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mahākaccānasuttaṃ (AN 6.26-마하깟짜나 경)
3. anuttariyavaggo, 6. mahākaccānasuttaṃ (AN 6.26-마하깟짜나 경)
거기서 마하깟짜나 존자는 비구들을 불렀다. — “도반 비구들이여.”라고. 그 비구들은 마하깟짜나 존자에게 대답했다. — “도반이시여.”라고. 마하깟짜나 존자는 이렇게 말하였다. — “참으로 놀랍습니다, 도반들이여. 참으로 신기합니다, 도반들이여. 아시는 분, 보시는 분, 그분 세존-아라한-정등각에 의해 장애 가운데서 중생들의 청정을 위한, 슬픔[수(愁)]과 비탄[비(悲)]을 건너기 위한, 고통[고(苦)]과 고뇌[우(憂)]를 사라지게 하기 위한, 방법을 얻기 위한, 열반을 실현하기 위한 기회의 얻음이 이만큼(*) 알려졌으니, 여섯 가지 계속해서 기억함의 토대입니다. 무엇이 여섯입니까?
(*) yāvañca — yāvañ ca "and that," "i. e.," how much, however much, so great
yāvant(pron. rel.) : as many. → yāvatā pl. as many as
; sattānaṃ visuddhiyā ~ nibbānassa sacchikiriyāya를 포함하는 여러 개의 경 가운데 이 경과 (AN 9.37-아난다 경)의 두 경에서만 나타나면서 열반의 완전한 실현에 미치지는 못하는 제한적 의미를 설명함. ☞ 「독송집(Ⅱ) — 방법을 얻기 위한, 열반을 실현하기 위한」(http://nikaya.kr/bbs/board.php?bo_table=happy07_07&wr_id=36&page=1)참조.
여기, 도반들이여, 성스러운 제자는 여래(如來)를 계속해서 기억합니다. — ‘이렇게 그분 세존(世尊)께서는 모든 번뇌 떠나신 분, 스스로 완전한 깨달음을 이루신 분, 밝음과 실천을 갖추신 분, 진리의 길 보이신 분, 세상일을 모두 훤히 아시는 분, 어리석은 이도 잘 이끄시는 위없는 분, 신과 인간의 스승, 깨달으신 분, 존귀하신 분이시다.’라고. 도반들이여, 성성스러운 제자가 여래를 계속해서 기억할 때 심(心)은 탐(貪)이 스며들지 않고, 진(嗔)이 스며들지 않고 치(癡)가 스며들지 않습니다. 그때 심(心)은 올곧아지고, 갈망으로부터 떠나고, 풀려나고, 벗어납니다. 도반들이여, ‘갈망’이란 것은 이 다섯 가지 소유의 사유에 묶인 것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도반들이여, 이런 성스러운 제자는 크고 귀하고 무량한, 원망 없고 거슬림 없는 온전히 허공 같은 심(心)으로 머뭅니다. 도반들이여, 이런 대상을 계속해서 기억함을 원인으로도 이렇게 여기서 어떤 중생들은 청정해집니다.
다시, 도반들이여, 성스러운 제자는 법(法)을 계속해서 기억합니다. — '세존(世尊)에 의해 잘 설해진 법은 스스로 보이는 것이고, 시간을 넘어선 것이고, 와서 보라는 것이고, 향상으로 이끌고, 지혜로운 이들에게 개별적으로 알려지는 것이다.’라고. 도반들이여, 성스러운 제자가 법(法)을 계속해서 기억할 때 심(心)은 탐(貪)이 스며들지 않고, 진(嗔)이 스며들지 않고 치(癡)가 스며들지 않습니다. 그때 심(心)은 올곧아지고, 갈망으로부터 떠나고, 풀려나고, 벗어납니다. 도반들이여, ‘갈망’이란 것은 이 다섯 가지 소유의 사유에 묶인 것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도반들이여, 이런 성스러운 제자는 크고 귀하고 무량한, 원망 없고 거슬림 없는 온전히 허공 같은 심(心)으로 머뭅니다. 도반들이여, 이런 대상을 계속해서 기억함을 원인으로도 이렇게 여기서 어떤 중생들은 청정해집니다.
다시, 도반들이여, 성스러운 제자는 승(僧)을 계속해서 기억합니다. — '세존의 제자 상가는 잘 실천하고, 세존의 제자 상가는 올곧게 실천하고, 세존의 제자 상가는 방법에 맞게 실천하고, 세존의 제자 상가는 가르침에 일치하게 실천한다. 쌍으로는 넷이고, 홑으로는 여덟인 이들이 세존의 제자 상가이니, 공양받을만하고, 환영받을만하고, 보시받을만하고 합장 받을만하며, 세상의 위없는 복전(福田)이다.’라고. 도반들이여, 성스러운 제자가 승(僧)을 계속해서 기억할 때 심(心)은 탐(貪)이 스며들지 않고, 진(嗔)이 스며들지 않고 치(癡)가 스며들지 않습니다. 그때 심(心)은 올곧아지고, 갈망으로부터 떠나고, 풀려나고, 벗어납니다. 도반들이여, ‘갈망’이란 것은 이 다섯 가지 소유의 사유에 묶인 것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도반들이여, 이런 성스러운 제자는 크고 귀하고 무량한, 원망 없고 거슬림 없는 온전히 허공 같은 심(心)으로 머뭅니다. 도반들이여, 이런 대상을 계속해서 기억함을 원인으로도 이렇게 여기서 어떤 중생들은 청정해집니다.
