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adantāguttasuttaṃ (SN 35.94-길들지 않고 지켜지지 않음 경)[SN 35.77]
10. saḷavaggo, 1. adantāguttasuttaṃ (SN 35.94-길들지 않고 지켜지지 않음 경)[SN 35.77]
사왓티에서 설해짐. “비구들이여, 이런 여섯 가지 만남의 토대[육촉처(六觸處)]가 길들지 않고, 지켜지지 않고, 보호되지 않고, 단속되지 않으면 괴로움을 가져온다. 어떤 여섯인가? 비구들이여, 안(眼)의 촉처(觸處)는 길들지 않고, 지켜지지 않고, 보호되지 않고, 단속되지 않으면 괴로움을 가져온다. 이(耳)의 촉처는 길들지 않고, 지켜지지 않고, 보호되지 않고, 단속되지 않으면 괴로움을 가져온다. 비(鼻)의 촉처는 길들지 않고, 지켜지지 않고, 보호되지 않고, 단속되지 않으면 괴로움을 가져온다. 설(舌)의 촉처는 길들지 않고, 지켜지지 않고, 보호되지 않고, 단속되지 않으면 괴로움을 가져온다. 신(身)의 촉처는 길들지 않고, 지켜지지 않고, 보호되지 않고, 단속되지 않으면 괴로움을 가져온다. 의(意)의 촉처는 길들지 않고, 지켜지지 않고, 보호되지 않고, 단속되지 않으면 괴로움을 가져온다. 비구들이여, 이런 여섯 가지 만남의 토대[육촉처(六觸處)]가 길들지 않고, 지켜지지 않고, 보호되지 않고, 단속되지 않으면 괴로움을 가져온다.
비구들이여, 이런 여섯 가지 만남의 토대[육촉처(六觸處)]가 잘 길들고, 잘 지켜지고, 잘 보호되고, 잘 단속되면 행복을 가져온다. 어떤 여섯인가? 비구들이여, 안(眼)의 촉처(觸處)는 잘 길들고, 잘 지켜지고, 잘 보호되고, 잘 단속되면 행복을 가져온다. 이(耳)의 촉처는 잘 길들고, 잘 지켜지고, 잘 보호되고, 잘 단속되면 행복을 가져온다. 비(鼻)의 촉처는 잘 길들고, 잘 지켜지고, 잘 보호되고, 잘 단속되면 행복을 가져온다. 설(舌)의 촉처는 잘 길들고, 잘 지켜지고, 잘 보호되고, 잘 단속되면 행복을 가져온다. 신(身)의 촉처는 잘 길들고, 잘 지켜지고, 잘 보호되고, 잘 단속되면 행복을 가져온다. 의(意)의 촉처는 잘 길들고, 잘 지켜지고, 잘 보호되고, 잘 단속되면 행복을 가져온다. 비구들이여, 이런 여섯 가지 만남의 토대[육촉처(六觸處)]가 잘 길들고, 잘 지켜지고, 잘 보호되고, 잘 단속되면 행복을 가져온다.” 세존은 이렇게 말했다. 스승이신 선서(善逝)는 이렇게 말한 뒤에 다시 이렇게 말했다. ―
“saḷeva phassāyatanāni bhikkhavo,
asaṃvuto yattha dukkhaṃ nigacchati.
tesañca ye saṃvaraṇaṃ avedisuṃ,
saddhādutiyā viharantānavassutā.
“비구들이여, 육촉처(六觸處)가 단속되지 않는 곳에
괴로움이 찾아온다.
그러나 믿음을 가져서 그들의 단속을 아는 사람들은
갈망하지 않고 머문다.
“disvāna rūpāni manoramāni,
athopi disvāna amanoramāni.
manorame rāgapathaṃ vinodaye,
na cāppiyaṃ meti manaṃ padosaye.
마음에 드는 색(色)들을 본 뒤에
또는 마음에 들지 않는 색(色)들을 본 뒤에
마음에 드는 것들에서 탐(貪)의 영역을 제거하고
‘나에게 사랑스럽지 않다’라고 의(意)를 더럽히지 않는다.
“saddañca sutvā dubhayaṃ piyāppiyaṃ,
piyamhi sadde na samucchito siyā.
athoppiye dosagataṃ vinodaye,
na cāppiyaṃ meti manaṃ padosaye.
사랑스럽거나 사랑스럽지 않은 양쪽의 소리를 들은 뒤에
사랑스러운 소리에 대해 열중하지 않고
또한, 사랑스럽지 않은 것에서 진(嗔)에 속한 것을 제거하고
‘나에게 사랑스럽지 않다’라고 의(意)를 더럽히지 않는다.
“gandhañca ghatvā surabhiṃ manoramaṃ,
athopi ghatvā asuciṃ akantiyaṃ.
akantiyasmiṃ paṭighaṃ vinodaye,
chandānunīto na ca kantiye siyā.
향기롭고 마음에 드는 냄새를 맡은 뒤에
또는 더럽고 불쾌한 냄새를 맡은 뒤에
불쾌함에 대한 저항을 제거하고
유쾌한 것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rasañca bhotvāna asāditañca sāduṃ,
athopi bhotvāna asādumekadā.
sāduṃ rasaṃ nājjhosāya bhuñje,
virodhamāsādusu nopadaṃsaye.
허용되지 않은 달콤한 맛을 맛보거나
또는 맛없는 것을 한 번 맛본 뒤에
달콤한 맛에 묶이지 않고 먹어야 하고
맛없는 것을 거부하여 더럽히지 않는다.
“phassena phuṭṭho na sukhena majje,
dukkhena phuṭṭhopi na sampavedhe.
phassadvayaṃ sukhadukkhe upekkhe,
anānuruddho aviruddha kenaci.
닿을 때 즐거운 촉(觸) 때문에 취하지 않고
닿을 때 괴로운 촉(觸) 때문에도 동요하지 않는다.
두 가지 촉(觸)으로 이끌리지 않는 사람은
즐거움과 괴로움에 대한 평정 위에서 어떤 것에도 저항하지 않는다.
“papañcasaññā itarītarā narā,
papañcayantā upayanti saññino.
manomayaṃ gehasitañca sabbaṃ,
panujja nekkhammasitaṃ irīyati.
희론(戱論)의 상(想)을 가진 어떤 사람들은
희론(戱論)의 끝에 닿는 상(想)을 가진 자로 나아간다.
의성(意成)인 모든 세속적인 것들을 제거하고
출리(出離)에 속한 것들을 행해야 한다.
“evaṃ mano chassu yadā subhāvito,
phuṭṭhassa cittaṃ na vikampate kvaci.
te rāgadose abhibhuyya bhikkhavo,
bhavattha[(PTS) Bhavātha] jātimaraṇassa pāragā”ti. paṭhamaṃ.
이렇게 의(意)가 여섯을 잘 닦으면
어디에 닿아도 심(心)은 동요하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그대들은 탐(貪)과 진(嗔)을 극복해야 한다.
태어남과 죽음을 건넌 자가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