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samacittavaggo (AN 2.33-42-평정한 심(心) 품) 전체
1. paṭhamapaṇṇāsakaṃ, 4. samacittavaggo (AN 2.33-42-평정한 심(心) 품)
“비구들이여, 그대들에게 고결하지 못한 사람의 영역과 고결한 사람의 영역을 설할 것이다. 그것을 듣고 잘 사고하라. 나는 말하겠다.” “알겠습니다, 대덕이시여.”라고 그 비구들은 세존에게 대답했다. 세존은 이렇게 말했다. ―
• kataññū: grateful; obliging. (adj.) 고마워하는. 감사하는. 도와주는. 친절한. 은혜를 아는.
• kataññū : kata-ññū
kata ― [pp. of karoti] done, worked, made.
°ñū(ññū) ― ①아는. ②아는 사람. 식자(識者). 지자(知者)
“비구들이여, 무엇이 고결하지 못한 사람의 영역인가? 비구들이여, 고결하지 못한 사람은 만들어진 것을 알지 못하고, 만들어진 것을 경험하지 못한다. 비구들이여, 만들어진 것을 알지 못하는 것과 만들어진 것을 경험하지 못하는 것을 배우는 것은 저속하다. 만들어진 것을 알지 못하는 것과 만들어진 것을 경험하지 못하는 것이 전적으로 고결하지 못한 사람의 영역이다. 비구들이여, 고결한 사람은 만들어진 것을 알고, 만들어진 것을 경험한다. 비구들이여, 만들어진 것을 아는 것과 만들어진 것을 경험하는 것을 배우는 것은 고상하다. 만들어진 것을 아는 것과 만들어진 것을 경험하는 것이 전적으로 고결한 사람의 영역이다.”
• 고결한 사람(sappurisa)과 고결하지 못한 사람(asappurisa)의 정의 ← ‘잘배운 성스러운 제자’와 ‘배우지 못한 범부’
비구들이여, 나는 두 사람에게 쉽게 보상하는[은혜를 갚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어떤 두 사람에게인가? 어머니와 아버지이다. 비구들이여, 백 년의 수명을 가지고 백 년을 사는 사람이 한쪽 어깨에 어머니를 모시고, 한쪽 어깨에 아버지를 모시고, 두 분에게 향수를 뿌려드리고 머리를 감겨드리고 안마를 해드리고 사지를 주물러드리면서 모신다고 해도, 그리고 두 분이 거기 어깨 위에서 똥오줌을 싼다고 해도, 그러나 비구들이여, 어머니와 아버지를 위하여 행한 바거나 어머니와 아버지를 위한 보상이 되지 못한다. 그리고 비구들이여, 어머니와 아버지를 붉은 보석으로 가득한 이 대지의 통치권을 가진 왕위에 모신다고 해도, 그러나 비구들이여, 어머니와 아버지를 위하여 행한 바거나 어머니와 아버지를 위한 보상이 되지 못한다. 그 원인은 무엇인가? 비구들이여, 어머니와 아버지는 자식들을 돌보고, 양육하고, 이 세상을 가르쳐주는 등 많은 일을 한다. 그러나 비구들이여, 어떤 사람이 믿음이 없는 어머니와 아버지에게 믿음을 갖추도록 부추기고, 서게 하고, 확고하게 한다. 계(戒)를 경시하는 어머니와 아버지에게 계(戒)를 갖추도록 부추기고, 서게 하고, 확고하게 한다. 인색한 어머니와 아버지에게 보시(布施)를 갖추도록 부추기고 서게 하고 확고하게 한다. 지혜롭지 못한 어머니와 아버지에게 지혜를 갖추도록 부추기고 서게 하고 확고하게 한다. 이렇게 하는 것은, 비구들이여, 어머니와 아버지를 위하여 행한 바이고, 어머니와 아버지를 위한 보상[은혜 갚음]이 된다.
