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pañcakaṅgasuttaṃ (SN 36.19-빤짜깡가 경)
2. rahogatavaggo, 9. pañcakaṅgasuttaṃ (SN 36.19-빤짜깡가 경)
그때 빤짜깡가 건축가가 우다이 존자에게 갔다. 가서는 우다이 존자에게 절하고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빤짜깡가 건축가는 우다이 존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ㅡ "대덕 우다이여, 세존께서는 몇 가지 경험을 말씀하셨습니까?" "건축가여, 세존께서는 세 가지 경험을 말씀하셨습니다. 즐거움[락(樂)]의 경험, 괴로움[고(苦)]의 경험,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음[불고불락(不苦不樂)]의 경험 ㅡ 건축가여, 세존께서는 이런 세 가지 경험을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말했을 때, 빤짜깡가 건축가는 우다이 존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ㅡ "대덕 우다이여, 세존께서는 세 가지 경험을 말씀하신 게 아닙니다. 세존께서는 두 가지 경험을 말씀하셨습니다. 즉 즐거움의 경험과 괴로움의 경험입니다. 대덕이시여, 이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음의 경험은 평화의 영역에 있는(santasmiṃ) 뛰어난 즐거움에 대한(paṇīte sukhe) 세존의 말씀입니다.”
두 번째도 우다이 존자는 빤짜깡가 건축가에게 이렇게 말했다. ㅡ "건축가여, 세존께서는 세 가지 경험을 말씀하셨습니다. 즐거움의 경험, 괴로움의 경험,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음의 경험 ㅡ 건축가여, 세존께서는 이런 세 가지 경험을 말씀하셨습니다." 두 번째도 빤짜깡가 건축가는 우다이 존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ㅡ "대덕 우다이여, 세존께서는 세 가지 경험을 말씀하신 게 아닙니다. 세존께서는 두 가지 경험을 말씀하셨습니다. 즉 즐거움의 경험과 괴로움의 경험입니다. 대덕이시여, 이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음의 경험은 평화의 영역에 있는 뛰어난 즐거움에 대한 세존의 말씀입니다.”
세 번째도 우다이 존자는 빤짜깡가 건축가에게 이렇게 말했다. ㅡ "건축가여, 세존께서는 세 가지 경험을 말씀하셨습니다. 즐거움의 경험, 괴로움의 경험,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음의 경험 ㅡ 건축가여, 세존께서는 이런 세 가지 경험을 말씀하셨습니다." 세 번째도 빤짜깡가 건축가는 우다이 존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ㅡ "대덕 우다이여, 세존께서는 세 가지 경험을 말씀하신 게 아닙니다. 세존께서는 두 가지 경험을 말씀하셨습니다. 즉 즐거움의 경험과 괴로움의 경험입니다. 대덕이시여, 이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음의 경험은 평화의 영역에 있는 뛰어난 즐거움에 대한 세존의 말씀입니다.”
우다이 존자는 얼굴을 마주한 빤짜깡가 건축가를 설득할 수 없었고, 빤짜깡가 건축가도 얼굴을 마주한 우다이 존자를 설득할 수 없었다. 우다이 존자와 빤짜깡가 건축가가 함께한 이 우정의 대화를 아난다 존자가 들었다.
그러자 아난다 존자는 세존에게 갔다. 가서는 세존에게 절하고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아난다 존자는 우다이 존자와 빤짜깡가 건축가가 함께한 이 우정의 대화를 들은 그대로 모두 세존에게 말했다.
"아난다여, 빤짜깡가 건축가가 우다이에게 기뻐하지 않은 것은 이유가 있다. 또한, 우다이가 빤짜깡가 건축가에게 기뻐하지 않은 것도 이유가 있다. 나는 방법에 따라 두 가지로도 경험을 말했고, 방법에 따라 세 가지로도 경험을 말했고, 방법에 따라 다섯 가지로도 경험을 말했고, 방법에 따라 여섯 가지로도 경험을 말했고, 방법에 따라 열여덟 가지로도 경험을 말했고, 방법에 따라 서른여섯 가지로도 경험을 말했고, 방법에 따라 백여덟 가지로도 경험을 말했다. 아난다여, 이렇게 내가 방법에 따라 설한 법이 있다.
