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natthidinnasuttaṃ (SN 24.5-보시(報施)도 없음 경)
1. sotāpattivaggo, 5. natthidinnasuttaṃ (SN 24.5-보시(報施)도 없음 경)
사왓티에서 설해짐. “비구들이여, 무엇이 있을 때, 무엇을 집착하고 무엇을 고집하여 ‘보시(報施)도 없고 제사(祭祀)도 없고 봉헌(奉獻)도 없다. 선행(善行)과 악행(惡行)의 업(業)들에게 과(果)도 없고 보(報)도 없다. 이 세상도 없고 저세상도 없다. 어머니도 없고 아버지도 없다. 화생(化生) 하는 중생은 없다. 세상에는 이 세상과 저세상을 스스로 실답게 안 뒤에 실현하여 선언하는, 바른길에 들어서서 바르게 실천하는 사문·바라문들이 없다. 사대(四大), 이것이 사람이다. 죽을 때 땅은 땅의 무리로 들어가고, 되돌아간다. 물은 물의 무리로 들어가고, 되돌아간다. 불은 불의 무리로 들어가고, 되돌아간다. 바람은 바람의 무리로 들어가고, 되돌아간다. 기능들은 공간으로 옮겨간다. 관을 다섯 번째로 하는 사람들이 시체를 가져간다. 화장장까지만 구절들이 보인다. 잿빛 뼛가루들이 있다. 헌공은 떨어진다. 보시는 어리석은 자의 가르침이다. 누구든지 있음을 말하는 자들에게는 공허와 거짓과 쓸데없는 말이 있다. 어리석은 자들도 현명한 자들도 몸이 무너져 죽으면 단멸하고 파괴된다. 죽음 그 후는 없다.’라는 견해가 생기는가?” “대덕이시여, 저희에게 법들은 세존을 뿌리로 하고, 세존을 도관(導管)으로 하고, 세존을 의지합니다. 대덕이시여, 이 말씀의 의미를 세존께서 분명히 해주시면 참으로 감사하겠습니다. 비구들은 세존에게서 듣고서 명심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비구들이여, 듣고 잘 사고하라. 나는 말할 것이다.” “알겠습니다, 대덕이시여.”라고 그 비구들은 세존에게 대답했다. 세존은 이렇게 말했다. ― “비구들이여, 색(色)이 있을 때, 색을 집착하고 색을 고집하여 ‘보시(報施)도 없고 제사(祭祀)도 없고 … 몸이 무너져 죽으면 단멸하고 파괴된다. 죽음 그 후는 없다.’라는 견해가 생긴다. 수(受)가 있을 때 … 상(想)이 있을 때 … 행(行)들이 있을 때 … 식(識)이 있을 때 식을 집착하고 식을 고집하여 ‘보시(報施)도 없고 제사(祭祀)도 없고 … 몸이 무너져 죽으면 단멸하고 파괴된다. 죽음 그 후는 없다.’라는 견해가 생긴다.
“비구들이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색(色)은 상(常)한가, 무상(無常)한가?” “무상(無常)합니다, 대덕이시여.” “그러면 무상(無常)하고 고(苦)이고 변하는 것을 집착하지 않는데도 ‘보시(報施)도 없고 제사(祭祀)도 없고 … 몸이 무너져 죽으면 단멸하고 파괴된다. 죽음 그 후는 없다.’라는 견해가 생기겠는가?” “아닙니다, 대덕이시여.” … “수(受)는 … 상(想)은 … 행(行)들은 … 식(識)은 상(常)한가, 무상(無常)한가?” “무상(無常)합니다, 대덕이시여.” … “그러면 무상(無常)하고 고(苦)이고 변하는 것을 집착하지 않는데도 ‘보시(報施)도 없고 제사(祭祀)도 없고 … 몸이 무너져 죽으면 단멸하고 파괴된다. 죽음 그 후는 없다.’라는 견해가 생기겠는가?” “아닙니다, 대덕이시여.” “본 것-들은 것-닿아 안 것-인식한 것-얻은 것-조사한 것-의(意)로 접근한 것은 상(常)한가, 무상(無常)한가?” “무상(無常)합니다, 대덕이시여.” “그러면 무상(無常)한 것은 고(苦)인가, 락(樂)인가?” “고(苦)입니다, 대덕이시여.” “그러면 무상(無常)하고 고(苦)이고 변하는 것을 집착하지 않는데도 ‘보시(報施)도 없고 제사(祭祀)도 없고 … 몸이 무너져 죽으면 단멸하고 파괴된다. 죽음 그 후는 없다.’라는 견해가 생기겠는가?” “아닙니다, 대덕이시여.”
“비구들이여, 성스러운 제자가 이런 경우들에 대한 불확실함을 버리고, 고(苦)에 대한 불확실함을 버리고, 고집(苦集)에 대한 불확실함을 버리고, 고멸(苦滅)에 대한 불확실함을 버리고, 고멸(苦滅)로 이끄는 실천에 대한 불확실함을 버릴 때 ― 이것이, 비구들이여, 성스러운 제자는 떨어지지 않는, 확실한, 깨달음을 겨냥한 예류자(預流者)라고 불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