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nibbedhikasuttaṃ (AN 6.63-꿰뚫음 경)
6. mahāvaggo, 9. nibbedhikasuttaṃ (AN 6.63-꿰뚫음 경)
“비구들이여, 꿰뚫음의 방법에 대한 법문을 설할 것이다. 듣고 잘 사고하라. 나는 말하겠다.” “알겠습니다, 대덕이시여.”라고 그 비구들은 세존에게 대답했다. 세존은 이렇게 말했다. —
“비구들이여, 무엇이 그 꿰뚫음의 방법에 대한 법문인가? 비구들이여, 소유의 사유들을 알아야 한다. 소유의 사유들의 인연이고 기원을 알아야 한다. 소유의 사유들의 차별을 알아야 한다. 소유의 사유들의 보(報)를 알아야 한다. 소유의 사유들의 소멸을 알아야 한다. 소유의 사유들의 소멸로 이끄는 실천을 알아야 한다.
비구들이여, 경험[수(受)]을 알아야 한다. 경험들의 인연이고 기원을 알아야 한다. 경험들의 차별을 알아야 한다. 경험들의 보(報)를 알아야 한다. 경험들의 소멸을 알아야 한다. 경험들의 소멸로 이끄는 실천을 알아야 한다.
비구들이여, 경향[상(想)]을 알아야 한다. 경향들의 인연이고 기원을 알아야 한다. 경향들의 차별을 알아야 한다. 경향들의 보(報)를 알아야 한다. 경향들의 소멸을 알아야 한다. 경향들의 소멸로 이끄는 실천을 알아야 한다.
비구들이여, 번뇌[루(漏)]들을 알아야 한다. 번뇌들의 인연이고 기원을 알아야 한다. 번뇌들의 차별을 알아야 한다. 번뇌들의 보(報)를 알아야 한다. 번뇌들의 소멸을 알아야 한다. 번뇌들의 소멸로 이끄는 실천을 알아야 한다.
비구들이여, 업(業)을 알아야 한다. 업들의 인연이고 기원을 알아야 한다. 업들의 차별을 알아야 한다. 업들의 보(報)를 알아야 한다. 업들의 소멸을 알아야 한다. 업들의 소멸로 이끄는 실천을 알아야 한다.
비구들이여, 괴로움[고(苦)]을 알아야 한다. 괴로움의 인연이고 기원을 알아야 한다. 괴로움의 차별을 알아야 한다. 괴로움의 보(報)를 알아야 한다. 괴로움의 소멸을 알아야 한다.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실천을 알아야 한다.
‘비구들이여, 소유의 사유들을 알아야 한다. 소유의 사유들의 인연이고 기원을 알아야 한다. 소유의 사유들의 차별을 알아야 한다. 소유의 사유들의 보(報)를 알아야 한다. 소유의 사유들의 소멸을 알아야 한다. 소유의 사유들의 소멸로 이끄는 실천을 알아야 한다.’라고 말했다. 이것은 무엇을 연(緣)하여 말했는가? 비구들이여, 다섯 가지 이런 소유의 사유에 묶인 것이 있다. 원하고 좋아하고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고 소유의 사유를 수반하며 좋아하기 마련인 안(眼)으로 인식되는 색(色)들, … 이(耳)로 인식되는 성(聲)들, … 비(鼻)로 인식되는 향(香)들, … 설(舌)로 인식되는 미(味)들, … 원하고 좋아하고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고 소유의 사유를 수반하며 좋아하기 마련인 신(身)으로 인식되는 촉(觸)들이다. 비구들이여, 이것들은 소유의 사유들이 아니다. 성자의 율(律)에서 이것들은 소유의 사유에 묶인 것들이라고 불린다.
“saṅkapparāgo purisassa kāmo,nete kāmā yāni citrāni loke.saṅkapparāgo purisassa kāmo,tiṭṭhanti citrāni tatheva loke.athettha dhīrā vinayanti chandan”ti.
사람의 소유의 사유는 탐(貪)이 함께한 사유이다.
세상에 있는 다채로운 것들은 소유의 사유들이 아니다.
사람의 소유의 사유는 탐(貪)이 함께한 사유이다.
