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jāṇussoṇisuttaṃ (AN 3.60-자눗소니 경) ㅡ 바라문의 삼명과 불교의 삼명의 차별된 정의
1. brāhmaṇavaggo, 9. jāṇussoṇisuttaṃ (AN 3.60-자눗소니 경)
자눗소니 바라문이 세존에게 왔다. 와서는 세존과 함께 인사를 나누었다. 유쾌하고 기억할만한 이야기를 주고받은 뒤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자눗소니 바라문은 세존에게 “고따마 존자시여, 제사를 지내거나 조상제사를 지내거나 음식을 담거나 보시할 것이 있는 사람은 삼명(三明)을 갖춘 바라문에게 보시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그것과 관련해서, 바라문이여, 바라문들이 선언하는 삼명(三明)은 무엇입니까?” “여기, 고따마 존자시여, 바라문은 어머니와 아버지 양쪽으로부터 잘 태어난 순수한 혈통이고, 태생에 관한 토론에서 칠대의 선조까지 멸시당하지 않고, 비난받지 않습니다. 베다를 공부하고, 만뜨라를 전승합니다. 세 가지 베다와 제사어휘와 문자와 어원과 다섯 번째로 역사를 통달했고, 베다의 문장에 숙달됐고, 문법을 알고, 대중철학과 대인상(大人相)에 대해 부족함이 없습니다. 이렇게, 고따마 존자시여, 바라문들은 삼명을 선언합니다.”
“바라문이여, 바라문들이 바라문의 삼명을 선언하는 것과 성스러운 율(律)에서의 삼명(三明)을 가진 자는 다릅니다.” “그것과 관련해서, 고따마 존자시여, 성스러운 율에서는 어떻게 삼명을 가진 자가 됩니까? 고따마 존자께서 저에게 성스러운 율에서 삼명을 가진 자가 되는 법을 설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렇다면 바라문이여, 듣고 잘 사고하십시오. 나는 말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존자시여.”라고 자눗소니 바라문은 세존에게 대답했다. 세존은 이렇게 말했다. —
”여기, 바라문이여, 비구는 소유의 삶에서 벗어나고 … 제사선(第四禪)을 성취하여 머뭅니다.
그는 이렇게 심(心)이 삼매를 닦고, 청정하고 아주 깨끗하고 침착하고 오염원이 없고 유연하고 준비되고 안정되고 흔들림 없음에 도달했을 때, 이전의 존재 상태에 대한 기억의 앎[전생의 기억의 앎]으로 심(心)을 향하게 하고 기울게 합니다. 그는 여러 이전의 존재 상태[전생]를 기억합니다. 즉 — 한 번의 생, 두 번의 생, 세 번의 생, 네 번의 생, 다섯 번의 생, 열 번의 생, 스무 번의 생, 서른 번의 생, 마흔 번의 생, 쉰 번의 생, 백 번의 생, 천 번의 생, 십만 번의 생, 세계가 줄어드는[진화] 여러 겁, 세계가 자라나는[퇴보] 여러 겁, 세계가 줄어들고 자라나는 여러 겁을 기억합니다. — ‘이러이러한 곳에서 나는 이런 이름이었고, 이런 종족이었고, 이런 용모였고, 이런 음식을 먹었고, 행복과 괴로움을 이렇게 경험했고, 수명의 한계는 이러했다. 나는 거기에서 죽어 이러이러한 곳에 태어났다. 그곳에서 나는 이런 이름이었고, 이런 종족이었고, 이런 용모였고, 이런 음식을 먹었고, 행복과 괴로움을 이렇게 경험했고, 수명의 한계는 이러했다. 나는 거기에서 죽어 여기에 태어났다.’라고. 이처럼 상태와 함께, 상세한 설명과 함께 여러 이전의 존재 상태를 기억합니다. 이것이 첫 번째 명(明)의 성취입니다. 방일하지 않고 노력하고 단호한 의지를 가지고 머무는 자에게 무명(無明)이 부서지고 명(明)이 생긴 것입니다. 어둠이 부서지고 빛이 생긴 것입니다.
