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koṭṭhikasuttaṃ(AN 9.13-꼿티까 경)
2. sīhanādavaggo, 3. koṭṭhikasuttaṃ(AN 9.13-꼿티까 경)
그때 마하꼿티까 존자가 사리뿟따 존자에게 왔다. 와서는 사리뿟따 존자와 함께 인사를 나누었다. 유쾌하고 기억할만한 이야기를 주고받은 뒤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마하꼿티까 존자가 사리뿟따 존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 “도반 사리뿟따여, ‘지금여기에서 경험될 업(業)이 나에게 내생에 경험될 업이 되기를!’이라는 이런 목적을 위해 세존에게서 범행의 삶을 삽니까?”라고. “아닙니다, 도반이여.”
“도반 사리뿟따여, ‘락(樂)이 경험될 업(業)이 나에게 고(苦)가 경험될 업이 되기를!’이라는 이런 목적을 위해 세존에게서 범행의 삶을 삽니까?”라고. “아닙니다, 도반이여.”
“도반 사리뿟따여, ‘고(苦)가 경험될 업(業)이 나에게 락(樂)이 경험될 업이 되기를!’이라는 이런 목적을 위해 세존에게서 범행의 삶을 삽니까?”라고. “아닙니다, 도반이여.”
“도반 사리뿟따여, ‘완전히 익어 경험될 업(業)이 나에게 완전히 익어 경험되지 않을 업이 되기를!’이라는 이런 목적을 위해 세존에게서 범행의 삶을 삽니까?”라고. “아닙니다, 도반이여.”
“도반 사리뿟따여, ‘완전히 익어 경험되지 않을 업(業)이 나에게 완전히 익어 경험될 업이 되기를!’이라는 이런 목적을 위해 세존에게서 범행의 삶을 삽니까?”라고. “아닙니다, 도반이여.”
“도반 사리뿟따여, ‘많이 경험될 업(業)이 나에게 조금 경험될 업이 되기를!’이라는 이런 목적을 위해 세존에게서 범행의 삶을 삽니까?”라고. “아닙니다, 도반이여.”
“도반 사리뿟따여, ‘조금 경험될 업(業)이 나에게 많이 경험될 업이 되기를!’이라는 이런 목적을 위해 세존에게서 범행의 삶을 삽니까?”라고. “아닙니다, 도반이여.”
“도반 사리뿟따여, ‘경험될 업(業)이 나에게 경험되지 않을 업이 되기를!’이라는 이런 목적을 위해 세존에게서 범행의 삶을 삽니까?”라고. “아닙니다, 도반이여.”
“도반 사리뿟따여, ‘경험되지 않을 업(業)이 나에게 경험될 업이 되기를!’이라는 이런 목적을 위해 세존에게서 범행의 삶을 삽니까?”라고. “아닙니다, 도반이여.”
“‘도반 사리뿟따여, ‘지금여기에서 경험될 업(業)이 나에게 내생에 경험될 업이 되기를!’이라는 이런 목적을 위해 세존에게서 범행의 삶을 삽니까?’라고 이런 질문을 받고서 ‘아닙니다, 도반이여.’라고 말했습니다.
‘도반 사리뿟따여, ‘내생에 경험될 업(業)이 나에게 지금여기에서 경험될 업이 되기를!’이라는 이런 목적을 위해 세존에게서 범행의 삶을 삽니까?’라고 이런 질문을 받고서 ‘아닙니다, 도반이여.’라고 말했습니다.
‘도반 사리뿟따여, ‘락(樂)이 경험될 업(業)이 나에게 고(苦)가 경험될 업이 되기를!’이라는 이런 목적을 위해 세존에게서 범행의 삶을 삽니까?’라고 이런 질문을 받고서 ‘아닙니다, 도반이여.’라고 말했습니다.
‘도반 사리뿟따여, ‘고(苦)가 경험될 업(業)이 나에게 락(樂)이 경험될 업이 되기를!’이라는 이런 목적을 위해 세존에게서 범행의 삶을 삽니까?’라고 이런 질문을 받고서 ‘아닙니다, 도반이여.’라고 말했습니다.
‘도반 사리뿟따여, ‘완전히 익어 경험될 업(業)이 나에게 완전히 익어 경험되지 않을 업이 되기를!’이라는 이런 목적을 위해 세존에게서 범행의 삶을 삽니까?’라고 이런 질문을 받고서 ‘아닙니다, 도반이여.’라고 말했습니다.
‘도반 사리뿟따여, ‘완전히 익어 경험되지 않을 업(業)이 나에게 완전히 익어 경험될 업이 되기를!’이라는 이런 목적을 위해 세존에게서 범행의 삶을 삽니까?’라고 이런 질문을 받고서 ‘아닙니다, 도반이여.’라고 말했습니다.
‘도반 사리뿟따여, ‘많이 경험될 업(業)이 나에게 조금 경험될 업이 되기를!’이라는 이런 목적을 위해 세존에게서 범행의 삶을 삽니까?’라고 이런 질문을 받고서 ‘아닙니다, 도반이여.’라고 말했습니다.
‘도반 사리뿟따여, ‘조금 경험될 업(業)이 나에게 많이 경험될 업이 되기를!’이라는 이런 목적을 위해 세존에게서 범행의 삶을 삽니까?’라고 이런 질문을 받고서 ‘아닙니다, 도반이여.’라고 말했습니다.
‘도반 사리뿟따여, ‘경험될 업(業)이 나에게 경험되지 않을 업이 되기를!’이라는 이런 목적을 위해 세존에게서 범행의 삶을 삽니까?’라고 이런 질문을 받고서 ‘아닙니다, 도반이여.’라고 말했습니다.
‘도반 사리뿟따여, ‘경험되지 않을 업(業)이 나에게 경험될 업이 되기를!’이라는 이런 목적을 위해 세존에게서 범행의 삶을 삽니까?’라고 이런 질문을 받고서 ‘아닙니다, 도반이여.’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 도반이여, 이제 무슨 목적을 위해 세존에게서 범행의 삶을 삽니까?”
“도반이여,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성취하지 못하고 체험하지 못하고 실현하지 못한 것을 알고 보고 성취하고 체험하고 실현하기 위해 세존에게서 범행의 삶을 삽니다.”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성취하지 못하고 체험하지 못하고 실현하지 못한 무엇을 알고 보고 성취하고 체험하고 실현하기 위해 세존에게서 범행의 삶을 삽니까?”) “도반이여, ‘이것이 고(苦)다.’라고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성취하지 못하고 체험하지 못하고 실현하지 못합니다. 그것을 알고 보고 성취하고 체험하고 실현하기 위해 세존에게서 범행의 삶을 삽니다. 도반이여, ‘이것이 고집(苦集)이다.’라고 … 도반이여, ‘이것이 고멸(苦滅)이다.’라고 … 도반이여, ‘이것이 고멸(苦滅)로 이끄는 실천이다.’라고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성취하지 못하고 체험하지 못하고 실현하지 못합니다. 그것을 알고 보고 성취하고 체험하고 실현하기 위해 세존에게서 범행의 삶을 삽니다. 도반이여,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성취하지 못하고 체험하지 못하고 실현하지 못한 이것을 알고 보고 성취하고 체험하고 실현하기 위해 세존에게서 범행의 삶을 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