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kesamuttisuttaṃ (AN 3.66-께사무띠 경)[깔라마 경]
2. mahāvaggo, 5. kesamuttisuttaṃ (AN 3.66-께사무띠 경)[깔라마 경]
이렇게 나는 들었다. — 한때 꼬살라에서 큰 비구 상가와 함께 돌아다니면서 살고 있던 세존은 께사무띠라는 깔라마의 번화가에 도착했다. 께사무띠의 깔라마들은 들었다. — “존자들이여, 큰 비구 상가와 함께 꼬살라에서 돌아다니면서 사는, 사꺄의 자손이고 사꺄 가문으로부터 출가한 사문 고따마가 께사무띠에 도착했습니다. 참으로 세존이신 그분 고따마에게는 이런 좋은 명성이 퍼져있습니다. — ’이렇게 그분 세존께서는 모든 번뇌 떠나신 분, … 참으로 그런 아라한을 뵙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라고.
그러자 께사무띠의 깔라마들은 세존에게 왔다. 와서 어떤 사람들은 세존에게 절한 뒤 한 곁에 앉았다. 어떤 사람들은 세존과 함께 인사를 나누었다. 유쾌하고 기억할만한 이야기를 주고받은 뒤 한 곁에 앉았다. 어떤 사람들은 세존에게 합장하여 인사한 뒤 한 곁에 앉았다. 어떤 사람들은 세존의 앞에서 이름과 성을 말하고 한 곁에 앉았다. 어떤 사람은 조용히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그 께사무띠의 깔라마들은 세존에게 이렇게 말했다. —
“대덕이시여, 께사무띠에 오는 어떤 사문-바라문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주장은 설명하고 돋보이게 하면서 남의 주장은 질책하고 멸시하고 무시하고 열등한 것으로 치부합니다. 대덕이시여, 다른 어떤 사문-바라문들도 께사무띠에 옵니다. 그들도 자신의 주장은 설명하고 돋보이게 하면서 남의 주장은 질책하고 멸시하고 무시하고 열등한 것으로 치부합니다. 대덕이시여, 저희에게 그들에 대한 불확실함과 의심이 있습니다. — ‘이 사문-바라문 존자들 가운데 누가 진실을 말하고 누가 거짓을 말하는가?’라고.”
“깔라마들이여, 그대들이 불확실해하는 것은 그럴만하고, 의심스러워하는 것은 그럴만합니다. 불확실함의 경우에 의심이 생기는 것입니다.
• pāṭaliyasuttaṃ (SN 42.13)/kutūhalasālāsuttaṃ (SN 44.9)/kesamuttisuttaṃ (AN 3.66)
깔라마들이여, 전승에 의해, 계승에 의해, 내가 들었다고 해서, 성전의 자료라고 해서, 딱까를 원인으로, 문법적 의미를 원인으로, 온전한 생각 떠오름의 출현에 의해, 견해와 통찰의 지속에 의해, 가능성이 있다고 해서, ‘사문은 우리의 스승이다.’라고 해서 그대들은 오지(받아들이지) 말아야 합니다. 깔라마들이여, 그대들이 스스로 ‘이 법들은 불선(不善)이고, 이 법들은 결점이 있는 것이고, 이 법들은 현명한 자에 의해 질책받는 것이고, 이 법들은 온전히 받아 지니면 불익과 괴로움으로 이끈다.’라고 알게 될 때, 깔라마들이여, 그대들은 버려야 합니다.
깔라마들이여, 이것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사람에게 내적으로 생기는 것인 망(望)은 이익을 위해 생깁니까, 아니면 불익을 위해 생깁니까?”
“불익을 위해 생깁니다, 대덕이시여.”
“깔라마들이여, 열망(熱望)하고, 망(望)에 사로잡히고, 소진(消盡)된 심(心)을 가진 이런 사람은 생명을 해치기도 하고, 주지 않는 것을 가지기도 하고, 남의 아내에게 가기도 하고, 거짓을 말하기도 합니다. 또한, 남에게도 그렇게 하도록 부추깁니다. 이런 그에게 오랫동안 불익과 괴로움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대덕이시여.”
