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tikaṇṇasuttaṃ (AN 3.59-띠깐나 경)
1. brāhmaṇavaggo, 8. tikaṇṇasuttaṃ (AN 3.59-띠깐나 경)
그때 띠깐나 바라문이 세존에게 왔다. 와서는 세존과 함께 인사를 나누었다. 유쾌하고 기억할 만한 이야기를 주고받은 뒤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띠깐나 바라문은 세존의 앞에서 삼명(三明)을 갖춘 바라문들을 칭찬했다. ― “이렇게도 삼명을 갖춘 바라문이 되고, 저렇게도 삼명을 갖춘 바라문이 됩니다.”라고.
“그것과 관련해서, 바라문이여, 바라문들은 어떻게 바라문들의 삼명(三明)을 선언입니까?” “여기, 고따마 존자여, 바라문은 어머니와 아버지 양쪽으로부터 잘 태어난 순수한 혈통이고, 태생에 관한 토론에서 칠대의 선조까지 멸시당하지 않고, 비난받지 않습니다. 베다를 공부하고, 만뜨라를 전승합니다. 세 가지 베다와 제사어휘와 문자와 어원과 다섯 번째로 역사를 통달했고, 베다의 문장에 숙달됐고, 문법을 알고, 대중철학과 대인상(大人相)에 대해 부족함이 없습니다. 이렇게, 고따마 존자여, 바라문들은 삼명을 선언합니다.”
“바라문이여, 바라문들이 바라문들의 삼명(三明)을 선언하는 것과 성스러운 율(律)에서 삼명(三明)을 갖춘 자가 되는 것은 서로 다릅니다.” “그것과 관련해서, 고따마 존자여, 성스러운 율(律)에서는 어떻게 삼명(三明)을 갖춘 자가 됩니까? 저에게 고따마 존자께서 성스러운 율(律)에서 삼명(三明)을 갖춘 자가 되는 법을 알려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그렇다면, 바라문이여, 듣고 잘 사고 하십시오. 나는 말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존자여.”라고 띠깐나 바라문은 세존에게 대답했다. 세존은 이렇게 말했다. ―
”여기, 바라문이여, 비구는 소유의 삶에서 벗어나고, 불선법(不善法)들에서 벗어나서, 위딱까가 있고 위짜라가 있고 떨침에서 생긴 기쁨과 즐거움의 초선(初禪)을 성취하여 머뭅니다. 위딱까와 위짜라의 가라앉음으로 인해, 안으로 평온함과 마음의 집중된 상태가 되어, 위딱까도 없고 위짜라도 없이, 삼매에서 생긴 기쁨과 즐거움의 제이선(第二禪)을 성취하여 머뭅니다. 기쁨의 바램으로부터 평정하게 머물고, 사띠-삼빠자나 하면서 몸으로 즐거움을 경험합니다. 성인들이 '평정을 가진 자, 사띠를 가진 자, 즐거움에 머무는 자[사념락주(捨念樂住)].'라고 말하는 제삼선(第三禪)을 성취하여 머뭅니다. 즐거움의 버림과 괴로움의 버림으로부터, 이미 만족과 불만들의 줄어듦으로부터, 괴로움도 즐거움도 없고 평정과 청정한 사띠[사념청정(捨念淸淨)]의 제사선(第四禪)을 성취하여 머뭅니다.
