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nigaṇṭhasuttaṃ (AN 3.75-니간타 경)
3. ānandavaggo, 4. nigaṇṭhasuttaṃ (AN 3.75-니간타 경)
한때 아난다 존자는 웨살리에서 큰 숲의 뾰족지붕 건물에 머물렀다. 그때 릿차위족 아바야와 릿차위족 빤디따꾸마라가 아난다 존자에게 왔다. 와서는 아난다 존자에게 절한 뒤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릿차위족 아바야는 아난다 존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 “대덕이시여, 니간타 나따뿟따는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봅니다. ‘나에게는 걸을 때도 서 있을 때도 잠잘 때도 깨어있을 때도 항상 계속해서 앎과 봄이 나타난다.’라고 남김 없는 앎과 봄을 인정합니다. 그는 이전의 업(業)들을 고행으로 부수고, 새로운 업들을 짓지 않아서 다리를 부순다고 선언합니다. 이렇게 업(業)의 부서짐에서 고(苦)의 부서짐이 있고, 고(苦)의 부서짐에서 수(受)의 부서짐이 있고, 수(受)의 부서짐에서 일체 고(苦)의 다함이 있습니다. — 이렇게 스스로 보이기 위한, 퇴보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청정을 위한 이런 건넘이 있습니다(*). 대덕이시여, 여기에 대해서 세존께서는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 주제의 확장(AN-23) - 「nijjara 부서짐 또는 퇴보로부터의 벗어남」 참조
”아바야여, 중생들의 청정을 위해, 슬픔[수(愁)]과 비탄[비(悲)]을 건너기 위해, 고통[고(苦)]과 고뇌[우(憂)]의 줄어듦을 위해, 방법을 얻기 위해, 열반을 실현하기 위해 아는 자, 보는 자인 그분 세존(世尊)-아라한(阿羅漢)-정등각(正等覺)에 의해 바르게 선언된 것 세 가지가 있습니다. 어떤 셋입니까?
아바야여, 여기 비구는 계(戒)를 중시하는 자입니다. 계목(戒目)의 단속으로 단속하는 자, 행위와 영역을 갖춘 자, 아주 작은 결점에 대해서도 두려움을 보는 자로 머물고, 계(戒)들에 대해 받아 지니고서 공부합니다. 그는 새로운 업을 짓지 않고, 이전의 업은 닿을 때마다 끝냅니다(*). 퇴보로부터의 벗어남은 스스로 보이는 것이고, 시간을 넘어선 것이고, 와서 보라는 것이고, 향상으로 이끌고, 지혜로운 이에게 개별적으로 알려지는 것입니다.
(*) (AN 4.195-왑빠 경)에도 나타나는 용례임. (SN 35.129-업의 소멸 경)에 의하면, 이전의 업(業)은 안(眼)-이(耳)-비(鼻)-설(舌)-신(身)-의(意)여서 형성된 것, 의도된 것, 경험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또한, 몸과 말과 의(意)에 의해 지금 짓는 업이 새로운 업(業)이고, 신업(身業)과 구업(口業)과 의업(意業)의 소멸로부터 해탈에 닿는 것이 업(業)의 소멸입니다. 이런 설명에 의하면, 이전의 업을 닿을 때마다 끝낸다는 것은 인식 과정에서 번뇌와 관심의 제어에 의한 상(相-nimitta)의 소멸과 명(明)의 촉(觸) 그리고 식(識)이 머물지 않는 해탈된 삶을 의미한다고 하겠습니다.
아바야여, 이렇게 계(戒)를 갖춘 그 비구는 소유의 삶에서 벗어나고, 불선법(不善法)들에서 벗어나서, 위딱까가 있고 위짜라가 있고 떨침에서 생긴 기쁨과 즐거움의 초선(初禪)을 성취하여 머뭅니다. 위딱까와 위짜라의 가라앉음으로 인해, 안으로 평온함과 마음의 집중된 상태가 되어, 위딱까도 없고 위짜라도 없이, 삼매에서 생긴 기쁨과 즐거움의 제이선(第二禪)을 성취하여 머뭅니다. 기쁨의 바램으로부터 평정하게 머물고, 사띠와 바른 앎을 가지고 몸으로 즐거움을 경험하면서, 성인들이 '평정을 가진 자, 사띠를 가진 자, 즐거움에 머무는 자[사념락주(捨念樂住)].'라고 말하는 제삼선(第三禪)을 성취하여 머뭅니다. 즐거움의 버림과 괴로움의 버림으로부터, 이미 만족과 불만들의 줄어듦으로부터, 괴로움도 즐거움도 없고 평정과 청정한 사띠[사념청정(捨念淸淨)]의 제사선(第四禪)을 성취하여 머뭅니다. 그는 새로운 업을 짓지 않고, 이전의 업은 닿을 때마다 끝냅니다. 퇴보로부터의 벗어남은 스스로 보이는 것이고, 시간을 넘어선 것이고, 와서 보라는 것이고, 향상으로 이끌고, 지혜로운 이에게 개별적으로 알려지는 것입니다.
아바야여, 이렇게 삼매를 갖춘 그 비구는 번뇌들이 부서졌기 때문에 번뇌가 없는 심해탈(心解脫)과 혜해탈(慧解脫)을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실답게 안 뒤에 실현하고 성취하여 머뭅니다. 그는 새로운 업을 짓지 않고, 이전의 업은 닿을 때마다 끝냅니다. 퇴보로부터의 벗어남은 스스로 보이는 것이고, 시간을 넘어선 것이고, 와서 보라는 것이고, 향상으로 이끌고, 지혜로운 이에게 개별적으로 알려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바야여, 중생들의 청정을 위해, 슬픔과 비탄을 건너기 위해, 고통과 고뇌의 줄어듦을 위해, 방법을 얻기 위해, 열반을 실현하기 위해 아는 자, 보는 자인 그분 세존-아라한-정등각에 의해 바르게 선언된 것 세 가지입니다.”
이렇게 말했을 때, 릿차위족 빤디따꾸마라가 릿차위족 아바야에게 이렇게 말했다. — “그런데 착한 아바야여, 그대는 어떻게 아난다 존자의 좋은 말씀을 듣고서 감사하지 않습니까?” “착한 빤디따꾸마라여, 어떻게 내가 아난다 존자의 좋은 말씀을 듣고서 감사하지 않겠습니까? 아난다 존자의 좋은 말씀을 감사하지 않는 자는 그의 목이 떨어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