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migasālāsuttaṃ (AN 6.44-미가살라 경)
5. dhammikavaggo, 2. migasālāsuttaṃ (AN 6.44-미가살라 경)
듣기도 하고, 많이 배우기도 하고, 견해를 꿰뚫기도 하고, 일시적인 해탈도 얻는 사람! 법의 흐름이 이 사람에게 뻗칩니다. 부처님 법이 뻗친 영역은 이렇게 듣고 배운 뒤, 견해를 꿰뚫고, 일시적인 해탈을 거쳐 완전히 해탈하는 자리입니다.
이 경은 6차 결집본과 PTS본 사이에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6차 결집본은 미가살라 여신자의 아버지 뿌라나는 sakadāgāmisatto, 이시닷따는 sakadāgāmipatto로 다르게 설해진 반면에 PTS본은 두 사람 모두 sakadāgāmisatto로 나타납니다.
PTS본에 따르면, 서로 다른 삶을 산 두 사람이 공히 일래자(一來者)가 되어 도솔천(兜率天)에 태어난 것이고, 6차 결집본에 따르면, 두 사람 모두 도솔천에 태어나기는 하지만 성취의 정도가 다른 것입니다.
sakadāgāmisatto와 sakadāgāmipatto의 차이는 연구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삶의 차이가 성취의 차이로서 나타난다는 점은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
그때 아난다 존자가 오전에 옷차림을 바르게 하고 발우와 가사를 지니고 미가살라 여신자의 집으로 갔다. 가서는 준비된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미가살라 여신자가 아난다 존자에게 왔다. 와서는 아난다 존자에게 절한 뒤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미가살라 여신자는 아난다 존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
“대덕 아난다시여, 범행(梵行)을 닦은 자와 범행을 닦지 않은 자 둘 다 다음 생에 같은 곳에 태어날 것이라고 세존으로부터 설해진 법을 참으로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대덕이시여, 저의 아버지 뿌라나는 세간적 행위인 음행(淫行)으로부터 떠나서 살고 삼가는 범행을 닦는 자였습니다. 그의 죽음에 대해 세존께서는 일래자(一來者)에 매달린 자(sakadāgāmisatto)가 되어 도솔천(兜率天)의 무리에 태어났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대덕이시여, 저의 아버지를 사랑하는[(AN 10.75-미가살라 경)에서는 할아버지] 이시닷따는 자신의 삶에 만족하여 범행을 닦지 않는 자였습니다. 그의 죽음에 대해서도 세존께서는 일래자(一來者)를 성취한 자(sakadāgāmipatto)[PTS : 일래자(一來者)에 매달린 자(sakadāgāmisatto)]가 되어 도솔천의 무리에 태어났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대덕 아난다시여, 범행을 닦은 자와 범행을 닦지 않은 자 둘 다 다음 생에 같은 곳에 태어날 것이라고 세존으로부터 설해진 법을 참으로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누이여, 이렇게 이것을 세존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아난다 존자는 미가살라 여신자의 집에서 탁발 음식을 받은 뒤 자리에서 일어나 떠났다. 그리고 오후에 탁발에서 돌아온 아난다 존자는 세존에게 갔다. 가서는 세존에게 절한 뒤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아난다 존자는 세존에게 이렇게 말했다. ―
“여기, 대덕이시여, 저는 오전에 옷차림을 바르게 하고 발우와 가사를 지니고 미가살라 여신자의 집으로 갔습니다. 가서는 준비된 자리에 앉았습니다. 그러자 대덕이시여, 미가살라 여신자가 저에게 왔습니다. 와서는 저에게 절한 뒤 한 곁에 앉았습니다. 대덕이시여, 한 곁에 앉은 미가살라 여신자는 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 ‘대덕 아난다시여, 범행을 닦은 자와 범행을 닦지 않은 자 둘 다 다음 생에 같은 곳에 태어날 것이라고 세존으로부터 설해진 법을 참으로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대덕이시여, 저의 아버지 뿌라나는 세간적 행위인 음행으로부터 떠나서 살고 삼가는 범행을 닦는 자였습니다. 그의 죽음에 대해 세존께서는 일래자를 성취한 자(sakadāgāmipatto)가 되어 도솔천의 무리에 태어났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대덕이시여, 아버지를 사랑하는[또는 아버지의 형제인] 이시닷따는 자신의 삶에 만족하여 범행을 닦지 않는 자였습니다. 그의 죽음에 대해서도 세존께서는 일래자를 성취한 자(sakadāgāmipatto)가 되어 도솔천의 무리에 태어났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대덕 아난다시여, 범행을 닦은 자와 범행을 닦지 않은 자 둘 다 다음 생에 같은 곳에 태어날 것이라고 세존으로부터 설해진 법을 참으로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이렇게 말했을 때, 대덕이시여, 저는 미가살라 여신자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 ‘누이여, 이렇게 이것을 세존께서 말씀하셨습니다.’라고.”