그는 이렇게 심(心)이 삼매를 닦고, 청정하고 아주 깨끗하고 침착하고 오염원이 없고 유연하고 준비되고 안정되고 흔들림 없음에 도달했을 때, 죽고 다시 태어남의 앎으로 심(心)을 향하게 하고 기울게 합니다. 그는 청정하고 인간을 넘어선 신성한 눈[천안(天眼)]으로 중생들이 죽고 태어나고, 저열하고 뛰어나고, 잘생기고 못생기고, 좋은 곳[선처(善處)]에 가고 나쁜 곳[악처(惡處)]에 가는 것을 봅니다. 업에 따라서 가는 중생들을 분명히 압니다. — ‘이들은 몸으로 나쁜 삶을 살고 말로 나쁜 삶을 살고 의(意)로 나쁜 삶을 살고, 성자들을 비방하고, 삿된 견해를 가졌고, 사견업(邪見業)을 지었다. 이들은 몸이 무너져 죽은 뒤에 상실과 비탄의 상태, 비참한 존재, 벌 받는 상태, 지옥에 태어났다. 그러나 이들은 몸으로 좋은 삶을 살고 말로 좋은 삶을 살고 의(意)로 좋은 삶을 살고, 성자들을 비방하지 않고, 바른 견해를 지니고, 정견업(正見業)을 지었다. 이들은 몸이 무너져 죽은 뒤에 좋은 곳, 하늘 세상에 태어났다.’라고. 이렇게 그는 청정하고 인간을 넘어선 신성한 눈으로 중생들이 죽고 태어나는 것을 봅니다. 저열하고 뛰어나고, 잘생기고 못생기고, 좋은 곳에 가고 나쁜 곳에 가는 등 업에 따라서 가는 중생들을 분명히 압니다. 이것이 두 번째 명(明)의 성취입니다. 방일하지 않고 노력하고 단호한 의지를 가지고 머무는 자에게 무명(無明)이 부서지고 명(明)이 생긴 것입니다. 어둠이 부서지고 빛이 생긴 것입니다.
그는 이렇게 심(心)이 삼매를 닦고, 청정하고 아주 깨끗하고 침착하고 오염원이 없고 유연하고 준비되고 안정되고 흔들림 없음에 도달했을 때, 번뇌들의 부서짐의 앎으로 심(心)을 향하게 하고 기울게 합니다. 그는 ‘이것이 고(苦)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압니다. ‘이것이 고집(苦集)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압니다. ‘이것이 고멸(苦滅)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압니다. ‘이것이 고멸(苦滅)로 이끄는 실천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압니다. ‘이것들이 번뇌[루(漏)]들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압니다. ‘이것이 번뇌의 집(集)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압니다. ‘이것이 번뇌의 멸(滅)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압니다. ‘이것이 번뇌의 멸(滅)로 이끄는 실천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압니다. 그가 이렇게 알고 이렇게 볼 때 소유의 번뇌[욕루(慾漏)]로부터도 심(心)이 해탈합니다. 존재의 번뇌[유루(有漏)]로부터도 심(心)이 해탈합니다. 무명(無明)의 번뇌[무명루(無明漏)]로부터도 심(心)이 해탈합니다. ‘해탈했을 때 나는 해탈했다’라는 앎이 있습니다. '태어남은 다했다. 범행은 완성되었다. 해야 할 일을 했다. 다음에는 현재 상태[유(有)]가 되지 않는다.'라고 분명히 압니다. 이것이 세 번째 명(明)의 성취입니다. 방일하지 않고 노력하고 단호한 의지를 가지고 머무는 자에게 무명(無明)이 부서지고 명(明)이 생긴 것입니다. 어둠이 부서지고 빛이 생긴 것입니다.
“yo sīlabbatasampanno, pahitatto samāhito.cittaṃ yassa vasībhūtaṃ, ekaggaṃ susamāhitaṃ.
계와 의식을 갖추고, 단호한 의지를 가지고, 삼매를 닦는 자
그의 심(心)은 숙달되고, 집중되고, 삼매를 잘 닦는다.
“pubbenivāsaṃ yo vedī, saggāpāyañca passati.atho jātikkhayaṃ patto, abhiññāvosito muni.
그는 이전의 존재 상태를 경험하고, 하늘과 지옥을 본다.
그리고 태어남의 부서짐을 성취했고, 실다운 지혜가 완성된 성자이다.
“etāhi tīhi vijjāhi, tevijjo hoti brāhmaṇo.tamahaṃ vadāmi tevijjaṃ, nāññaṃ lapitalāpanan”ti.
이런 삼명에 의해 삼명을 갖춘 바라문이 된다.
그것을 나는 삼명을 갖춘 자라고 말한다. 거듭 말해진 다른 것은 아니다.
이렇게, 바라문이여, 성스러운 율에서 삼명을 가진 자가 됩니다.” “고따마 존자시여, 바라문들 가운데 삼명을 가진 자와 성스러운 율(律)에서의 삼명(三明)을 가진 자는 다릅니다. 고따마 존자시여, 이 성스러운 율에서의 삼명을 가진 자에 비해 바라문들 가운데 삼명을 가진 자는 십육분의 일의 가치도 없습니다.
정말 기쁩니다, 고따마 존자시여. 정말 기쁩니다, 고따마 존자시여! 예를 들면, 고따마 존자시여, 넘어진 자를 일으킬 것입니다. 덮여있는 것을 걷어낼 것입니다. 길 잃은 자에게 길을 알려줄 것입니다. ‘눈 있는 자들은 모습들을 본다.’라며 어둠 속에서 기름 등불을 들 것입니다. 이처럼, 고따마 존자에 의해서 여러 가지 방법으로 설해진 법이 있습니다.이런 저는 의지처인 고따마 존자 그리고 가르침과 비구 상가에게로 갑니다. 고따마 존자께서는 저를 오늘부터 살아있는 동안 귀의한 재가 신자로 받아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