“깔라마들이여, 이것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사람에게 내적으로 생기는 것인 진(嗔)은 이익을 위해 생깁니까, 아니면 불익을 위해 생깁니까?”
“불익을 위해 생깁니다, 대덕이시여.”
“불쾌해하고, 진(嗔)에 사로잡히고, 소진(消盡)된 심(心)을 가진 이런 사람은 생명을 해치기도 하고, 주지 않는 것을 가지기도 하고, 남의 아내에게 가기도 하고, 거짓을 말하기도 합니다. 또한, 남에게도 그렇게 하도록 부추깁니다. 이런 그에게 오랫동안 불익과 괴로움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대덕이시여.”
“깔라마들이여, 이것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사람에게 내적으로 생기는 것인 치(癡)는 이익을 위해 생깁니까, 아니면 불익을 위해 생깁니까?”
“불익을 위해 생깁니다, 대덕이시여.”
“열중하고, 치(癡)에 사로잡히고, 소진(消盡)된 심(心)을 가진 이런 사람은 생명을 해치기도 하고, 주지 않는 것을 가지기도 하고, 남의 아내에게 가기도 하고, 거짓을 말하기도 합니다. 또한, 남에게도 그렇게 하도록 부추깁니다. 이런 그에게 오랫동안 불익과 괴로움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대덕이시여.”
“깔라마들이여, 이것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이 법들은 선(善)입니까, 불선(不善)입니까?”
“불선(不善)입니다, 대덕이시여.”
“결점이 있는 것입니까, 결점이 없는 것입니까?”
“결점이 있는 것입니다, 대덕이시여.”
“현명한 자에 의해 질책받는 것입니까, 현명한 자에 의해 찬양되는 것입니까?”
“현명한 자에 의해 질책받는 것입니다, 대덕이시여.”
“온전히 받아 지니면 불익과 괴로움으로 이끄는 것입니까, 아닙니까? 그대들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대덕이시여, 온전히 받아 지니면 불익과 괴로움으로 이끈다고 저희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깔라마들이여, ‘전승에 의해, 계승에 의해, 내가 들었다고 해서, 성전의 자료라고 해서, 딱까를 원인으로, 문법적 의미를 원인으로, 온전한 생각 떠오름의 출현에 의해, 견해와 통찰의 지속에 의해, 가능성이 있다고 해서, ‘사문은 우리의 스승이다.’라고 해서 그대들은 오지(받아들이지) 말아야 합니다. 깔라마들이여, 그대들이 스스로 ‘이 법들은 불선(不善)이고, 이 법들은 결점이 있는 것이고, 이 법들은 현명한 자에 의해 질책받는 것이고, 이 법들은 온전히 받아 지니면 불익과 괴로움으로 이끈다.’라고 알게 될 때, 깔라마들이여, 그대들은 버려야 합니다.[망(望)-진(嗔)-치(癡)의 법(法)]’라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말한 이것은 이것을 연(緣)하여 말했습니다.
깔라마들이여, ‘전승에 의해, 계승에 의해, 내가 들었다고 해서, 성전의 자료라고 해서, 딱까를 원인으로, 문법적 의미를 원인으로, 온전한 생각 떠오름의 출현에 의해, 견해와 통찰의 지속에 의해, 가능성이 있다고 해서, ‘사문은 우리의 스승이다.’라고 해서 그대들은 오지(받아들이지) 말아야 합니다. 깔라마들이여, 그대들이 스스로 ‘이 법들은 선(善)이고, 이 법들은 결점이 없는 것이고, 이 법들은 현명한 자에 의해 찬양되는 것이고, 이 법들은 온전히 받아 지니면 이익과 즐거움으로 이끈다.’라고 알게 될 때, 깔라마들이여, 그대들은 성취하여 머물러야 합니다.
깔라마들이여, 이것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사람에게 내적으로 생기는 것인 무망(無望)은 이익을 위해 생깁니까, 아니면 불익을 위해 생깁니까?”
“이익을 위해 생깁니다, 대덕이시여.”