세상에 있는 다채로운 것들은 단지 사실로서 머물 뿐이고,
여기서 현명한 사람들은 관심을 제어한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무엇이 소유의 사유들의 인연이고 기원인가? 비구들이여, 촉(觸)이 소유의 사유들의 인연이고 기원이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무엇이 소유의 사유들의 차별인가? 비구들이여, 색(色)들에 대한 소유의 사유가 다르고, 성(聲)들에 대한 소유의 사유가 다르고, 향(香)들에 대한 소유의 사유가 다르고, 미(味)들에 대한 소유의 사유가 다르고, 촉(觸)들에 대한 소유의 사유가 다르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소유의 사유들의 차별이라고 불린다.
비구들이여, 무엇이 소유의 사유들의 보(報)인가? 비구들이여, 소유의 사유를 하는 자가 그때마다 공덕과 연결되거나 악덕과 연결된 자기 존재를 생겨나게 하는 것, 비구들이여, 이것이 소유의 사유들의 보(報)라고 불린다.
비구들이여, 무엇이 소유의 사유들의 소멸인가? 비구들이여, 촉(觸)의 소멸이 소유의 사유의 소멸이다. 오직 이것, 정견(正見), 정사유(正思惟), 정어(正語), 정업(正業), 정명(正命), 정정진(正精進), 정념(正念), 정정(正定)의 여덟 요소로 구성된 성스러운 길[팔정도(八正道)]이 소유의 사유들의 소멸로 이끄는 실천이다.
비구들이여, 성스러운 제자가 소유의 사유를 이렇게 분명히 알고, 소유의 사유들의 인연이고 기원을 이렇게 분명히 알고, 소유의 사유들의 차별을 이렇게 분명히 알고, 소유의 사유들의 보(報)를 이렇게 분명히 알고, 소유의 사유들의 소멸을 이렇게 분명히 알고, 소유의 사유들의 소멸로 이끄는 실천을 이렇게 분명히 알 때, 그는 소유의 사유들을 소멸하는 꿰뚫음의 범행(梵行)을 분명히 안다. ‘소유의 사유들을 알아야 한다. 소유의 사유들의 인연이고 기원을 알아야 한다. 소유의 사유들의 차별을 알아야 한다. 소유의 사유들의 보(報)를 알아야 한다. 소유의 사유들의 소멸을 알아야 한다. 소유의 사유들의 소멸로 이끄는 실천을 알아야 한다.’라고 말한 것은 이것을 연(緣)하여 말했다.
‘비구들이여, 경험[수(受)]을 알아야 한다. 경험들의 인연이고 기원을 알아야 한다. 경험들의 차별을 알아야 한다. 경험들의 보(報)를 알아야 한다. 경험들의 소멸을 알아야 한다. 경험들의 소멸로 이끄는 실천을 알아야 한다.’라고 말했다. 이것은 무엇을 연(緣)하여 말했는가? 비구들이여, 즐거움의 경험, 괴로움의 경험,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음의 경험의 이런 세 가지 경험이 있다.
비구들이여, 무엇이 경험들의 인연이고 기원인가? 비구들이여, 촉(觸)이 경험들의 인연이고 기원이다.
비구들이여, 무엇이 경험들의 차별인가? 비구들이여, 개발되지 않은 즐거움의 경험이 있고, 개발된 즐거움의 경험이 있다. 개발되지 않은 괴로움의 경험이 있고, 개발된 괴로움의 경험이 있다. 개발되지 않은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음의 경험이 있고, 개발된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음의 경험이 있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경험들의 차별이라고 불린다.
비구들이여, 무엇이 경험들의 보(報)인가? 비구들이여, 경험하는 자가 그때마다 공덕과 연결되거나 악덕과 연결된 자기 존재를 생겨나게 하는 것, 비구들이여, 이것이 경험들의 보(報)라고 불린다.
비구들이여, 무엇이 경험들의 소멸인가? 비구들이여, 촉(觸)의 소멸이 경험들의 소멸이다. 오직 이것, 정견(正見), 정사유(正思惟), 정어(正語), 정업(正業), 정명(正命), 정정진(正精進), 정념(正念), 정정(正定)의 여덟 요소로 구성된 성스러운 길[팔정도(八正道)]이 경험들의 소멸로 이끄는 실천이다.
