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navātasuttaṃ (SN 24.71-95-바람은 불지 않음 경)
4. catutthagamanavaggo, 1. navātasuttaṃ (SN 24.71-95-바람은 불지 않음 경)
사왓티에서 설해짐. “비구들이여, 무엇이 있을 때, 무엇을 집착하고 무엇을 고집하여 ‘바람은 불지 않고, 강은 흐르지 않고, 임산부는 출산하지 않고, 달과 태양은 뜨거나 지지 않고, 기둥처럼 안정되게 서 있다.’라는 견해가 생기는가?” “대덕이시여, 저희에게 법들은 세존을 뿌리로 하고, 세존을 도관(導管)으로 하고, 세존을 의지합니다. 대덕이시여, 이 말씀의 의미를 세존께서 분명히 해주시면 참으로 감사하겠습니다. 비구들은 세존에게서 듣고서 명심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비구들이여, 듣고 잘 사고하라. 나는 말할 것이다.” “알겠습니다, 대덕이시여.”라고 그 비구들은 세존에게 대답했다. 세존은 이렇게 말했다. ―
“비구들이여, 색(色)이 있을 때, 색을 집착하고 색을 고집하여 ‘바람은 불지 않고, 강은 흐르지 않고, 임산부는 출산하지 않고, 달과 태양은 뜨거나 지지 않고, 기둥처럼 안정되게 서 있다.’라는 견해가 생긴다. 수(受)가 있을 때 … 상(想)이 있을 때 … 행(行)들이 있을 때 … 식(識)이 있을 때 식을 집착하고 식을 고집하여 ‘바람은 불지 않고, 강은 흐르지 않고, 임산부는 출산하지 않고, 달과 태양은 뜨거나 지지 않고, 기둥처럼 안정되게 서 있다.’라는 견해가 생긴다.
“비구들이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색(色)은 상(常)한가, 무상(無常)한가?” “무상(無常)합니다, 대덕이시여.” “그러면 무상(無常)한 것은 고(苦)인가, 락(樂)인가?” “고(苦)입니다, 대덕이시여.” “그렇다면 무상(無常)하고 고(苦)이고 변하는 것을 ‘이것은 나의 것이다. 이것은 나다. 이것은 나의 아(我)다.’라고 관찰하는 것이 타당한가?” “아닙니다, 대덕이시여.” “수(受) … 상(想) … 행(行)들 … 식(識)은 상(常)한가, 무상(無常)한가?” “무상(無常)합니다, 대덕이시여.” “그러면 무상(無常)한 것은 고(苦)인가, 락(樂)인가?” “고(苦)입니다, 대덕이시여.” “그렇다면 무상(無常)하고 고(苦)이고 변하는 것을 ‘이것은 나의 것이다. 이것은 나다. 이것은 나의 아(我)다.’라고 관찰하는 것이 타당한가?” “아닙니다, 대덕이시여.”
“그러므로 비구들이여, 안의 것이든 밖의 것이든, 거친 것이든 미세한 것이든, 저열한 것이든 뛰어난 것이든 과거-미래-현재의 어떤 색(色)에 대해서도, 멀리 있는 것이든 가까이 있는 것이든 모든 색(色)에 대해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내가 아니다. 이것은 나의 아(我)가 아니다.’라고 이렇게 바른 지혜로써 있는 그대로 보아야 한다. … 어떤 수(受)에 대해서도 … 어떤 상(想)에 대해서도 … 어떤 행(行)들에 대해서도 … 안의 것이든 밖의 것이든, 거친 것이든 미세한 것이든, 저열한 것이든 뛰어난 것이든 과거-미래-현재의 어떤 식(識)에 대해서도, 멀리 있는 것이든 가까이 있는 것이든 모든 식(識)에 대해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내가 아니다. 이것은 나의 아(我)가 아니다.’라고 이렇게 바른 지혜로써 있는 그대로 보아야 한다.
비구들이여, 이렇게 보는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는 색(色)에 대해서도 염오(厭惡)하고, 수(受)에 대해서도 염오하고, 상(想)에 대해서도 염오하고, 행(行)들에 대해서도 염오하고, 식(識)에 대해서도 염오한다. 염오(厭惡)하는 자는 이탐(離貪)한다. 이탐(離貪)으로부터 해탈(解脫)한다. 해탈(解脫)했을 때 ‘나는 해탈했다.’라는 앎이 있다. '태어남은 다했다. 범행은 완성되었다. 해야 할 일을 했다. 다음에는 현재 상태[유(有)]가 되지 않는다.'라고 분명히 안다.”
277-300. (dutiyavagge viya catuvīsati suttāni pūretabbāni.) pañcavīsatimaṃ.
(스물네 개의 경들을 두 번째 품처럼 완성해야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