그는 이렇게 심(心)이 삼매를 닦고, 청정하고 아주 깨끗하고 침착하고 오염원이 없고 유연하고 준비되고 안정되고 흔들림 없음에 도달했을 때, 이전의 존재 상태에 대한 기억의 앎[전생의 기억의 앎]으로 심(心)을 향하게 하고 기울게 합니다. 그는 여러 이전의 존재 상태[전생]를 기억합니다. 즉 — 한 번의 생, 두 번의 생, 세 번의 생, 네 번의 생, 다섯 번의 생, 열 번의 생, 스무 번의 생, 서른 번의 생, 마흔 번의 생, 쉰 번의 생, 백 번의 생, 천 번의 생, 십만 번의 생, 세계가 줄어드는[진화] 여러 겁, 세계가 자라나는[퇴보] 여러 겁, 세계가 진화하고 퇴보하는 여러 겁을 기억합니다. — ‘이러이러한 곳에서 나는 이런 이름이었고, 이런 종족이었고, 이런 용모였고, 이런 음식을 먹었고, 행복과 괴로움을 이렇게 경험했고, 수명의 한계는 이러했다. 나는 거기에서 죽어 이러이러한 곳에 태어났다. 그곳에서 나는 이런 이름이었고, 이런 종족이었고, 이런 용모였고, 이런 음식을 먹었고, 행복과 괴로움을 이렇게 경험했고, 수명의 한계는 이러했다. 나는 거기에서 죽어 여기에 태어났다.’라고. 이처럼 상태와 함께, 상세한 설명과 함께 여러 이전의 존재 상태[전생]를 기억합니다. 이것이 첫 번째 명(明)을 얻는 것입니다. 방일하지 않고 노력하고 굳세게 머무는 자에게 무명(無明)이 부서지고 명(明)이 생기는 것입니다. 어둠이 부서지고 빛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는 이렇게 심(心)이 삼매를 닦고, 청정하고 아주 깨끗하고 침착하고 오염원이 없고 유연하고 자기 활동성을 회복하고 안정되고 흔들림 없음에 도달했을 때, 죽고 다시 태어남의 앎으로 심(心)을 향하게 하고 기울게 합니다. 그는 청정하고 인간을 넘어선 신성한 눈[천안(天眼)]으로 중생들이 죽고 태어나고, 저열하고 뛰어나고, 잘생기고 못생기고, 좋은 곳[선처(善處)]에 가고 나쁜 곳[악처(惡處)]에 가는 것을 봅니다. 업에 따라서 가는 중생들을 분명히 압니다. — ‘이들은 몸으로 나쁜 삶을 살고 말로 나쁜 삶을 살고 의(意)로 나쁜 삶을 살고, 성자들을 비방하고, 삿된 견해를 가졌고, 사견업(邪見業)을 지었다. 이들은 몸이 무너져 죽은 뒤에 상실과 비탄의 상태, 비참한 존재, 벌 받는 상태, 지옥에 태어났다. 그러나 이들은 몸으로 좋은 삶을 살고 말로 좋은 삶을 살고 의(意)로 좋은 삶을 살고, 성자들을 비방하지 않고, 바른 견해를 지니고, 정견업(正見業)을 지었다. 이들은 몸이 무너져 죽은 뒤에 좋은 곳, 하늘 세상에 태어났다.’라고. 이렇게 그는 청정하고 인간을 넘어선 신성한 눈으로 중생들이 죽고 태어나는 것을 봅니다. 저열하고 뛰어나고, 잘생기고 못생기고, 좋은 곳에 가고 나쁜 곳에 가는 등 업에 따라서 가는 중생들을 분명히 압니다. 바라문이여, 이것이 두 번째 명(明)을 얻는 것입니다. 방일하지 않고 노력하고 굳세게 머무는 자에게 무명(無明)이 부서지고 명(明)이 생기는 것입니다. 어둠이 부서지고 빛이 생긴 것입니다.