“아난다여, 어리석고, 총명하지 못하고, 여성이고, 여자의 상(想)을 가진 미가살라 여신자가 누구인가? 다른 사람들의 갈 곳에 대한 앎을 가졌는가? 아난다여,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이런 여섯 가지 사람들이 있다.
어떤 여섯인가? 여기, 아난다여, 어떤 사람은 친절하고 함께 사는 것을 즐거워한다. 동료수행자들도 더불어 사는 것을 기뻐한다. 그러나 그는 듣지도 않고, 많이 배우지도 않고, 견해를 꿰뚫지도 못하고, 일시적인 해탈도 얻지 못한다. 그는 몸이 무너져 죽은 뒤에 낮은 곳으로 가지 특별한 곳으로 가지 않는다. 낮은 곳으로 가는 자이지 특별한 곳으로 가는 자가 아니다.
여기, 아난다여, 어떤 사람은 친절하고 함께 사는 것을 즐거워한다. 동료수행자들도 더불어 사는 것을 기뻐한다. 그리고 그는 듣기도 하고, 많이 배우기도 하고, 견해를 꿰뚫기도 하고, 일시적인 해탈도 얻는다. 그는 몸이 무너져 죽은 뒤에 특별한 곳으로 가지 낮은 곳으로 가지 않는다. 특별한 곳으로 가는 자이지 낮은 곳으로 가는 자가 아니다.
거기서, 아난다여, 평가하는 자들이 평가한다. ― ‘이 사람에게도 그 법이 있고, 저 사람에게도 그 법이 있다. 무엇 때문에 그들 가운데 누구는 저열하고 누구는 뛰어난가?’라고. 그것은 그들을 오랫동안 손해와 괴로움으로 이끈다.
거기서, 아난다여, 친절하고 함께 사는 것을 즐거워하고, 동료수행자들도 더불어 사는 것을 기뻐하는 사람, 듣기도 하고, 많이 배우기도 하고, 견해를 꿰뚫기도 하고, 일시적인 해탈도 얻는 사람, 아난다여, 이 사람은 그러한 앞의 사람보다 더 훌륭하고 더 뛰어나다. 그 원인은 무엇인가? 참으로 아난다여, 법의 흐름이 이 사람에게 뻗친다. 그 차이를 여래와 다른 곳에서 누가 알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아난다여, 사람들에 대해 평가하는 자가 되지 않아야 한다. 사람들에 대한 평가를 맡지 않아야 한다. 참으로 아난다여, 사람들에 대한 평가를 맡는 자는 해침 당한다. 아난다여, 나 또는 나와 같은 사람이 사람들에 대한 평가를 맡을 수 있다.
여기, 아난다여, 어떤 사람은 화를 내고 자만한다. 때때로 망(望)의 법(法)들도 생긴다. 그리고 그는 듣지도 않고, 많이 배우지도 않고, 견해를 꿰뚫지도 못하고, 일시적인 해탈도 얻지 못한다. 그는 몸이 무너져 죽은 뒤에 낮은 곳으로 가지 특별한 곳으로 가지 않는다. 낮은 곳으로 가는 자이지 특별한 곳으로 가는 자가 아니다.