다시, 도반들이여, 성스러운 제자는 ‘깨지지 않고, 끊어지지 않고, 결점이 없고, 얼룩지지 않고, 구속되지 않고, 지자들이 칭찬하고, 움켜쥐지 않고, 삼매로 이끄는' 자신의 계(戒)들을 계속해서 기억합니다. 도반들이여, 성스러운 제자가 계(戒)를 계속해서 기억할 때 심(心)은 탐(貪)이 스며들지 않고, 진(嗔)이 스며들지 않고 치(癡)가 스며들지 않습니다. 그때 심(心)은 올곧아지고, 갈망으로부터 떠나고, 풀려나고, 벗어납니다. 도반들이여, ‘갈망’이란 것은 이 다섯 가지 소유의 사유에 묶인 것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도반들이여, 이런 성스러운 제자는 크고 귀하고 무량한, 원망 없고 거슬림 없는 온전히 허공 같은 심(心)으로 머뭅니다. 도반들이여, 이런 대상을 계속해서 기억함을 원인으로도 이렇게 여기서 어떤 중생들은 청정해집니다.
다시, 도반들이여, 성스러운 제자는 자신의 보시(報施)를 계속해서 기억합니다. — '참으로 나에게 이익이다. 참으로 나에게 큰 이익이다! 나는 인색에 오염된 사람들 가운데서 인색의 때에서 벗어난 심으로 자유롭게 보시하고, 손은 깨끗하고, 주기를 좋아하고, 다른 사람의 요구에 응할 준비가 되어있고, 베풂과 나눔을 좋아하며 재가에 산다.'라고. 도반들이여, 성스러운 제자가 보시(報施)를 계속해서 기억할 때 심(心)은 탐(貪)이 스며들지 않고, 진(嗔)이 스며들지 않고 치(癡)가 스며들지 않습니다. 그때 심(心)은 올곧아지고, 갈망으로부터 떠나고, 풀려나고, 벗어납니다. 도반들이여, ‘갈망’이란 것은 이 다섯 가지 소유의 사유에 묶인 것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도반들이여, 이런 성스러운 제자는 크고 귀하고 무량한, 원망 없고 거슬림 없는 온전히 허공 같은 심(心)으로 머뭅니다. 도반들이여, 이런 대상을 계속해서 기억함을 원인으로도 이렇게 여기서 어떤 중생들은 청정해집니다.
다시, 비구들이여, 성스러운 제자는 천신(天神)을 계속해서 기억합니다. — '사대왕천(四大王天)의 신(神)들이 있고, 삼십삼천(三十三天)의 신들이 있고, 야마천(夜摩天)의 신들이 있고, 도솔천(兜率天)의 신들이 있고, 화락천(化樂天)의 신들이 있고,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의 신들이 있고, 범신천(梵身天)의 신들이 있고, 그보다 높은 천(天)의 신들이 있다. 이런 신들은 믿음을 갖추어 여기서 죽은 뒤 그곳에 태어났다. 나에게도 그런 믿음이 있다. 이런 신들은 계를 갖추어 여기서 죽은 뒤 그곳에 태어났다. 나에게도 그런 계가 있다. 이런 신들은 배움을 갖추어 여기서 죽은 뒤 그곳에 태어났다. 나에게도 그런 배움이 있다. 이런 신들은 보시를 갖추어 여기서 죽은 뒤 그곳에 태어났다. 나에게도 그런 보시가 있다. 이런 신들은 지혜를 갖추어 여기서 죽은 뒤 그곳에 태어났다. 나에게도 그런 지혜가 있다.’라고. 도반들이여, 성스러운 제자가 자신과 그 천신들의 믿음과 계와 배움과 보시와 지혜를 계속해서 기억할 때 심은 탐이 스며들지 않고, 진이 스며들지 않고 치가 스며들지 않습니다. 그때 심(心)은 올곧아지고, 갈망으로부터 떠나고, 풀려나고, 벗어납니다. 도반들이여, ‘갈망’이란 것은 이 다섯 가지 소유의 사유에 묶인 것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도반들이여, 이런 성스러운 제자는 크고 귀하고 무량한, 원망 없고 거슬림 없는 온전히 허공 같은 심(心)으로 머뭅니다. 도반들이여, 이런 대상을 계속해서 기억함을 원인으로도 이렇게 여기서 어떤 중생들은 청정해집니다.
참으로 놀랍습니다, 도반들이여. 참으로 신기합니다, 도반들이여. 아시는 분, 보시는 분, 그분 세존-아라한-정등각에 의해 장애 가운데서 중생들의 청정을 위한, 슬픔과 비탄을 건너기 위한, 고통과 고뇌를 사라지게 하기 위한, 방법을 얻기 위한, 열반을 실현하기 위한 기회의 얻음이 이만큼 알려졌으니, 여섯 가지 계속해서 기억함의 토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