• kiṃvādī kimakkhāyī ― (MN 18-꿀 과자 경)/(MN 126-부미자 경)/(SN 12.24-외도 경)/(SN 12.25-부미자 경)/(SN 12.26-우빠와나 경)/(SN 22.2-데와다하 경)
어떤 바라문이 세존에게 왔다. 와서는 세존과 함께 인사를 나누었다. 유쾌하고 기억할만한 이야기를 주고받은 뒤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그 바라문은 세존에게 이렇게 말했다. ― “고따마 존자는 무엇을 말하는 분이며 무엇을 가르치는 분입니까?”라고. “바라문이여, 나는 결실 있음을 말하는 사람이고, 결실 없음을 말하는 사람입니다.” “그것과 관련해서 고따마 존자는 어떻게 결실 있음을 말하고, 결실 없음을 말합니까?”
“바라문이여, 나는 몸의 나쁜 행위와 말의 나쁜 행위와 의(意)의 나쁜 행위에 대해 결실 없음을 말합니다. 다양한 악한 불선법들에 대해 결실 없음을 나는 말합니다. 그리고 바라문이여, 나는 몸의 좋은 행위와 말의 좋은 행위와 의(意)의 좋은 행위에 대해 결실 있음을 말합니다. 다양한 선법들에 대해 결실 있음을 나는 말합니다. 이렇게, 바라문이여, 나는 결실 있음을 말하는 사람이고, 결실 없음을 말하는 사람입니다.”
“정말 기쁩니다, 고따마 존자시여. 정말 기쁩니다, 고따마 존자시여! 예를 들면, 고따마 존자시여, 넘어진 자를 일으킬 것입니다. 덮여있는 것을 걷어낼 것입니다. 길 잃은 자에게 길을 알려줄 것입니다. ‘눈 있는 자들은 모습들을 본다.’라며 어둠 속에서 기름 등불을 들 것입니다. 이처럼, 고따마 존자에 의해서 여러 가지 방법으로 설해진 법이 있습니다. 이런 저는 의지처인 고따마 존자 그리고 가르침과 비구 상가에게로 갑니다. 고따마 존자께서는 저를 오늘부터 살아있는 동안 귀의한 남신자로 받아 주십시오.”
그때 아나타삔디까 장자가 세존에게 왔다. 와서는 세존에게 절한 뒤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아나타삔디까 장자는 세존에게 이렇게 말했다. ― “대덕이시여, 세상에는 보시받을만한 분들이 얼마나 있습니까? 그리고 어디에 보시해야 합니까?” “장자여, 세상에는 유학(有學)과 무학(無學)의 두 가지 보시받을만한 분들이 있다. 장자여, 이런 두 가지 보시받을만한 분들이 있다. 여기에 보시해야 한다.”
세존은 이렇게 말했다. 스승이신 선서(善逝)는 이렇게 말한 뒤에 다시 이렇게 말했다. ㅡ
“sekho asekho ca imasmiṃ loke,
āhuneyyā yajamānānaṃ honti.
te ujjubhūtā kāyena, vācāya uda cetasā.
khettaṃ taṃ yajamānānaṃ, ettha dinnaṃ mahapphalan”ti.
“이 세상에 있는 유학(有學)과 무학(無學)이
제사를 지내는 사람을 위한 공양받을만한 분들이다.
몸과 말과 심(心)으로 올곧은 그 존재들이
제사를 지내는 사람을 위한 그 밭이다. 여기에 보시한 것은 큰 결실이 있다.”
이렇게 나는 들었다. 한때 세존은 사왓티에서 제따와나의 아나타삔디까 사원에 머물렀다. 그때 사리뿟따 존자는 사왓티에서 동쪽 사원의 미가라마뚜 강당에 머물렀다. 거기서 사리뿟따 존자는 “도반 비구들이여.”라고 비구들을 불렀다. “도반이여.”라고 그 비구들은 사리뿟따 존자에게 대답했다. 사리뿟따 존자는 이렇게 말했다. ― “나는 안의 족쇄와 밖의 족쇄에 묶인 사람을 설할 것입니다. 그것을 듣고 잘 사고하십시오. 나는 말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도반이여.”라고 그 비구들은 사리뿟따 존자에게 대답했다. 사리뿟따 존자는 이렇게 말했다. ―
“도반들이여, 무엇이 안의 족쇄에 묶인 사람입니까? 여기, 도반들이여, 비구는 계(戒)를 중시합니다. 계목(戒目)의 단속으로 단속하고, 행동의 영역을 갖추어 작은 결점에 대해서도 두려움을 보면서 머뭅니다. 받아들인 뒤 학습 계목들 위에서 공부합니다. 그는 몸이 무너져 죽은 뒤 어떤 신들의 무리에 태어납니다. 거기서 죽은 그는 돌아오는 자여서 이 세상으로 옵니다. 이것이, 도반들이여, 안의 족쇄에 묶인 사람은 돌아오는 자여서 이 세상으로 온다고 불립니다.
