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가지 속박] 10. yogasuttaṃ (AN 4.10-속박 경)
1. bhaṇḍagāmavaggo, 10. yogasuttaṃ (AN 4.10-속박 경)
비구들이여, 네 가지 속박이 있다. 무엇이 넷인가? 소유의 속박, 존재의 속박, 견해의 속박, 무명의 속박이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소유의 속박인가? 여기, 비구들이여, 어떤 사람은 소유의 삶의 자라남과 줄어듦과 매력(魅力)과 위험(危險)과 해방(解放)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지 못한다. 소유의 삶의 자라남과 줄어듦과 매력(魅力)과 위험(危險)과 해방(解放)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지 못하는 그에게 소유의 삶에 대한 욕탐(慾貪), 소유의 소망, 소유의 갈망, 소유의 열중, 소유의 갈증, 소유의 열기, 소유의 묶임, 욕애(慾愛)가 함께 잠재한다. 이것이, 비구들이여, 소유의 속박이라고 불린다. 이렇게 소유의 속박이 있다.
그러면 어떻게 존재의 속박이 있는가? 여기, 비구들이여, 어떤 사람은 존재들의 자라남과 줄어듦과 매력(魅力)과 위험(危險)과 해방(解放)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지 못한다. 존재들의 자라남과 줄어듦과 매력(魅力)과 위험(危險)과 해방(解放)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지 못하는 그에게 존재들에 대한 유탐(有貪), 존재의 소망, 존재의 갈망, 존재의 열중, 존재의 갈증, 존재의 열기, 존재의 묶임, 유애(有愛)가 함께 잠재한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존재의 속박이라고 불린다. 이렇게 소유의 속박이 있고 존재의 속박이 있다.
그러면 어떻게 견해의 속박이 있는가? 여기, 비구들이여, 어떤 사람은 견해들의 자라남과 줄어듦과 매력(魅力)과 위험(危險)과 해방(解放)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지 못한다. 견해들의 자라남과 줄어듦과 매력(魅力)과 위험(危險)과 해방(解放)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지 못하는 그에게 견해들에 대한 견해의 탐(貪), 견해의 소망, 견해의 갈망, 견해의 열중, 견해의 갈증, 견해의 열기, 견해의 묶임, 견해의 애(愛)가 함께 잠재한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견해의 속박이라고 불린다. 이렇게 소유의 속박이 있고 존재의 속박이 있고 견해의 속박이 있다.
그러면 어떻게 무명의 속박이 있는가? 여기, 비구들이여, 어떤 사람은 육촉처(六觸處)의 자라남과 줄어듦과 매력(魅力)과 위험(危險)과 해방(解放)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지 못한다. 육촉처(六觸處)의 자라남과 줄어듦과 매력(魅力)과 위험(危險)과 해방(解放)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지 못하는 그에게 육촉처(六觸處)에 대한 무명(無明)과 무지(無知)가 함께 잠재한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무명의 속박이라고 불린다. 이렇게 소유의 속박, 존재의 속박, 견해의 속박, 무명의 속박이 있고, 오염원이고 미래에 태어나고 늙고 죽어야 하는 존재로 다시 이끌고 두렵고 보(報)가 괴로움인 악한 불선법들에 의해 묶인 자가 있다. 그래서 유가안온(瑜伽安穩)을 얻지 못한 자라고 불린다. 이것이, 비구들이여, 네 가지 속박이다.
비구들이여, 네 가지 끊음이 있다. 무엇이 넷인가? 소유의 속박을 끊음, 존재의 속박을 끊음, 견해의 속박을 끊음, 무명의 속박을 끊음이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무엇이 소유의 속박을 끊음인가? 여기, 비구들이여, 어떤 사람은 소유의 삶의 자라남과 줄어듦과 매력(魅力)과 위험(危險)과 해방(解放)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 소유의 삶의 자라남과 줄어듦과 매력(魅力)과 위험(危險)과 해방(解放)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아는 그에게 소유의 삶에 대한 욕탐(慾貪), 소유의 소망, 소유의 갈망, 소유의 열중, 소유의 갈증, 소유의 열기, 소유의 묶임, 욕애(慾愛)가 잠재하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소유의 속박을 끊음이라고 불린다. 이렇게 소유의 속박을 끊음이 있다.
