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paṭhamadārukkhandhopamasuttaṃ (SN 35.194-나뭇더미 비유 경1)
19. āsīvisavaggo, 4. paṭhamadārukkhandhopamasuttaṃ (SN 35.194-나뭇더미 비유 경1)
한때 세존은 꼬삼비에서 강가 강변에 머물렀다. 세존은 큰 나뭇더미가 강가 강의 흐름에 떠내려가는 것을 보았다. 보고서 비구들에게 “비구들이여, 그대들은 강가 강의 흐름에 떠내려가는 저 큰 나뭇더미를 보는가?”라고 말했다. “그렇습니다, 대덕이시여.” “만약에, 비구들이여, 저 나뭇더미가 한쪽 강변에도 닿지 않고, 반대쪽 강변에도 닿지 않고, 중간에서 가라앉지도 않을 것이고, 바위에 걸리지도 않을 것이고, 사람이 거두어 가지도 않을 것이고, 비인간이 거두어 가지도 않을 것이고, 소용돌이에 휩쓸리지도 않을 것이고, 안에서 썩지도 않는다면, 비구들이여, 이렇게 그 나뭇더미는 바다로 굽고, 바다로 경사지고, 바다로 이끌릴 것이다. 그것의 원인은 무엇인가? 비구들이여, 강가 강의 흐름은 바다로 굽어 있고, 바다로 경사져 있고, 바다로 이끌린다.
이처럼, 비구들이여, 만약에 그대들도 한쪽 강변에 닿지 않고, 반대쪽 강변에 닿지 않고, 중간에서 가라앉지 않을 것이고, 바위에 걸리지 않을 것이고, 사람이 거두어 가지 않을 것이고, 비인간이 거두어 가지 않을 것이고, 소용돌이에 휩쓸리지 않을 것이고, 안에서 썩지 않는다면, 비구들이여, 이렇게 그대들은 열반으로 굽고, 열반으로 경사지고, 열반으로 이끌릴 것이다. 그것의 원인은 무엇인가? 비구들이여, 바른 견해는 열반으로 굽어 있고, 열반으로 경사져 있고, 열반으로 이끌린다.” 이렇게 말했을 때, 어떤 비구가 세존에게 이렇게 말했다. ― “대덕이시여, 무엇이 한쪽 강변이고, 무엇이 반대쪽 강변이고, 무엇이 중간에 가라앉음이고, 무엇이 바위에 걸림이고, 무엇이 사람에게 붙잡힘이고, 무엇이 비인간에 붙잡힘이고, 무엇이 소용돌이에 휩쓸림이고, 무엇이 안에서 썩는 것입니까?”라고.
“비구여, 한쪽 강변이라는 것은, 비구여, 육내입처(六內入處)를 말하고, 반대쪽 강변이라는 것은, 비구여, 육외입처(六外入處)를 말하고, 중간에 가라앉음이라는 것은, 비구여, 소망과 탐(貪)을 말하고, 바위에 걸림이라는 것은, 비구여, 나는 있다는 자기화를 말한다.
그러면 비구여, 사람에게 붙잡힘은 무엇인가? 여기, 비구여, 재가자들과 교제하며 머문다. 함께 소망하고, 슬픔을 함께 나눈다. 행복한 곳에서 행복해하고, 괴로운 곳에서 괴로워한다. 해야 하는 역할이 생길 때 자신이 그것들을 실천한다. 이것이, 비구여, 사람에게 붙잡힘이라고 불린다..
그러면 비구여, 비인간에 붙잡힘은 무엇인가? 여기, 비구여, 어떤 사람은 ‘나는 이런 계(戒)나 관행이나 고행이나 범행으로 신(神)이나 어떤 신(神)이 될 것이다.’라고 어떤 신(神)들의 무리를 지향하면서 범행(梵行)을 실천한다. 이것이, 비구여, 비인간에 붙잡힘이라고 불린다. 소용돌이에 휩쓸림이라는 것은, 비구여, 다섯 가지 소유의 사유에 묶인 것을 말한다.
그러면 비구여, 무엇이 안에서 썩는 것인가? 여기, 비구여, 어떤 사람은 계(戒)를 경시하고, 성품이 악하고, 깨끗하지 않고, 의심스러운 행동을 하고, 몰래 행동하고, 참된 사문이 아니면서 사문인 체하고, 범행을 실천하지 않으면서 범행을 실천하는 체하고, 안이 썩었고, 갈망으로 가득 찼고, 불결하다. 이것이, 비구여, 안에서 썩는 것이다.”
그때 소치는 사람 난다가 세존에게서 멀지 않은 곳에 서 있었다. 소치는 사람 난다는 세존에게 이렇게 말했다. ― “대덕이시여, 저는 한쪽 강변에 닿지 않고, 반대쪽 강변에 닿지 않고, 중간에서 가라앉지 않을 것이고, 바위에 걸리지 않을 것이고, 저를 사람이 거두어 가지 않을 것이고, 비인간이 거두어 가지 않을 것이고, 소용돌이에 휩쓸리지 않을 것이고, 안에서 썩지 않을 것입니다. 대덕이시여, 저는 세존의 앞에서 출가하고자 합니다. 구족계를 받고자 합니다.” “그렇다면 난다여, 그대는 소 떼를 주인에게 돌려주어라.” “대덕이시여, 송아지를 바라는 소 떼는 돌아갈 것입니다.” “난다여, 그대는 소 떼를 주인에게 돌려주어라.” 소치는 사람 난다는 소를 주인에게 돌려준 뒤에 세존에게 왔다. 와서는 세존에게 “대덕이시여, 소를 주인에게 돌려주었습니다. 대덕이시여, 저는 세존의 앞에서 출가하고자 합니다. 구족계를 받고자 합니다.” 소치는 사람 난다는 세존의 앞에서 출가하여 구족계를 받았다. 구족계를 받고 홀로 외딴곳에서 방일하지 않고 노력하고 단호한 의지를 가지고 머문 난다 존자는 오래지 않아 좋은 가문의 아들들이 집으로부터 집 없는 곳으로 출가한 목적인 위없는 범행(梵行)의 완성을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실답게 안 뒤에 실현하고 성취하여 머물렀다. “태어남은 다했다. 범행은 완성되었다. 해야 할 일을 했다. 다음에는 현재 상태[유(有)]가 되지 않는다.”라고 실답게 알았다. 난다 존자는 아라한들 중의 한 분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