비구들이여, 성스러운 제자가 경험을 이렇게 분명히 알고, 경험들의 인연이고 기원을 이렇게 분명히 알고, 경험들의 차별을 이렇게 분명히 알고, 경험들의 보(報)를 이렇게 분명히 알고, 경험들의 소멸을 이렇게 분명히 알고, 경험들의 소멸로 이끄는 실천을 이렇게 분명히 알 때, 그는 경험들을 소멸하는 꿰뚫음의 범행(梵行)을 분명히 안다. ‘비구들이여, 경험[수(受)]을 알아야 한다. 경험들의 인연이고 기원을 알아야 한다. 경험들의 차별을 알아야 한다. 경험들의 보(報)를 알아야 한다. 경험들의 소멸을 알아야 한다. 경험들의 소멸로 이끄는 실천을 알아야 한다.’라고 말한 것은 이것을 연(緣)하여 말했다.
‘비구들이여, 경향[상(想)]을 알아야 한다. 경향들의 인연이고 기원을 알아야 한다. 경향들의 차별을 알아야 한다. 경향들의 보(報)를 알아야 한다. 경향들의 소멸을 알아야 한다. 경향들의 소멸로 이끄는 실천을 알아야 한다.’라고 말했다. 이것은 무엇을 연(緣)하여 말했는가? 비구들이여, 색상(色想), 성상(聲想), 향상(香想), 미상(味想), 촉상(觸想), 법상(法想)의 여섯 가지 상(想)이 있다.
비구들이여, 무엇이 경향들의 인연이고 기원인가? 비구들이여, 촉(觸)이 경향들의 인연이고 기원이다.
비구들이여, 무엇이 경향들의 차별인가? 비구들이여, 색(色)들에 대한 경향이 다르고, 성(聲)들에 대한 경향이 다르고, 향(香)들에 대한 경향이 다르고, 미(味)들에 대한 경향이 다르고, 촉(觸)들에 대한 경향이 다르고, 법(法)들에 대한 경향이 다르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경향들의 차별이라고 불린다.
비구들이여, 무엇이 경향들의 보(報)인가? 비구들이여, ‘경향은 삶을 익게 하는 것이다. 그것을 거듭 상(想)하는 대로 거듭 그렇게 삶을 산다, 이렇게 경향을 가진 자가 있다.’라고 나는 말한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경향들의 보(報)라고 불린다.
비구들이여, 무엇이 경향들의 소멸인가? 비구들이여, 촉(觸)의 소멸이 경향들의 소멸이다. 오직 이것, 정견(正見), 정사유(正思惟), 정어(正語), 정업(正業), 정명(正命), 정정진(正精進), 정념(正念), 정정(正定)의 여덟 요소로 구성된 성스러운 길[팔정도(八正道)]이 경향들의 소멸로 이끄는 실천이다.
비구들이여, 성스러운 제자가 경향을 이렇게 분명히 알고, 경향들의 인연이고 기원을 이렇게 분명히 알고, 경향들의 차별을 이렇게 분명히 알고, 경향들의 보(報)를 이렇게 분명히 알고, 경향들의 소멸을 이렇게 분명히 알고, 경향들의 소멸로 이끄는 실천을 이렇게 분명히 알 때, 그는 경향들을 소멸하는 꿰뚫음의 범행(梵行)을 분명히 안다. ‘비구들이여, 경향[상(想)]을 알아야 한다. 경향들의 인연이고 기원을 알아야 한다. 경향들의 차별을 알아야 한다. 경향들의 보(報)를 알아야 한다. 경향들의 소멸을 알아야 한다. 경향들의 소멸로 이끄는 실천을 알아야 한다.’라고 이렇게 말한 것은 이것을 연(緣)하여 말했다
‘비구들이여, 번뇌[루(漏)]들을 알아야 한다. 번뇌들의 인연이고 기원을 알아야 한다. 번뇌들의 차별을 알아야 한다. 번뇌들의 보(報)를 알아야 한다. 번뇌들의 소멸을 알아야 한다. 번뇌들의 소멸로 이끄는 실천을 알아야 한다.’라고 말했다. 이것은 무엇을 연(緣)하여 말했는가? 비구들이여, 소유의 번뇌[욕루(慾漏)], 존재의 번뇌[유루(有漏)], 무명의 번뇌[무명루(無明漏)]의 세 가지 번뇌가 있다.
