐(離貪)을 위한 것이다.” “그러면 대덕이시여, 이탐은 무엇을 위한 것입니까?” “라다여, 이탐은 해탈(解脫))을 위한 것이다.” “그러면 대덕이시여, 해탈은 무엇을 위한 것입니까?” “라다여, 해탈은 열반(涅槃)을 위한 것이다.” “그러면 대덕이시여, 열반은 무엇을 위한 것입니까?” “라다여, 질문을 넘어서버렸다. 질문의 끝을 잡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라다여, 열반에 닿는 범행(梵行)은 열반을 구원으로 하고 열반을 완성으로 살아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