참으로 아난다여, 이렇게 내가 방법에 따라 설한 법에 대해 잘 말해지고 잘 설해진 것이라고 서로 간에 동의하지 않고 수긍하지 않고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논쟁이 생기고 갈등이 생기고 분쟁하게 되고 입의 칼로 찌르면서 지낼 것이 예상된다. 아난다여, 이렇게 내가 방법에 따라 설한 법에 대해 잘 말해지고 잘 설해진 것이라고 서로 간에 동의하고 수긍하고 인정하는 사람들에게는 화합하고 즐거워하고 다투지 않고 우유와 물로 된 것 같고 서로를 사랑스런 눈으로 보면서 지낼 것이 예상된다.
아난다여, 이런 다섯 가지 소유의 사유에 묶인 것이 있다. 무엇이 다섯인가? 원하고 좋아하고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고 소유의 사유를 수반하며 좋아하기 마련인 안(眼)으로 인식되는 색(色)들, … 이(耳)로 인식되는 성(聲)들, … 비(鼻)로 인식되는 향(香)들, … 설(舌)로 인식되는 미(味)들, … 원하고 좋아하고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고 소유의 사유를 수반하며 좋아하기 마련인 신(身)으로 인식되는 촉(觸)들 ㅡ 아난다여, 이런 다섯 가지 소유의 사유에 묶인 것이 있다. 아난다여, 이런 다섯 가지 소유의 사유에 묶인 것을 연(緣)하여 생기는 즐거움과 기쁨, 이것이 소유의 즐거움[욕락(慾樂)]이라고 불린다. 아난다여, ‘그 최상의 즐거움과 기쁨을 중생들은 경험한다[그것이 중생들이 경험하는 최상의 즐거움과 기쁨이다].’라고 누가 말한다면, 나는 이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 원인은 무엇인가? 아난다여, 그 즐거움보다 더 훌륭하고 더 뛰어난 다른 즐거움이 있다.
그러면 아난다여, 무엇이 그 즐거움보다 더 훌륭하고 더 뛰어난 다른 즐거움인가? 여기, 아난다여, 비구는 소유의 삶에서 벗어나고, 불선법(不善法)들에서 벗어나서, 위딱까가 있고 위짜라가 있고 떨침에서 생긴 기쁨과 즐거움의 초선(初禪)을 성취하여 머문다. 이것이, 아난다여, 그 즐거움보다 더 훌륭하고 더 뛰어난 다른 즐거움이다. 아난다여, ‘그 최상의 즐거움과 만족을 중생들은 경험한다.’라고 누가 말한다면, 나는 이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 원인은 무엇인가? 아난다여, 그 즐거움보다 더 훌륭하고 더 뛰어난 다른 즐거움이 있다.
그러면 아난다여, 무엇이 그 즐거움보다 더 훌륭하고 더 뛰어난 다른 즐거움인가? 여기, 아난다여, 비구는 위딱까와 위짜라의 가라앉음으로 인해, 안으로 평온함과 마음의 집중된 상태가 되어, 위딱까도 없고 위짜라도 없이, 삼매에서 생긴 기쁨과 즐거움의 제이선(第二禪)을 성취하여 머문다. 이것이, 아난다여, 그 즐거움보다 더 훌륭하고 더 뛰어난 다른 즐거움이다. 아난다여, ‘그 최상의 즐거움과 만족을 중생들은 경험한다.’라고 누가 말한다면, 나는 이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 원인은 무엇인가? 아난다여, 그 즐거움보다 더 훌륭하고 더 뛰어난 다른 즐거움이 있다.
그러면 아난다여, 무엇이 그 즐거움보다 더 훌륭하고 더 뛰어난 다른 즐거움인가? 여기, 아난다여, 비구는 기쁨의 바램으로부터 평정하게 머물고, 사띠-삼빠자나 하면서 머물고, 몸으로 즐거움을 경험한다. 성인들이 '평정을 가진 자, 사띠를 가진 자, 즐거움에 머무는 자[사념락주(捨念樂住)].'라고 말하는 제삼선(第三禪)을 성취하여 머문다. 이것이, 아난다여, 그 즐거움보다 더 훌륭하고 더 뛰어난 다른 즐거움이다. 아난다여, ‘그 최상의 즐거움과 만족을 중생들은 경험한다.’라고 누가 말한다면, 나는 이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 원인은 무엇인가? 아난다여, 그 즐거움보다 더 훌륭하고 더 뛰어난 다른 즐거움이 있다.