도반들이여, 무엇이 밖의 족쇄에 묶인 사람입니까? 여기, 도반들이여, 비구는 계(戒)를 중시합니다. 계목(戒目)의 단속으로 단속하고, 행동의 영역을 갖추어 작은 결점에 대해서도 두려움을 보면서 머뭅니다. 받아들인 뒤 학습 계목들 위에서 공부합니다. 그는 어떤 평화로운 심해탈(心解脫)을 성취하여 머뭅니다. 그는 몸이 무너져 죽은 뒤 어떤 신들의 무리에 태어납니다. 거기서 죽은 그는 돌아오지 않는 자여서 이 세상으로 오지 않습니다. 이것이, 도반들이여, 밖의 족쇄에 묶인 사람은 돌아오지 않는 자여서 이 세상으로 오지 않는다고 불립니다.
다시 도반들이여, 비구는 계(戒)를 중시합니다. 계목(戒目)의 단속으로 단속하고, 행동의 영역을 갖추어 작은 결점에 대해서도 두려움을 보면서 머뭅니다. 받아들인 뒤 학습 계목들 위에서 공부합니다. 그는 소유의 삶의 염오(厭惡)-이탐(離貪)-소멸(消滅)을 위해 실천합니다. 그는 존재들의 염오(厭惡)-이탐(離貪)-소멸(消滅)을 위해 실천합니다. 그는 애(愛)의 부서짐을 위해 실천합니다. 그는 망(望)의 부서짐을 위해 실천합니다. 그는 몸이 무너져 죽은 뒤 어떤 신들의 무리에 태어납니다. 거기서 죽은 그는 돌아오지 않는 자여서 이 세상으로 오지 않습니다. 이것이, 도반들이여, 밖의 족쇄에 묶인 사람은 돌아오지 않는 자여서 이 세상으로 오지 않는다고 불립니다.
그때 많은 평정한 심(心)을 가진 신(神)들이 세존에게 왔다. 와서는 세존에게 절한 뒤 한 곁에 섰다. 한 곁에 선 그 신들은 세존에게 이렇게 말했다. ― “대덕이시여, 사리뿟따 존자가 동쪽 사원의 미가라마뚜 강당에서 비구들에게 안의 족쇄와 밖의 족쇄에 묶인 사람에 대해 설하고 있습니다. 대덕이시여, 대중들은 기뻐하고 있습니다. 대덕이시여, 세존께서 연민하셔서 사리뿟따 존자에게 가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러자 세존은 ― 예를 들면 힘센 사람이 접은 팔을 펴거나 편 팔을 접을 것이다. 이처럼 ― 제따와나에서 사라져 동쪽 사원의 미가라마뚜 강당에 있는 사리뿟따 존자의 앞에 나타났다. 세존은 준비된 자리에 앉았다. 사리뿟따 존자도 세존에게 절한 뒤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사리뿟따 존자에게 세존은 이렇게 말했다. ―
“여기, 사리뿟따여, 많은 평정한 심(心)을 가진 신(神)들이 나에게 왔다. 와서는 나에게 절한 뒤 한 곁에 섰다. 사리뿟따여, 한 곁에 선 그 신들은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 ‘대덕이시여, 사리뿟따 존자가 동쪽 사원의 미가라마뚜 강당에서 비구들에게 안의 족쇄와 밖의 족쇄에 묶인 사람에 대해 설하고 있습니다. 대덕이시여, 대중들은 기뻐하고 있습니다. 대덕이시여, 세존께서 연민하셔서 사리뿟따 존자에게 가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라고. 사리뿟따여, 그 신들은 열 명도, 스무 명도, 서른 명도, 마흔 명도, 쉰 명도, 예순 명도 있으면서 바늘 하나의 점이 꿰뚫는 만큼에 서 있지만 서로 간에 거슬리게 하지 않는다. 