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nidānasuttaṃ (AN 3.34-인연 경)
4. devadūtavaggo, 4. nidānasuttaṃ (AN 3.34-인연 경)
비구들이여, 업(業)들의 자라남을 위한 이런 세 가지 인연이 있다. 어떤 세 가지인가? 망(望)이 업(業)들의 자라남을 위한 인연이다. 진(嗔)이 업(業)들의 자라남을 위한 인연이다. 치(癡)가 업(業)들의 자라남을 위한 인연이다.
비구들이여, 망(望)으로 지었고 망(望)에서 생겼고 망(望)이 인연이고 망(望)에서 자라난 업(業)은 자기 존재가 생겨나는 곳에서 익는다. 그 업이 익는 곳에서 그 업의 보(報)를 경험한다. 지금여기[금생(今生)]거나 걸어서 닿는 곳[내생(來生)]이거나 그 후에 오는 생(生)에서.
비구들이여, 진(嗔)으로 지었고 진(嗔)에서 생겼고 진(嗔)이 인연이고 진(嗔)에서 자라난 업(業)은 자기 존재가 생겨나는 곳에서 익는다. 그 업이 익는 곳에서 그 업의 보(報)를 경험한다. 지금여기거나 걸어서 닿는 곳이거나 그 후에 오는 생(生)에서.
비구들이여, 치(癡)로 지었고 치(癡)에서 생겼고 치(癡)가 인연이고 치(癡)에서 자라난 업(業)은 자기 존재가 태어나는 곳에서 익는다. 그 업이 익는 곳에서 그 업의 보(報)를 경험한다. 지금여기거나 걸어서 닿는 곳이거나 그 후에 오는 생(生)에서.
예를 들면, 비구들이여, 깨지지 않았고 썩지 않았고 바람과 열기에 상하지 않았고 씨눈이 잘 유지되었고 안전하게 잘 보관된 씨앗들이 비옥하여 잘 준비된 땅에 심어졌다. 그리고 비가 적절하게 내릴 것이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그 씨앗들은 싹이 트고 자라고 증장하고 풍성하게 될 것이다. 이처럼, 비구들이여, 망(望)으로 지었고 망(望)에서 생겼고 망(望)이 인연이고 망(望)에서 자라난 업(業)은 자기 존재가 태어나는 곳에서 익는다. 그 업이 익는 곳에서 그 업의 보(報)를 경험한다. 지금여기거나 걸어서 닿는 곳이거나 그 후에 오는 생(生)에서.
진(嗔)으로 지었고 진(嗔)에서 생겼고 진(嗔)이 인연이고 진(嗔)에서 자라난 업(業)은 … 치(癡)로 지었고 치(癡)에서 생겼고 치(癡)가 인연이고 치(癡)에서 자라난 업(業)은 자기 존재가 생겨나는 곳에서 익는다. 그 업이 익는 곳에서 그 업의 보(報)를 경험한다. 지금여기거나 걸어서 닿는 곳이거나 그 후에 오는 생(生)에서. 비구들이여, 이러한 업(業)들의 자라남을 위한 세 가지 인연이 있다.
비구들이여, 업(業)들의 자라남을 위한 이런 세 가지 인연이 있다. 어떤 세 가지인가? 무망(無望)이 업(業)들의 자라남을 위한 인연이다. 무진(無嗔)이 업(業)들의 자라남을 위한 인연이다. 무치(無癡)가 업(業)들의 자라남을 위한 인연이다.
망(望)이 없을 때, 비구들이여, 이렇게 무망(無望)으로 지었고 무망(無望)에서 생겼고 무망(無望)이 인연이고 무망(無望)에서 자라난 업(業)은 버려지고 뿌리 뽑히고 윗부분이 잘린 야자수처럼 되고 존재하지 않게 되고 미래에 생겨나지 않는 상태가 된다.
• 망(望)에서 자라난 업(業)[유위(有爲)] → 고(苦)
• 무망(無望)에서 자라난 업(業)[무위(無爲)] → 고멸(苦滅)=락(樂)
진(嗔)이 없을 때, 비구들이여, 이렇게 무진(無嗔)으로 지었고 무진(無嗔)에서 생겼고 무진(無嗔)이 인연이고 무진(無嗔)에서 자라난 업(業)은 버려지고 뿌리 뽑히고 윗부분이 잘린 야자수처럼 되고 존재하지 않게 되고 미래에 생겨나지 않는 상태가 된다.
치(癡)가 없을 때, 비구들이여, 이렇게 무치(無癡)로 지었고 무치(無癡)에서 생겼고 무치(無癡)가 인연이고 무치(無癡)에서 자라난 업(業)은 버려지고 뿌리 뽑히고 윗부분이 잘린 야자수처럼 되고 존재하지 않게 되고 미래에 생겨나지 않는 상태가 된다.
예를 들면, 비구들이여, 깨지지 않았고 썩지 않았고 바람과 열기에 상하지 않았고 씨눈이 잘 유지되었고 안전하게 잘 보관된 씨앗들이 있다. 그것들을 사람이 불로 태울 것이다. 불로 태운 뒤에 재로 만들 것이다. 재로 만든 뒤 강한 바람으로 불거나 강의 강한 흐름에 흘려버릴 것이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그 씨앗들은 뿌리 뽑히고 윗부분이 잘린 야자수처럼 되고 존재하지 않게 되고 미래에 생겨나지 않는 상태가 될 것이다. 이처럼, 비구들이여, 망(望)이 없을 때, 이렇게 무망(無望)으로 지었고 무망(無望)에서 생겼고 무망(無望)이 인연이고 무망(無望)에서 자라난 업(業)은 버려지고 뿌리 뽑히고 윗부분이 잘린 야자수처럼 되고 존재하지 않게 되고 미래에 생겨나지 않는 상태가 된다.
무진(無嗔)으로 지었고 무진(無嗔)에서 생겼고 … 치(癡)가 없을 때, 비구들이여, 이렇게 무치(無癡)로 지었고 무치(無癡)에서 생겼고 무치(無癡)가 인연이고 무치(無癡)에서 자라난 업(業)은 버려지고 뿌리 뽑히고 윗부분이 잘린 야자수처럼 되고 존재하지 않게 되고 미래에 생겨나지 않는 상태가 된다. 비구들이여, 업(業)들의 자라남을 위한 이런 세 가지 인연이 있다.
“lobhajaṃ dosajañceva, mohajañcāpaviddasu.
yaṃ tena pakataṃ kammaṃ, appaṃ vā yadi vā bahuṃ.
idheva taṃ vedaniyaṃ, vatthu aññaṃ na vijjati.
“tasmā lobhañca dosañca, mohajañcāpi viddasu.
vijjaṃ uppādayaṃ bhikkhu, sabbā duggatiyo jahe”ti. catutthaṃ.
어리석은 자는 망(望)에서 생겼고 진(嗔)에서 생겼고 치(癡)에서 생긴 업을 적건 많건 짓는다. 그러므로 현명한 자는 망(望)과 진(嗔)과 치(癡)에서 생긴 것을 오직 여기에서 경험한다. 다른 곳이 아니다. 명(明)을 일으킨 그 비구는 모든 악처를 떠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