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ariyamaggasuttaṃ (AN 4.237-성스러운 길 경)
4. kammavaggo, 6. ariyamaggasuttaṃ (AN 4.237-성스러운 길 경)
비구들이여, 내가 스스로 실답게 안 뒤에 실현하여 선언한 네 가지 업(業)들이 있다. 어떤 넷인가? 비구들이여, 괴로운 보(報)를 경험하게 하는 나쁜 업(業)이 있다. 비구들이여, 즐거운 보(報)를 경험하게 하는 좋은 업(業)이 있다. 비구들이여, 괴롭고 즐거운 보(報)를 경험하게 하는 나쁘고 좋은 업(業)이 있다. 비구들이여,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보(報)를 경험하게 하고, 업(業)의 부서짐으로 이끄는 나쁘지도 좋지도 않은 업(業)이 있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무엇이 괴로운 보(報)를 경험하게 하는 나쁜 업(業)인가? 여기, 비구들이여, 어떤 자는 거슬림이 있는 신행(身行)을 하고, 거슬림이 있는 구행(口行)을 하고, 거슬림이 있는 의행(意行)을 한다. 그는 거슬림이 있는 신행(身行)을 하고, 거슬림이 있는 구행(口行)을 하고, 거슬림이 있는 의행(意行)을 한 뒤에 거슬림이 있는 세상에 태어난다. 거슬림이 있는 세상에 태어나 있는 그에게 거슬림이 있는 촉(觸)들이 닿는다. 거슬림이 있는 촉(觸)들에 닿아 있은 그는 오로지 괴로움인 거슬림이 있는 느낌을 경험한다. 예를 들면, 지옥에 태어난 중생들이다. 이것이, 비구들이여, 괴로운 보(報)를 경험하게 하는 나쁜 업(業)이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무엇이 즐거운 보(報)를 경험하게 하는 좋은 업(業)인가? 여기, 비구들이여, 어떤 자는 거슬림이 없는 신행(身行)을 하고, 거슬림이 없는 구행(口行)을 하고, 거슬림이 없는 의행(意行)을 한다. 그는 거슬림이 없는 신행(身行)을 하고, 거슬림이 없는 구행(口行)을 하고, 거슬림이 없는 의행(意行)을 한 뒤에 거슬림이 없는 세상에 태어난다. 거슬림이 없는 세상에 태어나 있는 그에게 거슬림이 없는 촉(觸)들이 닿는다. 거슬림이 없는 촉(觸)들에 닿아 있는 그는 오로지 즐거움인 거슬림이 없는 느낌을 경험한다. 예를 들면, 변정천(遍淨天)에 태어난 중생들이다. 이것이, 비구들이여, 즐거운 보(報)를 경험하게 하는 좋은 업(業)이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무엇이 괴롭고 즐거운 보(報)를 경험하게 하는 나쁘고 좋은 업(業)인가? 여기, 비구들이여, 어떤 자는 거슬림이 있는 신행(身行)도 하고, 거슬림이 없는 신행(身行)도 한다. 거슬림이 있는 구행(口行)도 하고, 거슬림이 없는 구행(行)도 한다. 거슬림이 있는 의행(意行)도 하고, 거슬림이 없는 의행(意行)도 한다. 그는 거슬림이 있기도 거슬림이 없기도 한 신행(身行)을 하고, 거슬림이 있기도 거슬림이 없기도 한 구행(口行)을 하고, 거슬림이 있기도 거슬림이 없기도 한 의행(意行)을 한 뒤에 거슬림이 있기도 거슬림이 없기도 한 세상에 태어난다. 거슬림이 있기도 거슬림이 없기도 한 세상에 태어나 있는 그에게 거슬림이 있기도 거슬림이 없기도 한 촉(觸)들이 닿는다. 거슬림이 있기도 거슬림이 없기도 한 촉(觸)들에 닿아 있는 그는 거슬림이 있기도 거슬림이 없기도 한 느낌을 경험한다. 예를 들면, 어떤 인간들과 신들 그리고 어떤 벌 받는 상태에 떨어진 자들이다. 이것이, 비구들이여, 괴롭고 즐거운 보(報)를 경험하게 하는 나쁘고 좋은 업(業)이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무엇이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보(報)를 경험하게 하고, 업(業)의 부서짐으로 이끄는 나쁘지도 좋지도 않은 업(業)인가? 정견(正見), 정사유(正思惟), 정어(正語), 정업(正業), 정명(正命), 정정진(正精進), 정념(正念), 정정(正定) ㅡ 이것이. 비구들이여,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보(報)를 경험하게 하고, 업(業)의 부서짐으로 이끄는 나쁘지도 좋지도 않은 업(業)이다. 비구들이여, 내가 스스로 실답게 안 뒤에 실현하여 선언한 이런 네 가지 업(業)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