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uṇṇābhabrāhmaṇasuttaṃ (SN 51.15-운나바 바라문 경)
2. pāsādakampanavaggo, 5. uṇṇābhabrāhmaṇasuttaṃ (SN 51.15-운나바 바라문 경)
• chanda – 관심(關心) (명사) 어떤 것에 마음이 끌려 주의를 기울임. 또는 그런 마음이나 주의.<표준국어대사전>
이렇게 나는 들었다. ― 한때 아난다 존자가 꼬삼비에서 고시따 사원에 머물렀다. 그때 운나바 바라문이 아난다 존자에게 왔다. 와서는 아난다 존자와 함께 인사를 나누었다. 유쾌하고 기억할만한 이야기를 주고받은 뒤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운나바 바라문은 아난다 존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 “아난다 존자여, 어떤 목적 때문에 사문 고따마에게서 범행(梵行)의 삶을 삽니까?” “바라문이여, 관심(關心)를 버림을 목적으로 세존에게서 범행의 삶을 삽니다.”
“아난다 존자여, 그 관심의 버림을 위한 길이 있고 실천이 있습니까?” “바라문이여, 그 관심의 버림을 위한 길이 있고 실천이 있습니다.”
“그 관심의 버림을 위한 길은 무엇이고 실천은 무엇입니까?” “여기, 바라문이여, 비구는 관심의 삼매와 노력의 행(行)을 갖춘 여의족(如意足)을 닦습니다. 정진의 삼매 … 심(心)의 삼매 … 관찰의 삼매와 노력의 행(行)을 갖춘 여의족(如意足)을 닦습니다. ― 바라문이여, 이것이 그 관심의 버림을 위한 길이고, 이것이 실천입니다.”
“아난다 존자여, 이런 경우에서는 ‘끝이 있다. 끝이 없는 것이 아니다. 관심으로 관심을 버릴 것이다.’라는 경우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바라문이여, 여기서 그것에 대해 되묻겠습니다. 그대에게 괜찮다면 그것을 설명하십시오. 그것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바라문이여, 그대에게 이전에 ‘나는 공원에 갈 것이다.’라는 관심이 있었습니까? 공원에 도착한 그대에게 그것에서 생긴 관심은 진정되었습니까?” “그렇습니다, 존자여.” “바라문이여, 그대에게 이전에 ‘나는 공원에 갈 것이다.’라는 정진이 있었습니까? 공원에 도착한 그대에게 그것에서 생긴 정진은 진정되었습니까?” “그렇습니다, 존자여.” “바라문이여, 그대에게 이전에 ‘나는 공원에 갈 것이다.’라는 심(心)이 있었습니까? 공원에 도착한 그대에게 그것에서 생긴 심(心)은 진정되었습니까?” “그렇습니다, 존자여.” “바라문이여, 그대에게 이전에 ‘나는 공원에 갈 것이다.’라는 관찰이 있었습니까? 공원에 도착한 그대에게 그것에서 생긴 관찰은 진정되었습니까?” “그렇습니다, 존자여.”
“이처럼, 바라문이여, 번뇌가 다했고 삶을 완성했으며 해야 할 바를 했고 짐을 내려놓았으며 최고의 선(善)을 성취했고 존재의 족쇄를 완전히 부수었으며 바른 무위의 앎으로 해탈한 아라한인 비구에게 이전에는 아라한의 성취를 위한 관심이 있었습니다. 아라한을 성취하였을 때 그것에서 생긴 관심은 진정됩니다. 이전에는 아라한의 성취를 위한 정진이 있었습니다. 아라한을 성취하였을 때 그것에서 생긴 정진은 진정됩니다. 이전에는 아라한의 성취를 위한 심(心)이 있었습니다. 아라한을 성취하였을 때 그것에서 생긴 심(心)은 진정됩니다. 이전에는 아라한의 성취를 위한 관찰이 있었습니다. 아라한을 성취하였을 때 그것에서 생긴 관찰은 진정됩니다. 그것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바라문이여, 이렇게 이 런 경우에 끝이 있습니까, 아니면 끝이 없습니까?”
“참으로, 아난다 존자여, 이런 경우에는 끝이 있습니다. 끝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 기쁩니다, 아난다 존자시여, 정말 기쁩니다. 아난다 존자시여! 예를 들면, 아난다 존자시여, 넘어진 자를 일으킬 것입니다. 덮여있는 것을 걷어낼 것입니다. 길 잃은 자에게 길을 알려줄 것입니다. ‘눈 있는 자들은 모습들을 본다.’라며 어둠 속에서 기름 등불을 들 것입니다. 이처럼 아난다 존자에 의해서 여러 가지 방법으로 설해진 법이 있습니다. 아난다 존자여, 이이런 저는 의지처인 고따마 존자 그리고 가르침과 비구 상가에게로 갑니다. 고따마 존자께서는 저를 오늘부터 살아있는 동안 귀의한 남신자로 받아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