여기, 아난다여, 어떤 사람은 화를 내고 자만한다. 때때로 망의 법들도 생긴다. 그러나 그는 듣기도 하고, 많이 배우기도 하고, 견해를 꿰뚫기도 하고, 일시적인 해탈도 얻는다. 그는 몸이 무너져 죽은 뒤에 특별한 곳으로 가지 낮은 곳으로 가지 않는다. 특별한 곳으로 가는 자이지 낮은 곳으로 가는 자가 아니다.
거기서, 아난다여, 평가하는 자들이 평가한다. … 아난다여, 나 또는 나와 같은 사람이 사람들에 대한 평가를 맡을 수 있다.
여기, 아난다여, 어떤 사람은 화를 내고 자만한다. 때때로 말의 행(行)들도 생긴다. 그리고 그는 듣지도 않고, 많이 배우지도 않고, 견해를 꿰뚫지도 못하고, 일시적인 해탈도 얻지 못한다. 그는 몸이 무너져 죽은 뒤에 낮은 곳으로 가지 특별한 곳으로 가지 않는다. 낮은 곳으로 가는 자이지 특별한 곳으로 가는 자가 아니다.
여기, 아난다여, 어떤 사람은 화를 내고 자만한다. 때때로 말의 행(行)들도 생긴다. 그러나 그는 듣기도 하고, 많이 배우기도 하고, 견해를 꿰뚫기도 하고, 일시적인 해탈도 얻는다. 그는 몸이 무너져 죽은 뒤에 특별한 곳으로 가지 낮은 곳으로 가지 않는다. 특별한 곳으로 가는 자이지 낮은 곳으로 가는 자가 아니다.
거기서, 아난다여, 평가하는 자들이 평가한다. ― ‘이 사람에게도 그 법이 있고, 저 사람에게도 그 법이 있다. 무엇 때문에 그들 가운데 누구는 저열하고 누구는 뛰어난가?’라고. 그것은 그들을 오랫동안 손해와 괴로움으로 이끈다.
거기서, 아난다여, 화를 내고 자만하며, 때때로 말의 행(行)들도 생기는 사람, 듣기도 하고, 많이 배우기도 하고, 견해를 꿰뚫기도 하고, 일시적인 해탈도 얻는 사람, 아난다여, 이 사람은 그러한 앞의 사람보다 더 훌륭하고 더 뛰어나다. 그 원인은 무엇인가? 참으로 아난다여, 법의 흐름이 이 사람에게 뻗친다. 그 차이를 여래와 다른 곳에서 누가 알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아난다여, 사람들에 대해 평가하는 자가 되지 않아야 한다. 사람들에 대한 평가를 맡지 않아야 한다. 참으로 아난다여, 사람들에 대한 평가를 맡는 자는 해침 당한다. 아난다여, 나 또는 나와 같은 사람이 사람들에 대한 평가를 맡을 수 있다.
“아난다여, 어리석고, 총명하지 못하고, 여성이고, 여자의 상(想)을 가진 미가살라 여신자가 누구인가? 다른 사람들의 갈 곳에 대한 앎을 가졌는가? 이것이, 아난다여,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이런 여섯 가지 사람들이다.
아난다여, 뿌라나가 갖춘 계(戒)를 이시닷따가 그렇게 갖추었다면, 여기서 뿌라나는 다른 이시닷따가 갈 곳에 가지 않았을 것이다. 아난다여, 이시닷따가 갖춘 지혜를 뿌라나가 그렇게 갖추었다면, 여기서 이시닷따는 다른 뿌라나가 갈 곳에 가지 않았을 것이다. 이렇게, 아난다여, 이 사람들은 둘 다 하나의 요소가 저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