“열망(熱望)하지 않고, 망(望)에 사로잡히지 않고, 소진(消盡)되지 않은 심(心)을 가진 이런 사람은 생명을 해치지 않고, 주지 않는 것을 가지지 않고, 남의 아내에게 가지 않고, 거짓을 말하지 않습니다. 또한, 남에게도 그렇게 하지 않도록 부추깁니다. 이런 그에게 오랫동안 이익과 즐거움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대덕이시여.”
“깔라마들이여, 이것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사람에게 내적으로 생기는 것인 무진(無嗔)은 이익을 위해 생깁니까, 아니면 불익을 위해 생깁니까?” … 사람에게 내적으로 생기는 것인 무치(無癡)는 이익을 위해 생깁니까, 아니면 불익을 위해 생깁니까?” … 이런 그에게 오랫동안 이익과 즐거움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대덕이시여.”
“깔라마들이여, 이것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이 법들은 선(善)입니까, 불선(不善)입니까?”
“선(善)입니다, 대덕이시여.”
“결점이 있는 것입니까, 결점이 없는 것입니까?”
“결점이 없는 것입니다, 대덕이시여.”
“현명한 자에 의해 질책받는 것입니까, 현명한 자에 의해 찬양되는 것입니까?”
“현명한 자에 의해 찬양되는 것입니다, 대덕이시여.”
“온전히 받아 지니면 이익과 즐거움으로 이끄는 것입니까, 아닙니까? 그대들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대덕이시여, 온전히 받아 지니면 이익과 즐거움으로 이끕니다. 저희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깔라마들이여, ‘전승에 의해, 계승에 의해, 내가 들었다고 해서, 성전의 자료라고 해서, 딱까를 원인으로, 문법적 의미를 원인으로, 온전한 생각 떠오름의 출현에 의해, 견해와 통찰의 지속에 의해, 가능성이 있다고 해서, ‘사문은 우리의 스승이다.’라고 해서 그대들은 오지(받아들이지) 말아야 합니다. 깔라마들이여, 그대들이 스스로 ‘이 법들은 선(善)이고, 이 법들은 결점이 없는 것이고, 이 법들은 현명한 자에 의해 찬양되는 것이고, 이 법들은 온전히 받아 지니면 이익과 즐거움으로 이끈다.’라고 알게 될 때, 깔라마들이여, 그대들은 성취하여 머물러야 합니다.[무망(無望)-무진(無嗔)-무치(無癡)의 법(法)]’라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말한 이것은 이것을 연(緣)하여 말했습니다.
깔라마들이여, 빈틈없이 알아차리고[밀착된 념(念)], 옳고 그름을 판단하여[정지(正知)] 이렇게 간탐하지 않고, 진에하지 않고, 열중하지 않는 그 성스러운 제자는 자(慈)가 함께한 심(心)으로 한 방향을 두루 미치면서 머뭅니다. 그렇게 두 방향을, 그렇게 세 방향을, 그렇게 네 방향을. 이렇게 위로 아래로 중간방위로, 모든 곳에서 모두에게 펼쳐서 모든 세상을 크고 귀하고 무량한, 원망 없고 거슬림 없는 자(慈)가 함께한 심(心)으로 두루 미치면서 머뭅니다. 비(悲)가 함께한 심(心)으로 … 희(喜)가 함께한 심(心)으로 … 사(捨)가 함께한 심(心)으로 한 방향을 두루 미치면서 머뭅니다. 그렇게 두 방향을, 그렇게 세 방향을, 그렇게 네 방향을. 이렇게 위로 아래로 중간방위로, 모든 곳에서 모두에게 펼쳐서 모든 세상을 크고 귀하고 무량한, 원망 없고 거슬림 없는 사(捨)가 함께한 심(心)으로 두루 미치면서 머뭅니다.
