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화살 맞지 않기] 1. sagāthāvaggo, 6. sallasuttaṃ (SN 36.6-화살 경)
1. sagāthāvaggo, 6. sallasuttaṃ (SN 36.6-화살 경)
“비구들이여, 배우지 못한 범부도 즐거운 느낌을 경험하고, 괴로운 느낌을 경험하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경험한다. 비구들이여,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도 즐거운 느낌을 경험하고, 괴로운 느낌을 경험하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경험한다. 비구들이여, 거기서 배우지 못한 범부에 비해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에게 어떤 차이, 어떤 특별함, 어떤 다름이 있는가?”
“대덕이시여, 참으로 법들은 세존을 뿌리로 하고, 세존을 도관(導管)으로 하고, 세존을 의지합니다. 대덕이시여, 이 말씀의 의미를 세존께서 분명히 해주시면 참으로 감사하겠습니다. 비구들은 세존에게서 듣고서 받아들일 것입니다.” “비구들이여, 괴로운 느낌에 닿아 있는 배우지 못한 범부는 슬퍼하고 힘들어하고 비탄에 빠지고 가슴을 치며 울부짖고 당황한다. 그는 두 가지 느낌을 경험한다. ― 몸에 속한 느낌과 심(心)에 속한 느낌. 예를 들면, 비구들이여, 어떤 사람이 화살을 맞는 것과 같다. 그는 두 번째 화살을 이어 맞을 것이다. 비구들이여, 이렇게 그 사람은 두 개의 화살에 의한 느낌을 경험하게 된다. 이처럼, 비구들이여, 괴로운 느낌에 닿아있는 배우지 못한 범부는 슬퍼하고 힘들어하고 비탄에 빠지고 가슴을 치며 울부짖고 당황한다. 그는 몸에 속한 것과 심(心)에 속한 것의 두 가지 느낌을 경험한다.
괴로운 느낌에 닿아있는 그는 저항한다. 그처럼 괴로운 느낌에 저항하는 그에게 괴로운 느낌에 대한 저항의 잠재성향이 잠재한다. 괴로운 느낌에 닿아있는 그는 소유의 사유의 즐거움[욕락(慾樂)]을 즐긴다. 무엇이 그 원인인가? 비구들이여, 배우지 못한 범부는 소유의 즐거움과 다른 곳에서 괴로운 느낌을 위한 해방을 꿰뚫어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소유의 즐거움을 즐기는 그에게 즐거운 느낌에 대한 탐(貪)의 잠재성향이 잠재한다. 그는 그러한 느낌들의 자라남과 줄어듦과 매력과 위험과 해방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지 못한다. 그러한 느낌들의 자라남과 줄어듦과 매력과 위험과 해방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지 못하는 그에게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에 대한 무명(無明)의 잠재성향이 잠재한다. 만약 그가 즐거운 느낌을 경험하게 되어도 매인 채로 그것을 경험한다. 만약 괴로운 느낌을 경험하게 되어도 매인 채로 그것을 경험한다. 만약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경험하게 되어도 매인 채로 그것을 경험한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배우지 못한 범부는 태어남과 늙음과 죽음과 슬픔-비탄-고통-고뇌-절망에 매여 있는 자이고, 괴로움에 매여 있는 자’라고 불린다고 나는 말한다.
비구들이여, 괴로운 느낌에 닿아있는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는 슬퍼하지 않고 힘들어하지 않고 비탄에 빠지지 않고 가슴을 치며 울부짖지 않고 당황하지 않는다. 그는 몸에 속한 것의 한 가지 느낌을 경험한다. 심(心)에 속한 것은 아니다.
비구들이여,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화살을 맞는 것과 같다. 그는 두 번째 화살을 이어 맞지 않을 것이다. 비구들이여, 이렇게 그 사람은 한 개의 화살에 의한 느낌을 경험하게 된다. 이처럼, 비구들이여, 괴로운 느낌에 닿아있는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는 슬퍼하지 않고 힘들어하지 않고 비탄에 빠지지 않고 가슴을 치며 울부짖지 않고 당황하지 않는다. 그는 몸에 속한 것의 한 가지 느낌을 경험한다. 심(心)에 속한 것은 아니다.
괴로운 느낌에 닿아있는 그는 저항하지 않는다. 그처럼 괴로운 느낌에 저항하지 않는 그에게 괴로운 느낌에 대한 저항의 잠재성향이 잠재하지 않는다. 괴로운 느낌에 닿아있는 그는 소유의 즐거움[욕락(慾樂)]을 즐기지 않는다. 무엇이 그 원인인가? 비구들이여,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는 소유의 즐거움과 다른 곳에서 괴로운 느낌을 위한 해방을 꿰뚫어 알기 때문이다. 소유의 사유의 즐거움을 즐기지 않는 그에게 즐거운 느낌에 대한 탐(貪)의 잠재성향이 잠재하지 않는다. 그는 그러한 느낌들의 자라남과 줄어듦과 매력과 위험과 해방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 그러한 느낌들의 자라남과 줄어듦과 매력과 위험과 해방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아는 그에게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에 대한 무명(無明)의 잠재성향이 잠재하지 않는다. 만약 그가 즐거운 느낌을 경험하게 되어도 매이지 않고 그것을 경험한다. 만약 괴로운 느낌을 경험하게 되어도 매이지 않고 그것을 경험한다. 만약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경험하게 되어도 매이지 않고 그것을 경험한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는 태어남과 늙음과 죽음과 슬픔-비탄-고통-고뇌-절망에 매여 있지 않은 자이고, 괴로움에 매여 있지 않은 자’라고 불린다고 나는 말한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배우지 못한 범부에 비해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의 차이이고, 특별함이고, 다름이다.”
“na vedanaṃ vedayati sapañño,
sukhampi dukkhampi bahussutopi.
ayañca dhīrassa puthujjanena,
mahā viseso kusalassa hoti.
“saṅkhātadhammassa bahussutassa,
vipassato lokamimaṃ parañca.
iṭṭhassa dhammā na mathenti cittaṃ,
aniṭṭhato no paṭighātameti.
“tassānurodhā athavā virodhā,
vidhūpitā atthagatā na santi.
padañca ñatvā virajaṃ asokaṃ,
sammā pajānāti bhavassa pāragū”ti.
“지혜 있는 이, 많이 배운 이,
즐거운 느낌이나 괴로운 느낌을 경험하지 않는다.
현자와 범부 간에 능숙함의 차이가 이렇듯 크다.
법을 터득한 이, 많이 배운 이,
이 세상과 저세상을 올바로 보는 이,
만족스러운 법에 마음 흔들리지 않고
만족스럽지 않은 것에 저항하지 않는다.
순(順), 역(逆)이 모두 흩어지고 꺼져서
존재하지 않는다.
때 없고 슬픔 없는 길을 알아
존재의 초월을 바르게 꿰뚫어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