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paribbājakasuttaṃ (AN 4.30-유행승 경)
3. uruvelavaggo, 10. paribbājakasuttaṃ (AN 4.30-유행승 경)
한때 세존은 라자가하에서 독수리봉 산에 머물렀다. 그때 아주 잘 알려진 많은 유행승들이 십삐니까 강변에 있는 유행승들의 사원에 머물렀다. 예를 들면, 안나바라, 와라다라, 사꿀루다이 유행승과 아주 잘 알려진 다른 많은 유행승들이었다. 그때 저녁에 홀로 머묾에서 나온 세존은 십삐니까 강변에 있는 유행승들의 사원으로 갔다. 가서는 준비된 의자에 앉았다. 앉은 뒤에 세존은 그 유행승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ㅡ
유행승들이여, 네 가지 법의 걸음이 있습니다. 가장 높은 것이라고 알려지고, 오래되었다고 알려지고, 계보라고 알려지고, 고대로부터 전해오고, 오염되지 않은 것이어서 이전에도 오염되지 않았고, 오염되지 않은 그리고 오염되지 않을 것인데, 현명한 사문-바라문들에 의해 책망 받지 않는 것입니다. 무엇이 넷입니까? 유행승들이여, 불간탐(不慳貪)은 법의 걸음입니다. 가장 높은 것이라고 알려지고, 오래되었다고 알려지고, 계보라고 알려지고, 고대로부터 전해오고, 오염되지 않은 것이어서 이전에도 오염되지 않았고, 오염되지 않은 그리고 오염되지 않을 것인데, 현명한 사문-바라문들에 의해 책망 받지 않는 것입니다. 유행승들이여, 부진에(不瞋恚)는 법의 걸음입니다. … 유행승들이여, 정념(正念)은 법의 걸음입니다. … 유행승들이여, 정정(正定)은 법의 걸음입니다. 가장 높은 것이라고 알려지고, 오래되었다고 알려지고, 계보라고 알려지고, 고대로부터 전해오고, 오염되지 않은 것이어서 이전에도 오염되지 않았고, 오염되지 않은 그리고 오염되지 않을 것인데, 현명한 사문-바라문들에 의해 책망 받지 않는 것입니다. 유행승들이여, 이런 네 가지 법의 걸음이 있습니다. 가장 높은 것이라고 알려지고, 오래되었다고 알려지고, 계보라고 알려지고, 고대로부터 전해오고, 오염되지 않은 것이어서 이전에도 오염되지 않았고, 오염되지 않은 그리고 오염되지 않을 것인데, 현명한 사문-바라문들에 의해 책망 받지 않는 것입니다.
유행승들이여, 어떤 사람은 ‘나는 이 불간탐(不慳貪)의 법의 걸음을 거부한 뒤에 간탐(慳貪)하고 소유의 대상들에 대해 매우 친밀한 사문이나 바라문을 선언할 것이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거기서 나는 그에게 ‘와서 말하고 발언하시오. 나는 그대의 능력을 보겠소.’라고 말할 것입니다. 유행승들이여, 참으로 그가 ‘불간탐(不慳貪)의 법의 걸음을 거부한 뒤에 간탐(慳貪)하고 소유의 대상들에 대해 매우 친밀한 사문이나 바라문을 선언할 것이다.’라는 그런 경우는 없습니다.
유행승들이여, 어떤 사람은 ‘나는 이 부진에(不瞋恚)의 법의 걸음을 거부한 뒤에 분노한 심(心)을 가지고 불쾌해하는 의(意)의 사유를 하는 사문이나 바라문을 선언할 것이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거기서 나는 그에게 ‘와서 말하고 발언하시오. 나는 그대의 능력을 보겠소.’라고 말할 것입니다. 유행승들이여, 참으로 그가 ‘부진에(不瞋恚)의 법의 걸음을 거부한 뒤에 분노한 심(心)을 가지고 불쾌해하는 의(意)의 사유를 하는 사문이나 바라문을 선언할 것이다.’라는 그런 경우는 없습니다.
유행승들이여, 어떤 사람은 ‘나는 이 정념(正念)의 법의 걸음을 거부한 뒤에 사띠를 잊어버리고 삼빠자나 없는 사문이나 바라문을 선언할 것이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거기서 나는 그에게 ‘와서 말하고 발언하시오. 나는 그대의 능력을 보겠소.’라고 말할 것입니다. 유행승들이여, 참으로 그가 ‘정념(正念)의 법의 걸음을 거부한 뒤에 사띠를 잊어버리고 삼빠자나 없는 사문이나 바라문을 선언할 것이다.’라는 그런 경우는 없습니다.
유행승들이여, 어떤 사람은 ‘나는 이 정정(正定)의 법의 걸음을 거부한 뒤에 삼매를 닦지 않고 산란한 심(心)을 가진 사문이나 바라문을 선언할 것이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거기서 나는 그에게 ‘와서 말하고 발언하시오. 나는 그대의 능력을 보겠소.’라고 말할 것입니다. 유행승들이여, 참으로 그가 ‘정정(正定)의 법의 걸음을 거부한 뒤에 삼매를 닦지 않고 산란한 심(心)을 가진 사문이나 바라문을 선언할 것이다.’라는 그런 경우는 없습니다.
유행승들이여, 어떤 사람은 이런 네 가지 법의 걸음을 비난해야하고 거부해야 한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는 지금여기에서 네 가지 법다운 말에 의한 질책과 멸시를 받을 것입니다. 어떤 넷입니까? 만약 존자가 불간탐(不慳貪)의 법의 걸음을 비난하고 거부한다면, 간탐(慳貪)하고 소유의 대상들에 대해 매우 친밀한 사문이나 바라문들은 존자에게 존경을 받고, 존자에게 칭찬을 받습니다. 만약 존자가 부진에(不瞋恚)의 법의 걸음을 비난하고 거부한다면, 분노한 심(心)을 가지고 불쾌해하는 의(意)의 사유를 하는 사문이나 바라문들은 존자에게 존경을 받고, 존자에게 칭찬을 받습니다. 만약 존자가 정념(正念)의 법의 걸음을 비난하고 거부한다면, 사띠를 잊어버리고 삼빠자나 없는 사문이나 바라문들은 존자에게 존경을 받고, 존자에게 칭찬을 받습니다. 만약 존자가 정정(正定)의 법의 걸음을 비난하고 거부한다면, 삼매를 닦지 않고 산란한 심(心)을 가진 사문이나 바라문들은 존자에게 존경을 받고, 존자에게 칭찬을 받습니다.
유행승들이여, 어떤 사람은 이런 네 가지 법의 걸음을 비난해야하고 거부해야 한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는 지금여기에서 네 가지 법다운 말에 의한 질책과 멸시를 받을 것입니다.
유행승들이여, 원인 없음을 말하고, 결실 없음을 말하고, 없음[무유(無有)]를 말하는 욱깔라와 왓사반냐의 사람들도 이런 네 가지 법의 걸음을 비난해야하고 거부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 원인은 무엇입니까? 비난과 성냄과 질책의 두려움입니다.
“abyāpanno sadā sato, ajjhattaṃ susamāhito.
abhijjhāvinaye sikkhaṃ, appamattoti vuccatī”ti. dasamaṃ.
분노하지 않는 자, 언제나 사띠하는 자, 안으로 삼매를 잘 닦는 자는
간탐(慳貪)을 제어하는 공부에 방일하지 않는 자라고 불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