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bāhirāniccanandikkhayasuttaṃ (SN 35.142-밖의 무상과 소망의 부서짐 경)
16. nandikkhayavaggo, 4. bāhirāniccanandikkhayasuttaṃ (SN 35.142-밖의 무상과 소망의 부서짐 경)
비구들이여, 색(色)들을 여리작의(如理作意)하고, 색(色)들의 무상(無常)함을 있는 그대로 관찰해야 한다. 비구들이여, 색(色)들을 여리작의(如理作意)하고, 색(色)들의 무상(無常)함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는 자는 색(色)들에 대해서도 염오(厭惡)한다. 소망(所望)의 부서짐으로부터 탐(貪)의 부서짐이 있고, 탐(貪)의 부서짐으로부터 소망(所望)의 부서짐이 있다. 소망(所望)과 탐(貪)의 부서짐으로부터 해탈된 심(心)은 잘 해탈된 것이라고 불린다.
비구들이여, 성(聲)들을 여리작의(如理作意)하고, 성(聲)들의 무상(無常)함을 있는 그대로 관찰해야 한다. 비구들이여, 성(聲)들을 여리작의(如理作意)하고, 성(聲)들의 무상(無常)함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는 자는 성(聲)들에 대해서도 염오(厭惡)한다. 소망(所望)의 부서짐으로부터 탐(貪)의 부서짐이 있고, 탐(貪)의 부서짐으로부터 소망(所望)의 부서짐이 있다. 소망(所望)과 탐(貪)의 부서짐으로부터 해탈된 심(心)은 잘 해탈된 것이라고 불린다.
비구들이여, 향(香)들을 여리작의(如理作意)하고, 향(香)들의 무상(無常)함을 있는 그대로 관찰해야 한다. 비구들이여, 향(香)들을 여리작의(如理作意)하고, 향(香)들의 무상(無常)함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는 자는 향(香)들에 대해서도 염오(厭惡)한다. 소망(所望)의 부서짐으로부터 탐(貪)의 부서짐이 있고, 탐(貪)의 부서짐으로부터 소망(所望)의 부서짐이 있다. 소망(所望)과 탐(貪)의 부서짐으로부터 해탈된 심(心)은 잘 해탈된 것이라고 불린다.
비구들이여, 미(味)들을 여리작의(如理作意)하고, 미(味)들의 무상(無常)함을 있는 그대로 관찰해야 한다. 비구들이여, 미(味)들을 여리작의(如理作意)하고, 미(味)들의 무상(無常)함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는 자는 미(味)들에 대해서도 염오(厭惡)한다. 소망(所望)의 부서짐으로부터 탐(貪)의 부서짐이 있고, 탐(貪)의 부서짐으로부터 소망(所望)의 부서짐이 있다. 소망(所望)과 탐(貪)의 부서짐으로부터 해탈된 심(心)은 잘 해탈된 것이라고 불린다.
비구들이여, 촉(觸)들을 여리작의(如理作意)하고, 촉(觸)들의 무상(無常)함을 있는 그대로 관찰해야 한다. 비구들이여, 촉(觸)들을 여리작의(如理作意)하고, 촉(觸)들의 무상(無常)함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는 자는 촉(觸)들에 대해서도 염오(厭惡)한다. 소망(所望)의 부서짐으로부터 탐(貪)의 부서짐이 있고, 탐(貪)의 부서짐으로부터 소망(所望)의 부서짐이 있다. 소망(所望)과 탐(貪)의 부서짐으로부터 해탈된 심(心)은 잘 해탈된 것이라고 불린다.
비구들이여, 법(法)들을 여리작의(如理作意)하고, 법(法)들의 무상(無常)함을 있는 그대로 관찰해야 한다. 비구들이여, 법(法)들을 여리작의(如理作意)하고, 법(法)들의 무상(無常)함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는 자는 법(法)들에 대해서도 염오(厭惡)한다. 소망(所望)의 부서짐으로부터 탐(貪)의 부서짐이 있고, 탐(貪)의 부서짐으로부터 소망(所望)의 부서짐이 있다. 소망(所望)과 탐(貪)의 부서짐으로부터 해탈된 심(心)은 잘 해탈된 것이라고 불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