그는 이렇게 심(心)이 삼매를 닦고, 청정하고 아주 깨끗하고 침착하고 오염원이 없고 유연하고 준비되고 안정되고 흔들림 없음에 도달했을 때, 번뇌들의 부숨의 앎으로 심(心)을 향하게 하고 기울게 합니다. 그는 ‘이것이 고(苦)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고, ‘이것이 고집(苦集)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고, ‘이것이 고멸(苦滅)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고, ‘이것이 고멸(苦滅)로 이끄는 실천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압니다. ‘이것이 번뇌[루(漏)]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고, ‘이것이 번뇌의 집(集)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고, ‘이것이 번뇌의 멸(滅)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고, ‘이것이 번뇌의 멸(滅)로 이끄는 실천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압니다. 그가 이렇게 알고 이렇게 볼 때 소유의 번뇌[욕루(慾漏)]들로부터도 심(心)이 해탈하고, 존재의 번뇌[유루(有漏)]들로부터도 심(心)이 해탈하고, 무명(無明)의 번뇌[무명루(無明漏)]들로부터도 심(心)이 해탈합니다. ‘해탈했을 때 나는 해탈했다’라는 앎이 있습니다. '태어남은 다했다. 범행은 완성되었다. 해야 할 일을 했다. 다음에는 현재 상태[유(有)]가 되지 않는다.'라고 분명히 압니다. 바라문이여, 이것이 세 번째 명(明)을 얻는 것입니다. 방일하지 않고 노력하고 굳세게 머무는 자에게 무명(無明)이 부서지고 명(明)이 생기는 것입니다. 어둠이 부서지고 빛이 생기는 것입니다.
“anuccāvacasīlassa, nipakassa ca jhāyino.
cittaṃ yassa vasībhūtaṃ, ekaggaṃ susamāhitaṃ.
일관된 계(戒)를 지니고, 신중하게 선(禪)을 닦는 자의
심(心)은 숙달되고 집중되고 잘 삼매를 닦는다.
“taṃ ve tamonudaṃ dhīraṃ, tevijjaṃ maccuhāyinaṃ.
hitaṃ devamanussānaṃ, āhu sabbappahāyinaṃ.
어둠이 밀려나고, 현명하고, 삼명(三明)으로 죽음을 극복하고
신(神)과 인간의 이익을 모두 버린 그에게 사람들은 말한다.
“tīhi vijjāhi sampannaṃ, asammūḷhavihārinaṃ.
buddhaṃ antimadehinaṃ, taṃ namassanti gotamaṃ.
삼명(三明)을 갖춘 분, 혼란 없이 머무는 분
마지막 몸을 가진 그분, 고따마 부처님을 공경합니다.
“pubbenivāsaṃ yo vedī, saggāpāyañca passati.
atho jātikkhayaṃ patto, abhiññāvosito muni.
이전의 존재 상태를 아는 분, 천상과 지옥을 보는 분
그리고 태어남의 부서짐을 성취한 분, 실다운 지혜로 완성한 성자.
“etāhi tīhi vijjāhi, tevijjo hoti brāhmaṇo.
tamahaṃ vadāmi tevijjaṃ, nāññaṃ lapitalāpanan”ti.
이런 세 가지 명(明)에 의해 삼명(三明)을 갖춘 바라문이 된다.
나는 그것을 삼명(三明)을 갖춘 자라고 말하지 거듭 말해진 다른 것이 아니다.
“이렇게, 바라문이여, 성스러운 율(律)에서 삼명(三明)을 갖춘 자가 됩니다.” “고따마 존자여, 바라문들 가운데 삼명을 갖춘 자와 성스러운 율에서 삼명을 갖춘 자는 다릅니다. 이 성스러운 율에서 삼명을 갖춘 자에 비해 바라문들 가운데 삼명을 갖춘 자는 십육 분의 일의 가치도 없습니다.”
정말 기쁩니다, 고따마 존자시여, 정말 기쁩니다. 고따마 존자시여! 예를 들면, 고따마 존자시여, 넘어진 자를 일으킬 것입니다. 덮여있는 것을 걷어낼 것입니다. 길 잃은 자에게 길을 알려줄 것입니다. ‘눈 있는 자들은 모습들을 본다.’라며 어둠 속에서 기름 등불을 들 것입니다. 이처럼, 고따마 존자에 의해서 여러 가지 방법으로 설해진 법이 있습니다. 이런 저는 의지처인 고따마 존자 그리고 가르침과 비구 상가에게로 갑니다. 고따마 존자께서는 저를 오늘부터 살아 있는 동안 귀의한 재가 신자로 받아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