비구들이여, 무엇이 번뇌들의 인연이고 기원인가? 비구들이여, 무명(無明)이 번뇌들의 인연이고 기원이다.
비구들이여, 무엇이 번뇌들의 차별인가? 비구들이여, 지옥으로 이끄는 번뇌들이 있고. 축생의 모태로 이끄는 번뇌들이 있고, 아귀의 영역으로 이끄는 번뇌들이 있고, 인간 세상으로 이끄는 번뇌들이 있고, 하늘 세상으로 이끄는 번뇌들이 있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번뇌들의 차별이라고 불린다.
비구들이여, 무엇이 번뇌들의 보(報)인가? 비구들이여, 무명(無明)이 스민 자가 그때마다 공덕과 연결되거나 악덕과 연결된 자기 존재를 생겨나게 하는 것, 비구들이여, 이것이 번뇌들의 보(報)라고 불린다.
비구들이여, 무엇이 번뇌의 소멸인가? 비구들이여, 무명(無明)의 소멸이 번뇌들의 소멸이다. 오직 이것, 정견(正見), 정사유(正思惟), 정어(正語), 정업(正業), 정명(正命), 정정진(正精進), 정념(正念), 정정(正定)의 여덟 요소로 구성된 성스러운 길[팔정도(八正道)]이 번뇌들의 소멸로 이끄는 실천이다.
비구들이여, 성스러운 제자가 번뇌를 이렇게 분명히 알고, 번뇌들의 인연이고 기원을 이렇게 분명히 알고, 번뇌들의 차별을 이렇게 분명히 알고, 번뇌들의 보(報)를 이렇게 분명히 알고, 번뇌들의 소멸을 이렇게 분명히 알고, 번뇌들의 소멸로 이끄는 실천을 이렇게 분명히 알 때, 그는 번뇌를 소멸하는 꿰뚫음의 범행(梵行)을 분명히 안다. ‘비구들이여, 번뇌들을 알아야 한다. 번뇌들의 인연이고 기원을 알아야 한다. 번뇌들의 차별을 알아야 한다. 번뇌들의 보(報)를 알아야 한다. 번뇌들의 소멸을 알아야 한다. 번뇌들의 소멸로 이끄는 실천을 알아야 한다.’라고 말한 것은 이것을 연(緣)하여 말했다.
‘비구들이여, 업(業)을 알아야 한다. 업들의 인연이고 기원을 알아야 한다. 업들의 차별을 알아야 한다. 업들의 보(報)를 알아야 한다. 업들의 소멸을 알아야 한다. 업들의 소멸로 이끄는 실천을 알아야 한다.’라고 말했다. 이것은 무엇을 연(緣)하여 말했는가? 비구들이여, 의도가 업(業)이라고 나는 말한다. 의도한 뒤에[의도하면서] 몸에 의해, 말에 의해, 의(意)에 의해 업(業)을 짓는다.
비구들이여, 무엇이 업들의 인연이고 기원인가? 비구들이여, 촉(觸)이 업들의 인연이고 기원이다.
비구들이여, 무엇이 업들의 차별인가? 비구들이여, 지옥이 경험될 업이 있고. 축생의 모태가 경험될 업이 있고, 아귀의 영역이 경험될 업이 있고, 인간 세상이 경험될 업이 있고, 하늘 세상이 경험될 업이 있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업들의 차별이라고 불린다.
비구들이여, 무엇이 업들의 보(報)인가? 비구들이여, 지금여기[금생(今生)]이거나 걸어서 닿는 곳[내생(來生)]이거나 그 후에 오는 생(生)의 세 겹의 업들의 보(報)를 나는 말한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업들의 보(報)라고 불린다.
비구들이여, 무엇이 업들의 소멸인가? 비구들이여, 촉(觸)의 소멸이 업들의 소멸이다. 오직 이것, 정견(正見), 정사유(正思惟), 정어(正語), 정업(正業), 정명(正命), 정정진(正精進), 정념(正念), 정정(正定)의 여덟 요소로 구성된 성스러운 길[팔정도(八正道)]이 업들의 소멸로 이끄는 실천이다.