사리뿟따여, ‘참으로 거기에서 그 신들은 심(心)을 닦았기 때문에 그 신들은 열 명도, 스무 명도, 서른 명도, 마흔 명도, 쉰 명도, 예순 명도 있으면서 바늘 하나의 점이 꿰뚫는 만큼에 서 있지만 서로 간에 거슬리게 하지 않는다.’라는 생각이 들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리뿟따여, 그것을 그렇게 보지 않아야 한다. 사리뿟따여, 참으로 여기에서 그 신들은 심(心)을 닦았기 때문에 그 신들은 열 명도, 스무 명도, 서른 명도, 마흔 명도, 쉰 명도, 예순 명도 있으면서 바늘 하나의 점이 꿰뚫는 만큼에 서 있지만 서로 간에 거슬리게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사리뿟따여, 이렇게 공부해야 한다. ― ‘기능들의 평화가 있을 것이고, 의(意)의 평화가 있을 것이다.’라고. 사리뿟따여, 참으로 이렇게 공부해야 한다. 사리뿟따여, 기능들의 평화가 있고 의(意)의 평화가 있는 그대들에게 신업(身業)이 평화로울 것이고, 구업(口業)이 평화로울 것이고, 의업(意業)이 평화로울 것이다. ‘우리는 동료수행자들에 대해 평화로움을 선물할 것이다.’라고, 사리뿟따여, 그대들은 이렇게 공부해야 한다. 사리뿟따여, 외도 유행승들은 이 법문을 듣지 못했다고 나는 들었다.
이렇게 나는 들었다. ― 한때 마하깟짜나 존자는 와라나에서 밧다사리 강둑에 머물렀다. 그때 아라마단다 바라문이 마하깟짜나 존자에게 왔다. 와서는 마하깟짜나 존자와 함께 인사를 나누었다. 유쾌하고 기억할만한 이야기를 주고받은 뒤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아라마단다 바라문은 마하깟짜나 존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 “깟짜나 존자여, 어떤 원인, 어떤 조건 때문에 끄샤뜨리야들도 끄샤뜨리야들과 싸우고, 바라문들도 바라문들과 싸우고, 장자들도 장자들과 싸웁니까?” “바라문이여, 욕탐(慾貪)의 성향의 속박과 이기심의 선입감의 묶임을 원인으로 끄샤뜨리야들도 끄샤뜨리야들과 싸우고, 바라문들도 바라문들과 싸우고, 장자들도 장자들과 싸웁니다.”
“깟짜나 존자여, 어떤 원인, 어떤 조건 때문에 사문들도 사문들과 싸웁니까?” “바라문이여, 견해의 탐(貪)의 성향의 속박과 이기심의 선입감의 묶임을 원인으로 사문들도 사문들과 싸웁니다.”
“깟짜나 존자여, 세상에 이런 욕탐(慾貪)의 성향의 속박과 이기심의 선입감의 묶임을 넘어서고, 이런 견해의 탐(貪)의 성향의 속박과 이기심의 선입감의 묶임을 넘어선 사람이 누구라도 있습니까?” “바라문이여, 세상에 이런 욕탐(慾貪)의 성향의 속박과 이기심의 선입감의 묶임을 넘어서고, 이런 견해의 탐(貪)의 성향의 속박과 이기심의 선입감의 묶임을 넘어선 사람이 있습니다.”
“깟짜나 존자여, 세상에 이런 욕탐(慾貪)의 성향의 속박과 이기심의 선입감의 묶임을 넘어서고, 이런 견해의 탐(貪)의 성향의 속박과 이기심의 선입감의 묶임을 넘어선 사람이 누구입니까?” “바라문이여, 나라의 동쪽에 사왓티라는 도시가 있습니다. 지금 거기에 세존-아라한-정등각께서 머뭅니다. 바라문이여, 참으로 그가 세상에 이런 욕탐(慾貪)의 성향의 속박과 이기심의 선입감의 묶임을 넘어서고, 이런 견해의 탐(貪)의 성향의 속박과 이기심의 선입감의 묶임을 넘어선 사람입니다.”