그러면 아난다여, 무엇이 그 즐거움보다 더 훌륭하고 더 뛰어난 다른 즐거움인가? 여기, 아난다여, 비구는 즐거움의 버림과 괴로움의 버림으로부터, 이미 만족과 불만들의 줄어듦으로부터, 괴로움도 즐거움도 없고 평정과 청정한 사띠[사념청정(捨念淸淨)]의 제사선(第四禪)을 성취하여 머문다. 이것이, 아난다여, 그 즐거움보다 더 훌륭하고 더 뛰어난 다른 즐거움이다. 아난다여, ‘그 최상의 즐거움과 만족을 중생들은 경험한다.’라고 누가 말한다면, 나는 이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 원인은 무엇인가? 아난다여, 그 즐거움보다 더 훌륭하고 더 뛰어난 다른 즐거움이 있다.
그러면 아난다여, 무엇이 그 즐거움보다 더 훌륭하고 더 뛰어난 다른 즐거움인가? 여기, 아난다여, 비구는 색상(色想)들의 완전한 초월로부터, 저항의 상(想)들의 줄어듦으로부터, 다양함의 상(想)들을 작의않음으로부터 ‘무한한 공간’이라는 공무변처(空無邊處)를 성취하여 머문다. 이것이, 아난다여, 그 즐거움보다 더 훌륭하고 더 뛰어난 다른 즐거움이다. 아난다여, ‘그 최상의 즐거움과 만족을 중생들은 경험한다.’라고 누가 말한다면, 나는 이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 원인은 무엇인가? 아난다여, 그 즐거움보다 더 훌륭하고 더 뛰어난 다른 즐거움이 있다.
그러면 아난다여, 무엇이 그 즐거움보다 더 훌륭하고 더 뛰어난 다른 즐거움인가? 여기, 아난다여, 비구는 공무변처를 완전히 초월하고 ‘무한한 식(識)’이라는 식무변처(識無邊處)를 성취하여 머문다. 이것이, 아난다여, 그 즐거움보다 더 훌륭하고 더 뛰어난 다른 즐거움이다. 아난다여, ‘그 최상의 즐거움과 만족을 중생들은 경험한다.’라고 누가 말한다면, 나는 이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 원인은 무엇인가? 아난다여, 그 즐거움보다 더 훌륭하고 더 뛰어난 다른 즐거움이 있다.
그러면 아난다여, 무엇이 그 즐거움보다 더 훌륭하고 더 뛰어난 다른 즐거움인가? 여기, 아난다여, 비구는 식무변처를 완전히 초월하고 ‘아무것도 없다.’라는 무소유처(無所有處)를 성취하여 머문다. 이것이, 아난다여, 그 즐거움보다 더 훌륭하고 더 뛰어난 다른 즐거움이다. 아난다여, ‘그 최상의 즐거움과 만족을 중생들은 경험한다.’라고 누가 말한다면, 나는 이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 원인은 무엇인가? 아난다여, 그 즐거움보다 더 훌륭하고 더 뛰어난 다른 즐거움이 있다.
그러면 아난다여, 무엇이 그 즐거움보다 더 훌륭하고 더 뛰어난 다른 즐거움인가? 여기, 아난다여, 비구는 무소유처를 완전히 초월하고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를 성취하여 머문다. 이것이, 아난다여, 그 즐거움보다 더 훌륭하고 더 뛰어난 다른 즐거움이다. 아난다여, ‘그 최상의 즐거움과 만족을 중생들은 경험한다.’라고 누가 말한다면, 나는 이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 원인은 무엇인가? 아난다여, 그 즐거움보다 더 훌륭하고 더 뛰어난 다른 즐거움이 있다.
그러면 아난다여, 무엇이 그 즐거움보다 더 훌륭하고 더 뛰어난 다른 즐거움인가? 여기, 아난다여, 비구는 비상비비상처를 완전히 초월하고 상수멸(想受滅)을 성취하여 머문다. 이것이, 아난다여, 그 즐거움보다 더 훌륭하고 더 뛰어난 다른 즐거움이다.
그런데 아난다여, 외도 유행승들이 이렇게 말하는 경우가 있을 것이다. ㅡ '사문 고따마는 상수멸(想受滅)을 말했다. 그리고 즐거움의 영역에서 그것을 설명한다. 이것이 무슨 상황인가? 어떻게 이럴 수 있는가?'라고. 아난다여, 이렇게 말하는 다른 외도 유행승들에게 이렇게 말해줘야 한다. '도반들이여, 세존께서는 즐거움의 영역에 대해서 즐거움의 경험만을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도반들이여, 여래는 즐거움이 있는 어디에서든지 그것을 즐거움의 영역에서 설명합니다.'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