비구들이여, 성스러운 제자가 업을 이렇게 분명히 알고, 업들의 인연이고 기원을 이렇게 분명히 알고, 업들의 차별을 이렇게 분명히 알고, 업들의 보(報)를 이렇게 분명히 알고, 업들의 소멸을 이렇게 분명히 알고, 업들의 소멸로 이끄는 실천을 이렇게 분명히 알 때, 그는 업을 소멸하는 꿰뚫음의 범행(梵行)을 분명히 안다. ‘비구들이여, 업(業)을 알아야 한다. 업들의 인연이고 기원을 알아야 한다. 업들의 차별을 알아야 한다. 업들의 보(報)를 알아야 한다. 업들의 소멸을 알아야 한다. 업들의 소멸로 이끄는 실천을 알아야 한다.’라고 이렇게 말한 것은 이것을 연(緣)하여 말했다.
‘비구들이여, 괴로움[고(苦)]을 알아야 한다. 괴로움의 인연이고 기원을 알아야 한다. 괴로움의 차별을 알아야 한다. 괴로움의 보(報)를 알아야 한다. 괴로움의 소멸을 알아야 한다.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실천을 알아야 한다.’라고 말했다. 이것은 무엇을 연(緣)하여 말했는가? 태어남[생(生)]도 괴로움이고, 늙음[노(老)]도 괴로움이고, 병듦[병(病)]도 괴로움이고, 죽음[사(死)]도 괴로움이다. 슬픔-비탄-고통-고뇌-절망[수비고우뇌(愁悲苦憂惱)]도 괴로움이다. 구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도 괴로움[구부득고(求不得苦)]이다. 간략히 말하면, 오취온(五取蘊)이 괴로움이다[오취온고(五取蘊苦)].
비구들이여, 무엇이 괴로움의 인연이고 기원인가? 비구들이여, 애(愛)가 괴로움의 인연이고 기원이다.
비구들이여, 무엇이 괴로움의 차별인가? 비구들이여, 괴로움은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 있고,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있고. 느리게 바래는 것이 있고, 빠르게 바래는 것이 있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괴로움의 차별이라고 불린다.
비구들이여, 무엇이 괴로움의 보(報)인가? 여기, 비구들이여, 어떤 괴로움에 의해 사로잡히고, 소진된 심(心)을 가진 어떤 사람은 슬퍼하고 힘들어하고 비탄에 빠지고 가슴을 치며 울부짖고 당황한다. 어떤 괴로움에 의해 사로잡히고, 소진딘 심(心)을 가진 어떤 사람은 ‘누가 이 괴로움의 소멸을 위한 한 구절이나 두 구절을 아는가?’라고 밖에서 찾는다. 비구들이여, 당황함을 익게 하거나 찾음을 익게 하는 괴로움을 나는 말한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괴로움의 보(報)라고 불린다.
비구들이여, 무엇이 괴로움의 소멸인가? 비구들이여, 애(愛)의 소멸이 괴로움의 소멸이다. 오직 이것, 정견(正見), 정사유(正思惟), 정어(正語), 정업(正業), 정명(正命), 정정진(正精進), 정념(正念), 정정(正定)의 여덟 요소로 구성된 성스러운 길[팔정도(八正道)]이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실천이다.
비구들이여, 성스러운 제자가 괴로움을 이렇게 분명히 알고, 괴로움의 인연이고 기원을 이렇게 분명히 알고, 괴로움의 차별을 이렇게 분명히 알고, 괴로움의 보(報)를 이렇게 분명히 알고, 괴로움의 소멸을 이렇게 분명히 알고,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실천을 이렇게 분명히 알 때, 그는 괴로움을 소멸하는 꿰뚫음의 범행(梵行)을 분명히 안다. ‘비구들이여, 괴로움[고(苦)]을 알아야 한다. 괴로움의 인연이고 기원을 알아야 한다. 괴로움의 차별을 알아야 한다. 괴로움의 보(報)를 알아야 한다. 괴로움의 소멸을 알아야 한다.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실천을 알아야 한다.’라고 말한 것은 이것을 연(緣)하여 말했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그 꿰뚫음의 방법에 대한 법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