이렇게 말하자 아라마난다 바라문은 자리에서 일어나 윗옷을 한쪽 어깨가 드러나게 입고, 오른쪽 무릎을 땅에 붙이고, 세존에게 합장한 뒤 세 번 감흥을 읊었다. ―
“이런 욕탐(慾貪)의 성향의 속박과 이기심의 선입감의 묶임을 넘어서고, 이런 견해의 탐(貪)의 성향의 속박과 이기심의 선입감의 묶임을 넘어선, 그분, 세존-아라한-정등각께 절합니다. 그분, 세존-아라한-정등각께 절합니다. 그분, 세존-아라한-정등각께 절합니다.”
“정말 기쁩니다, 깟짜나 존자시여, 정말 기쁩니다. 예를 들면, 깟짜나 존자시여, 넘어진 자를 일으킬 것입니다. 덮여있는 것을 걷어낼 것입니다. 길 잃은 자에게 길을 알려줄 것입니다. ‘눈 있는 자들은 모습들을 본다.’라며 어둠 속에서 기름 등불을 들 것입니다. 이처럼, 깟짜나 존자에 의해서 여러 가지 방법으로 설해진 법이 있습니다. 깟짜나 존자시여, 이런 저는 의지처인 그분 고따마 존자 그리고 가르침과 비구 상가에게로 갑니다. 고따마 존자께서는 저를 오늘부터 살아 있는 동안 귀의한 남신자로 받아 주십시오."
한때 마하깟짜나 존자는 마두라에서 군다 숲에 머물렀다. 그때 깐다라야마 바라문이 마하깟짜나 존자에게 왔다. 와서는 마하깟짜나 존자와 함께 인사를 나누었다. 유쾌하고 기억할만한 이야기를 주고받은 뒤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깐다라야나 바라문이 마하깟짜나 존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 “나는 이렇게 들었습니다, 깟짜나 존자여, ‘사문 깟짜나는 늙고 연로하고 노쇠하고 수명의 절반을 지나 노년에 이른 바라문들에게 절을 하지도 않고 일어나 맞이하지도 않고 자리를 권하지도 않는다.’라고 들었습니다. 깟짜나 존자여, 그것이 사실입니까? 참으로 깟짜나 존자는 늙고 연로하고 노쇠하고 수명의 절반을 지나 노년에 이른 바라문들에게 절을 하지도 않고 일어나 맞이하지도 않고 자리를 권하지도 않습니까? 깟짜나 존자여, 그렇다면 그것은 바른 실천이 아닙니다.”라고.
(*) PTS본에는 없음. 그래서 ‘so bālo therotveva saṅkhaṃ gacchati 그는 어리석은 장로라는 이름을 얻는다’라고 번역됨.
― sankhā (f.) & sankhyā 두 단어는 구별 없이 여러 곳에서 나타남.
; (AN 4.22-우루웰라 경2)와 비교 ―어리석은 장로/현명한 장로
“바라문이여, 그분, 아시는 분, 보시는 분, 세존-아라한-정등각께서 설하신 늙음에 대한 관점과 젊음에 대한 관점이 있습니다. 만약, 비구들이여, 80세거나 90세거나 100세의 연로한 사람이 있는데, 그가 소유의 삶을 즐기고, 소유의 삶으로 살고, 소유의 열기로 불타고, 떠오르는 소유의 생각에 의해 삼켜지고, 열심히 소유를 추구합니다. 그러면 그 어리석은 자는 장로라는 이름을 얻지 못합니다. 만약, 비구들이여, 검은 머리의 소년이고 상서로운 젊음을 갖춘 초년기의 젊은이가 있는데, 그가 소유의 삶을 즐기지 않고, 소유의 삶으로 살지 않고, 소유의 열기로 불타지 않고, 떠오르는 소유의 생각에 의해 삼켜지지 않고, 열심히 소유를 추구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 현명한 자는 장로라는 이름을 얻습니다.
이렇게 말했을 때, 깐다라야나 바라문은 자리에서 일어나 윗옷을 한쪽 어깨가 드러나게 입고서 젊은 비구의 발에 머리 숙여 존경을 표했다. ― “존자께서 어른이고, 어른의 관점에 서 있습니다. 저희는 어리고, 어린 사람의 관점에 서 있습니다.”라고.