깔라마들이여, 그 성스러운 제자는 이렇게 원망 없는 심(心)을 가졌고, 이렇게 거슬림 없는 심(心)을 가졌고, 오염 없는 심(心)을 가졌고, 이렇게 청정한 심(心)을 가졌습니다. 그는 지금여기에서 네 가지 위안을 얻습니다. ‘만약 저세상이 있고, 선행(善行)과 악행(惡行)의 업들의 과(果)와 보(報)가 있다면, 나는 몸이 무너져 죽은 뒤에 좋은 곳 하늘 세상에 태어날 것이다.’라는 이것이 첫 번째 얻는 위안입니다.
‘만약 저 세상이 없고, 선행(善行)과 악행(惡行)의 업들의 과(果)와 보(報)가 없다면, 나는 지금여기에서 원망 없고, 거슬림 없고, 고통 없고, 행복한 자신을 보호한다.’라는 이것이 두 번째 얻는 위안입니다.
‘만약 행하는 자가 악(惡)을 행한다 해도, 나는 누구에게도 악(惡)을 의도하지 않는다. 악업(惡業)을 행하지 않는 나에게 어디로부터 괴로움이 닿을 것인가?’라는 이것이 세 번째 얻는 위안입니다.
‘만약 행하는 자가 악(惡)을 행하지 않는다면, 그것으로 인해 나는 양면으로 청정한 나를 본다.’라는 이것이 네 번째 얻는 위안입니다.
깔라마들이여, 그 성스러운 제자는 이렇게 원망 없는 심(心)을 가졌고, 이렇게 거슬림 없는 심(心)을 가졌고, 오염 없는 심(心)을 가졌고, 이렇게 청정한 심(心)을 가졌습니다. 그는 지금여기에서 이런 네 가지 위안을 얻습니다.”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그렇습니다, 선서시여! 대덕이시여, 그 성스러운 제자는 이렇게 원망 없는 심(心)을 가졌고, 이렇게 거슬림 없는 심(心)을 가졌고, 오염 없는 심(心)을 가졌고, 이렇게 청정한 심(心)을 가졌습니다. 그는 지금여기에서 네 가지 위안을 얻습니다. ‘만약 저 세상이 있고, 선행(善行)과 악행(惡行)의 업들의 과(果)와 보(報)가 있다면, 나는 몸이 무너져 죽은 뒤에 좋은 곳 하늘 세상에 태어날 것이다.’라는 이것이 첫 번째 얻는 위안입니다.
‘만약 저 세상이 없고, 선행(善行)과 악행(惡行)의 업들의 과(果)와 보(報)가 없다면, 나는 지금여기에서 원망 없고, 거슬림 없고, 고통 없고, 행복한 자신을 보호한다.’라는 이것이 두 번째 얻는 위안입니다.
‘만약 행하는 자가 악(惡)을 행한다 해도, 나는 누구에게도 악(惡)을 의도하지 않는다. 악업(惡業)을 행하지 않는 나에게 어디로부터 괴로움이 닿을 것인가?’라는 이것이 세 번째 얻는 위안입니다.
‘만약 행하는 자가 악(惡)을 행하지 않는다면, 그것으로 인해 나는 양면으로 청정한 나를 본다.’라는 이것이 네 번째 얻는 위안입니다.
대덕이시여, 그 성스러운 제자는 이렇게 원망 없는 심(心)을 가졌고, 이렇게 거슬림 없는 심(心)을 가졌고, 오염 없는 심(心)을 가졌고, 이렇게 청정한 심(心)을 가졌습니다. 그는 지금여기에서 이런 네 가지 위안을 얻습니다.”
정말 기쁩니다, 고따마 존자시여, 정말 기쁩니다. 고따마 존자시여! 예를 들면, 대덕이시여, 넘어진 자를 일으킬 것입니다. 덮여있는 것을 걷어낼 것입니다. 길 잃은 자에게 길을 알려줄 것입니다. ‘눈 있는 자들은 모습들을 본다.’라며 어둠 속에서 기름 등불을 들 것입니다. 이처럼, 세존(世尊)에 의해서 여러 가지 방법으로 설해진 법이 있습니다. 대덕이시여, 저는 의지처인 세존(世尊) 그리고 가르침과 비구 상가에게로 갑니다. 세존(世尊)께서는 저를 오늘부터 살아 있는 동안 귀의한 재가 신자로 받아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