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soṇakāyanasuttaṃ (AN 4.234-소나까야나 경)
4. kammavaggo, 3. soṇakāyanasuttaṃ (AN 4.234-소나까야나 경)
시카목갈라나 바라문이 세존에게 왔다. 와서는 세존과 함께 인사를 나누었다. 유쾌하고 기억할만한 이야기를 주고받은 뒤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시카목갈라나 바라문은 세존에게 이렇게 말했다. ㅡ
“고따마 존자시여, 며칠 전, 좀 더 이전에 소나까야나 바라문 청년이 저에게 왔습니다. 와서는 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ㅡ ‘사문 고따마는 모든 업(業)들의 결실 없음을 선언합니다. 모든 업(業)들의 결실 없음을 선언하는 그는 세상의 단멸을 말합니다. ㅡ 존자여, 이 세상은 업이 진실이고, 업(業)의 활동으로 유지되는 것입니다.’라고.”
“바라문이여, 나는 소나까야나 바라문 청년을 본 것도 기억하지 못합니다. 어디로부터 이런 대화가 있겠습니까? 바라문이여, 내가 스스로 실답게 안 뒤에 실현하여 선언한 네 가지 업(業)들이 있습니다. 어떤 넷입니까? 바라문이여, 괴로운 보(報)를 경험하게 하는 나쁜 업(業)이 있습니다. 바라문이여, 즐거운 보(報)를 경험하게 하는 좋은 업(業)이 있습니다. 바라문이여, 괴롭고 즐거운 보(報)를 경험하게 하는 나쁘고 좋은 업(業)이 있습니다. 바라문이여,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보(報)를 경험하게 하고, 업(業)의 부서짐으로 이끄는 나쁘지도 좋지도 않은 업(業)이 있습니다. 이것이, 바라문이여, 내가 스스로 실답게 안 뒤에 실현하여 선언한 네 가지 업(業)들입니다.
그러면 바라문이여, 무엇이 괴로운 보(報)를 경험하게 하는 나쁜 업(業)입니까? 여기, 바라문이여, 어떤 자는 거슬림이 있는 신행(身行)을 하고, 거슬림이 있는 구행(口行)을 하고, 거슬림이 있는 의행(意行)을 합니다. 그는 거슬림이 있는 신행(身行)을 하고, 거슬림이 있는 구행(口行)을 하고, 거슬림이 있는 의행(意行)을 한 뒤에 거슬림이 있는 세상에 태어납니다. 거슬림이 있는 세상에 태어나 있는 그에게 거슬림이 있는 촉(觸)들이 닿습니다. 거슬림이 있는 촉(觸)들에 닿아 있는 그는 오로지 괴로움인 거슬림이 있는 느낌을 경험합니다. 예를 들면, 지옥에 태어난 중생들입니다. 이것이, 바라문이여, 괴로운 보(報)를 경험하게 하는 나쁜 업(業)입니다.
그러면 바라문이여, 무엇이 즐거운 보(報)를 경험하게 하는 좋은 업(業)입니까? 여기, 바라문이여, 어떤 자는 거슬림이 없는 신행(身行)을 하고, 거슬림이 없는 구행(口行)을 하고, 거슬림이 없는 의행(意行)을 합니다. 그는 거슬림이 없는 신행(身行)을 하고, 거슬림이 없는 구행(口行)을 하고, 거슬림이 없는 의행(意行)을 한 뒤에 거슬림이 없는 세상에 태어납니다. 거슬림이 없는 세상에 태어나 있는 그에게 거슬림이 없는 촉(觸)들이 닿습니다. 거슬림이 없는 촉(觸)들에 닿아 있는 그는 오로지 즐거움인 거슬림이 없는 느낌을 경험합니다. 예를 들면, 변정천(遍淨天)에 태어난 중생들입니다. 이것이, 바라문이여, 즐거운 보(報)를 경험하게 하는 좋은 업(業)입니다.
그러면 바라문이여, 무엇이 괴롭고 즐거운 보(報)를 경험하게 하는 나쁘고 좋은 업(業)입니까? 여기, 바라문이여, 어떤 자는 거슬림이 있는 신행(身行)도 하고, 거슬림이 없는 신행(身行)도 합니다. 거슬림이 있는 구행(口行)도 하고, 거슬림이 없는 구행(行)도 합니다. 거슬림이 있는 의행(意行)도 하고, 거슬림이 없는 의행(意行)도 합니다. 그는 거슬림이 있기도 거슬림이 없기도 한 신행(身行)을 하고, 거슬림이 있기도 거슬림이 없기도 한 구행(口行)을 하고, 거슬림이 있기도 거슬림이 없기도 한 의행(意行)을 한 뒤에 거슬림이 있기도 거슬림이 없기도 한 세상에 태어납니다. 거슬림이 있기도 거슬림이 없기도 한 세상에 태어나 있는 그에게 거슬림이 있기도 거슬림이 없기도 한 촉(觸)들이 닿습니다. 거슬림이 있기도 거슬림이 없기도 한 촉(觸)들에 닿아 있는 그는 거슬림이 있기도 거슬림이 없기도 한 느낌을 경험합니다. 예를 들면, 어떤 인간들과 신들 그리고 어떤 벌 받는 상태에 떨어진 자들입니다. 이것이, 바라문이여, 괴롭고 즐거운 보(報)를 경험하게 하는 나쁘고 좋은 업(業)입니다.
그러면 바라문이여, 무엇이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보(報)를 경험하게 하고, 업(業)의 부서짐으로 이끄는 나쁘지도 좋지도 않은 업(業)입니까? 거기서, 바라문이여, 괴로운 보(報)를 경험하게 하는 나쁜 업(業)을 버리기 위한 어떤 의도가 있고, 즐거운 보(報)를 경험하게 하는 좋은 업(業)을 버리기 위한 어떤 의도가 있고, 괴롭고 즐거운 보(報)를 경험하게 하는 나쁘고 좋은 업(業)을 버리기 위한 어떤 의도가 있습니다. ㅡ 이것이. 바라문이여,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보(報)를 경험하게 하고, 업(業)의 부서짐으로 이끄는 나쁘지도 좋지도 않은 업(業)입니다. 바라문이여, 내가 스스로 실답게 안 뒤에 실현하여 선언한 이런 네 가지 업(業)들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