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mahānāmasakkasuttaṃ (AN 3.74-삭까 사람 마하나마 경)
3. ānandavaggo, 3. mahānāmasakkasuttaṃ (AN 3.74-삭까 사람 마하나마 경)
이렇게 나는 들었다. ― 한때 세존은 삭까에서 까삘라왓투의 니그로다 사원에 머물렀다. 그때는 병에서 회복한 세존이 병에서 회복한 지 오래지 않은 때였다. 그런데 삭까 사람 마하나마가 세존에게 왔다. 와서는 세존에게 절한 뒤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삭까 사람 마하나마는 세존에게 이렇게 말했다. ― “대덕이시여, 오랫동안 저는 세존께서 설하신 이런 법을 알고 있습니다. ― ‘앎은 삼매를 닦는 자에게 있다. 삼매를 닦지 않는 자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참으로 대덕이시여, 삼매가 먼저 있고 앎이 나중에 있습니까 아니면 앎이 먼저 있고 삼매가 나중에 있습니까?”라고. 그때 아난다 존자에게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 “병에서 회복한 세존은 병에서 회복한 지 오래되지 않았다. 그런데 이 삭까 사람 마하나마는 세존에게 심오함을 넘어선 것을 여쭌다. 내가 삭까 사람 마하나마를 한 곁으로 이끈 뒤에 법을 설해야겠다.”라고.
아난다 존자는 삭까 사람 마하나마의 손을 잡고서 한 곁으로 이끈 뒤에 삭까 사람 마하나마에게 이렇게 말했다. ― “마하나마여, 세존께서는 유학(有學)의 계(戒)도 말했고. 세존께서는 무학(無學)의 계도 말했습니다. 세존께서는 유학(有學)의 삼매도 말했고. 세존께서는 무학(無學)의 삼매도 말했습니다. 세존께서는 유학(有學)의 지혜도 말했고. 세존께서는 무학(無學)의 지혜도 말했습니다. 그러면 마하나마여, 무엇이 유학의 계입니까? 여기 마하나마여, 비구는 계(戒)를 중시합니다. 계목(戒目)의 단속으로 단속하고, 행동의 영역을 갖추어 작은 결점에 대해서도 두려움을 보면서 머뭅니다. 받아들인 뒤 학습 계목들 위에서 공부합니다. 이것이, 마하나마여, 유학의 계라고 불립니다.
그러면 마하나마여, 무엇이 유학의 삼매입니까? 여기 마하나마여, 비구는 소유의 삶에서 벗어나고, 불선법(不善法)들에서 벗어나서, 위딱까가 있고 위짜라가 있고 떨침에서 생긴 기쁨과 즐거움의 초선(初禪)을 성취하여 머뭅니다. 위딱까와 위짜라의 가라앉음으로 인해, 안으로 평온함과 마음의 집중된 상태가 되어, 위딱까도 없고 위짜라도 없이, 삼매에서 생긴 기쁨과 즐거움의 제이선(第二禪)을 성취하여 머뭅니다. 기쁨의 바램으로부터 평정하게 머물고, 사띠-삼빠자나 하면서 몸으로 즐거움을 경험합니다. 성인들이 '평정을 가진 자, 사띠를 가진 자, 즐거움에 머무는 자[사념락주(捨念樂住)].'라고 말하는 제삼선(第三禪)을 성취하여 머뭅니다. 즐거움의 버림과 괴로움의 버림으로부터, 이미 만족과 불만들의 줄어듦으로부터, 괴로움도 즐거움도 없고 평정과 청정한 사띠[사념청정(捨念淸淨)]의 제사선(第四禪)을 성취하여 머뭅니다. 이것이, 마하나마여, 유학의 삼매라고 불립니다.
그러면 마하나마여, 무엇이 유학의 지혜입니까? 여기 마하나마여, 비구는 ‘이것이 고(苦)다.’라고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압니다. ‘이것이 고집(苦集)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압니다. ‘이것이 고멸(苦滅)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압니다. ‘이것이 고멸(苦滅)로 이끄는 실천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압니다. 이것이, 마하나마여, 유학의 지혜라고 불립니다.
이런, 마하나마여, 이렇게 계를 갖추고 이렇게 삼매를 갖추고 이렇게 지혜를 갖춘 그 성스러운 제자는 번뇌들이 부서졌기 때문에 번뇌가 없는 심해탈과 혜해탈을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실답게 안 뒤에 실현하고 성취하여 머뭅니다. 이렇게 마하나마여, 세존께서는 유학(有學)의 계(戒)도 말했고. 세존께서는 무학(無學)의 계도 말했습니다. 세존께서는 유학(有學)의 삼매도 말했고. 세존께서는 무학(無學)의 삼매도 말했습니다. 세존께서는 유학(有學)의 지혜도 말했고. 세존께서는 무학(無學)의 지혜도 말했습니다.”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