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atthinukhopariyāyasuttaṃ (SN 35.153-방법이 있는가 경)[SN 35.136]
15. navapurāṇavaggo, 8. atthinukhopariyāyasuttaṃ (SN 35.153-방법이 있는가 경)[SN 35.136]
“비구들이여, 비구들이여, 믿음과 다른 방법, 경향과 다른 방법, 전승과 다른 방법, 온전한 떠오름의 출현과 다른 방법, 견해와 통찰의 지속과 다른 방법으로 비구가 ‘나는 '태어남은 다했다. 범행은 완성되었다. 해야 할 일을 했다. 다음에는 현재 상태[유(有)]가 되지 않는다.'라고 분명히 안다.’라고 무위(無爲)의 앎을 선언하는 방법이 있는가?” “대덕이시여, 참으로 법들은 세존을 뿌리로 하고, 세존을 도관(導管)으로 하고, 세존을 의지합니다. 대덕이시여, 이 말씀의 의미를 세존께서 분명히 해주시면 참으로 감사하겠습니다. 비구들은 세존에게서 듣고서 명심할 것입니다.” “비구들이여, 그렇다면 듣고 잘 사고하라. 나는 말할 것이다.” “알겠습니다, 대덕이시여.”라고 그 비구들은 세존에게 대답했다. 세존은 이렇게 말했다. — 비구들이여, 비구들이여, 믿음과 다른 방법, 경향과 다른 방법, 전승과 다른 방법, 온전한 떠오름의 출현과 다른 방법, 견해와 통찰의 지속과 다른 방법으로 비구가 ‘나는 '태어남은 다했다. 범행은 완성되었다. 해야 할 일을 했다. 다음에는 현재 상태[유(有)]가 되지 않는다.'라고 분명히 안다.’라고 무위(無爲)의 앎을 선언하는 방법이 있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무엇이 믿음과 다른 방법, 경향과 다른 방법, 전승과 다른 방법, 온전한 떠오름의 출현과 다른 방법, 견해와 통찰의 지속과 다른 방법에 의해 비구가 ‘나는 '태어남은 다했다. 범행은 완성되었다. 해야 할 일을 했다. 다음에는 현재 상태[유(有)]가 되지 않는다.'라고 분명히 안다.’라고 무위(無爲)의 앎을 선언하는 방법인가? 여기, 비구들이여, 비구는 안(眼)으로 색(色)을 보면서 안으로 탐진치(貪瞋痴)가 있으면 ‘나의 안에 탐진치가 있다.’라고 분명히 안다. 탐진치가 없으면 ‘나의 안에 탐진치가 없다.’라고 분명히 안다. 비구들이여, 비구가 안으로 색을 보면서 안으로 탐진치(貪瞋痴)가 있으면 ‘나의 안에 탐진치가 있다.’라고 분명히 안다. 탐진치가 없으면 ‘나의 안에 탐진치가 없다.’라고 분명히 안다. 이런 법들이, 비구들이여, 믿음에 의해 알아야 하거나, 경향에 의해 알아야 하거나, 전승에 의해 알아야 하거나, 온전한 떠오름의 출현에 의해 알아야 하거나, 견해와 통찰의 지속에 의해 알아야 하는 것인가?” “아닙니다, 대덕이시여.” “이런 법들은, 비구들이여, 지혜로써 보면서 알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습니다, 대덕이시여.” “비구들이여, 이것이 믿음과 다른 방법, 경향과 다른 방법, 전승과 다른 방법, 온전한 떠오름의 출현과 다른 방법, 견해와 통찰의 지속과 다른 방법에 의해 비구가 ‘나는 '태어남은 다했다. 범행은 완성되었다. 해야 할 일을 했다. 다음에는 현재 상태[유(有)]가 되지 않는다.'라고 분명히 안다.’라고 무위(無爲)의 앎을 선언하는 방법이다. …
다시, 비구들이여, 비구는 설(舌)로 미(味)를 맛보면서 안으로 탐진치(貪瞋痴)가 있으면 ‘나의 안에 탐진치가 있다.’라고 분명히 안다. 탐진치가 없으면 ‘나의 안에 탐진치가 없다.’라고 분명히 안다. 비구들이여, 비구가 설로 미를 맛보면서 안으로 탐진치(貪瞋痴)가 있으면 ‘나의 안에 탐진치가 있다.’라고 분명히 안다. 탐진치가 없으면 ‘나의 안에 탐진치가 없다.’라고 분명히 안다. 이런 법들이, 비구들이여, 믿음에 의해 알아야 하거나, 경향에 의해 알아야 하거나, 전승에 의해 알아야 하거나, 온전한 떠오름의 출현에 의해 알아야 하거나, 견해와 통찰의 지속에 의해 알아야 하는 것인가?” “아닙니다, 대덕이시여.” “이런 법들은, 비구들이여, 지혜로써 보면서 알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습니다, 대덕이시여.” “비구들이여, 이것이 믿음과 다른 방법, 경향과 다른 방법, 전승과 다른 방법, 온전한 떠오름의 출현과 다른 방법, 견해와 통찰의 지속과 다른 방법에 의해 비구가 ‘나는 '태어남은 다했다. 범행은 완성되었다. 해야 할 일을 했다. 다음에는 현재 상태[유(有)]가 되지 않는다.'라고 분명히 안다.’라고 무위(無爲)의 앎을 선언하는 방법이다. …
다시, 비구들이여, 비구는 의(意)로 법(法)을 인식하면서 안으로 탐진치(貪瞋痴)가 있으면 ‘나의 안에 탐진치가 있다.’라고 분명히 안다. 탐진치가 없으면 ‘나의 안에 탐진치가 없다.’라고 분명히 안다. 비구들이여, 비구가 의로 법을 인식하면서 안으로 탐진치(貪瞋痴)가 있으면 ‘나의 안에 탐진치가 있다.’라고 분명히 안다. 탐진치가 없으면 ‘나의 안에 탐진치가 없다.’라고 분명히 안다. 이런 법들이, 비구들이여, 믿음에 의해 알아야 하거나, 경향에 의해 알아야 하거나, 전승에 의해 알아야 하거나, 온전한 떠오름의 출현에 의해 알아야 하거나, 견해와 통찰의 지속에 의해 알아야 하는 것인가?” “아닙니다, 대덕이시여.” “이런 법들은, 비구들이여, 지혜로써 보면서 알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습니다, 대덕이시여.” “비구들이여, 이것이 믿음과 다른 방법, 경향과 다른 방법, 전승과 다른 방법, 온전한 떠오름의 출현과 다른 방법, 견해와 통찰의 지속과 다른 방법에 의해 비구가 ‘나는 '태어남은 다했다. 범행은 완성되었다. 해야 할 일을 했다. 다음에는 현재 상태[유(有)]가 되지 않는다.'라고 분명히 안다.’라고 무위(無爲)의 앎을 선언하는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