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pāṭaliyasuttaṃ (SN 42.13-빠딸리야 경) 중에서
13. pāṭaliyasuttaṃ (SN 42.13-빠딸리야 경) 중에서
“대덕이시여, 그런 저에게 불확실이 있고 의심이 있습니다. ㅡ ‘이 사문-바라문 존자들 중에서 참으로 누가 사실이고 누가 거짓인가?’라고.
“촌장이여, 그대가 불확실해 하는 것은 그럴 만하다. 의심하는 것은 그럴 만하다. 그대에게 불확실해져야 하는 경우에 대한 의심이 일어난 것이다.” “대덕이시여, 저는 ‘세존께서는 나에게 내가 이 불확실한 법을 버릴 수 있는 법을 설하는 것이 가능하다.’라고 세존에 대한 이런 분명함이 있습니다.
촌장이여, 법(法)의 삼매가 있다. 거기서 만약 그대가 심(心)의 삼매를 얻을 수 있으면 이렇게 그대는 이 불확실한 법을 버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촌장이여, 무엇이 법(法)의 삼매인가? 촌장이여, 여기 성스러운 제자는 생명을 해치는 행위를 버렸기 때문에 생명을 해치는 행위로부터 피한 자이다. 주지 않는 것을 가지는 행위를 버렸기 때문에 주지 않는 것을 가지는 행위로부터 피한 자이다. 음행(淫行)에 대한 삿된 행위를 버렸기 때문에 음행(淫行)에 대한 삿된 행위로부터 피한 자이다. 거짓을 말하는 행위를 버렸기 때문에 거짓을 말하는 행위로부터 피한 자이다. 험담하는 행위를 버렸기 때문에 험담하는 행위로부터 피한 자이다. 거칠게 말하는 행위를 버렸기 때문에 거칠게 말하는 행위로부터 피한 자이다. 쓸모없고 흐트러지게 말하는 행위를 버렸기 때문에 쓸모없고 흐트러지게 말하는 행위로부터 피한 자이다. 간탐(慳貪)을 버렸기 때문에 간탐하지 않는 자이다. 진에(瞋恚)의 결점을 버렸기 때문에 분노하지 않는 심(心)을 가진 자이다. 삿된 견해를 버렸기 때문에 바른 견해를 가진 자이다.
촌장이여, 이렇게 간탐을 떠나고 진에를 떠나고 당황함이 없이 사띠-삼빠자나 하는 그 성스러운 제자는 자(慈)가 함께한 심(心)으로 한 방향을 채우면서 머문다. 그렇게 두 방향을, 그렇게 세 방향을, 그렇게 네 방향을. 이렇게 위로 아래로 중간방위로, 모든 곳에서 모두에게 펼쳐서 모든 세상을 방대하고 거대하고 제한 없고 원망 없고 진에(瞋恚) 없는 자(慈)가 함께한 심(心)으로 채우면서 머문다. 그는 이렇게 숙고한다. ㅡ ‘이 스승은 이런 주장, 이런 견해를 가졌다. ㅡ '①보시(報施)도 없고 제사(祭祀)도 없고 봉헌(奉獻)도 없다. ②선행(善行)과 악행(惡行)의 업(業)들에게 과(果)도 없고 보(報)도 없다. ③이 세상도 없고 저 세상도 없다. ④어머니도 없고 아버지도 없다. ⑤화생(化生)하는 중생은 없다. ⑥세상에는 이 세상과 저 세상을 스스로 실답게 안 뒤에 실현하여 선언하는, 바른 길에 들어서서 바르게 실천하는 사문·바라문들이 없다.'라고. 만약 그 스승의 주장이 사실이라 해도 나에게는 그것 때문에 나무랄 것이 없다. 나는 두려워하는 자이든 강한 자이든 어느 누구도 해치지 않는다. 신(身)으로 단속하고 구(口)로 단속하고 의(意)로 단속하는 나의 경우와, 몸이 무너져 죽은 뒤에 좋은 곳, 하늘 세상에 태어날 것인 나의 경우의 양면으로 좋은 것을 잡은 자이다.'라고. 그에게 환희가 생긴다. 환희하는 자에게 희열이 생긴다. 의(意)의 희열이 있으면 몸은 진정된다. 진정된 몸은 행복을 느낀다. 행복한 자의 심(心)은 삼매에 들어진다. 촌장이여, 이것이 법(法)의 삼매이다. 거기서 만약 그대가 심(心)의 삼매를 얻을 수 있으면 이렇게 그대는 이 불확실한 법을 버릴 수 있을 것이다.
⇒ 각기 다른 성향을 가진 네 명의 사문-바라문 존자들의 주장과 견해에 대해 자(自)-비(鼻)-희(喜)-사(思) 사무량심의 경우로 반복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