그러면 어떻게 존재의 속박을 끊음이 있는가? 여기, 비구들이여, 어떤 사람은 존재들의 자라남과 줄어듦과 매력(魅力)과 위험(危險)과 해방(解放)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 존재들의 자라남과 줄어듦과 매력(魅力)과 위험(危險)과 해방(解放)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아는 그에게 존재들에 대한 유탐(有貪), 존재의 소망, 존재의 갈망, 존재의 열중, 존재의 갈증, 존재의 열기, 존재의 묶임, 유애(有愛)가 잠재하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존재의 속박을 끊음이라고 불린다. 이렇게 소유의 속박을 끊음이 있고, 존재의 속박을 끊음이 있다.
그러면 어떻게 견해의 속박을 끊음이 있는가? 여기, 비구들이여, 어떤 사람은 견해들의 자라남과 줄어듦과 매력(魅力)과 위험(危險)과 해방(解放)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 견해들의 자라남과 줄어듦과 매력(魅力)과 위험(危險)과 해방(解放)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아는 그에게 견해들에 대한 견해의 탐(貪), 견해의 소망, 견해의 갈망, 견해의 열중, 견해의 갈증, 견해의 열기, 견해의 묶임, 견해의 애(愛)가 잠재하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견해의 속박을 끊음이라고 불린다. 이렇게 소유의 속박을 끊음이 있고, 존재의 속박을 끊음이 있고, 견해의 속박을 끊음이 있다.
그러면 어떻게 무명의 속박을 끊음이 있는가? 여기, 비구들이여, 어떤 사람은 육촉처(六觸處)의 자라남과 줄어듦과 매력(魅力)과 위험(危險)과 해방(解放)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 육촉처(六觸處)의 자라남과 줄어듦과 매력(魅力)과 위험(危險)과 해방(解放)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아는 그에게 육촉처(六觸處)에 대한 무명(無明)과 무지(無知)가 잠재하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무명의 속박을 끊음이라고 불린다. 이렇게 소유의 속박을 끊음, 존재의 속박을 끊음, 견해의 속박을 끊음, 무명의 속박을 끊음이 있고, 오염원이고 미래에 태어나고 늙고 죽어야 하는 존재로 다시 이끌고 두렵고 보(報)가 괴로움인 악한 불선법들로부터 끊어진 자가 있다. 그래서 유가안온(瑜伽安穩)을 얻은 자라고 불린다. 이것이, 비구들이여, 네 가지 속박을 끊음이다.
“kāmayogena saṃyuttā, bhavayogena cūbhayaṃ.
diṭṭhiyogena saṃyuttā, avijjāya purakkhatā.
“sattā gacchanti saṃsāraṃ, jātimaraṇagāmino.
ye ca kāme pariññāya, bhavayogañca sabbaso.
“diṭṭhiyogaṃ samūhacca, avijjañca virājayaṃ.
sabbayogavisaṃyuttā, te ve yogātigā munī”ti. dasamaṃ.
소유의 속박에 의해 묶이고, 존재의 속박에 의해 양쪽으로 묶이고,
견해의 속박에 묶이고, 무명(無明)을 따르는
중생들은 윤회로 나아가니, 생(生)과 사(死)로 이끌리는 자들이다.
소유의 삶과 존재의 속박을 모든 면에서 완전히 알고
견해의 속박을 뿌리 뽑은 뒤에 무명을 빛바래게 한
모든 속박이 끊어진 그들이 참으로 속박을 극복한 성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