“정말 기쁩니다, 깟짜나 존자시여, 정말 기쁩니다. 예를 들면, 깟짜나 존자시여, 넘어진 자를 일으킬 것입니다. 덮여있는 것을 걷어낼 것입니다. 길 잃은 자에게 길을 알려줄 것입니다. ‘눈 있는 자들은 모습들을 본다.’라며 어둠 속에서 기름 등불을 들 것입니다. 이처럼, 깟짜나 존자에 의해서 여러 가지 방법으로 설해진 법이 있습니다. 깟짜나 존자시여, 이런 저는 의지처인 그분 고따마 존자 그리고 가르침과 비구 상가에게로 갑니다. 고따마 존자께서는 저를 오늘부터 살아 있는 동안 귀의한 남신자로 받아 주십시오."
”비구들이여, 도둑들이 힘 있을 때 왕들은 힘이 없다. 그때, 비구들이여, 왕은 들어오거나 나가거나 변방 지역을 방문하는 것이 편치 못하다. 그때 바라문과 장자들도 들어오거나 나가거나 변방 지역을 방문하는 것이 편치 못하다. 이처럼, 비구들이여, 악한 비구들이 힘 있을 때 바르게 행동하는 비구는 힘이 없다. 그때, 비구들이여, 바르게 행동하는 비구는 상가 가운데에서 거듭 침묵하며 약해지고, 변방 지역에 머문다. 이것은, 비구들이여, 많은 사람의 불익과 많은 사람의 불행과 많은 사람의 쇠락을 위한 것이고, 신과 인간의 불익과 고통을 위한 것이다.
비구들이여, 왕들이 힘 있을 때 도둑들은 힘이 없다. 그때, 비구들이여, 왕은 들어오거나 나가거나 변방 지역을 방문하는 것이 편하다. 그때 바라문과 장자들도 들어오거나 나가거나 변방 지역을 방문하는 것이 편하다. 이처럼, 비구들이여, 바르게 행동하는 비구들이 힘 있을 때 악한 비구는 힘이 없다. 그때, 비구들이여, 악한 비구는 상가 가운데에서 거듭 침묵하며 약해지고, 그래서 떠나간다. 이것은, 비구들이여, 많은 사람의 이익과 많은 사람의 행복과 많은 사람의 번영을 위한 것이고, 신과 인간의 이익과 행복을 위한 것이다.
비구들이여, 나는 재가자거나 출가자의 둘에 속한 삿된 실천을 칭찬하지 않는다. 재가자거나 출가자거나 삿되게 실천하는 자는 삿된 실천으로 인한 사건을 원인으로 방법이 되는 선법(善法)을 성취하지 못한다.
비구들이여, 나는 재가자거나 출가자의 둘에 속한 바른 실천을 칭찬한다. 재가자거나 출가자거나 바르게 실천하는 자는 바른 실천으로 인한 사건을 원인으로 방법이 되는 선법(善法)을 성취한다.
• patirūpaka: resembling; disguised as; in the appearance of; imposter. (adj.)
비구들이여, 문자의 유사성/표현성 때문에 경을 잘못 해석함으로써 의미와 법을 반대로 이끄는 비구는 많은 사람의 불익과 많은 사람의 불행과 많은 사람의 쇠락을 위한 사람이고, 신과 인간의 불익과 고통을 위한 사람이다. 비구들이여, 그 비구들은 많은 악덕을 쌓고, 이 정법을 사라지게 한다.
[초기불전연구원] ”비구들이여, [어떤] 비구들은 경의 자구(字句)들을 잘못 파악하여 의미(주석서)와 법(삼장)을 거스른다.“
[한국빠알리성전협회] ”수행승들이여, 수행승들이 말마디를 일치시키지만 잘못 파악된 법문을 통해서 본래의 의미와 가르침을 거스른다면, ~
[bhikkhu bodhi] “Bhikkhus, those bhikkhus who exclude the meaning and the Dhamma by means of badly acquired discourses whose phrasing is semblance [of the correct phrasing] are ~
비구들이여, 문자의 유사성에서 경을 바르게 해석함으로써 의미와 법을 일치로 이끄는 비구는 많은 사람의 이익과 많은 사람의 행복과 많은 사람의 번영을 위한 사람이고, 신과 인간의 이익과 행복을 위한 사람이다. 비구들이여, 그 비구들은 많은 공덕을 쌓고, 이 정법을 지속하게 한다.
samacittavaggo catutt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