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nibbānasukhasuttaṃ (AN 9.34-열반락(涅槃樂) 경)
4. mahāvaggo, 3. nibbānasukhasuttaṃ (AN 9.34-열반락(涅槃樂) 경)
한때 사리뿟따 존자는 라자가하에서 웰루와나의 다람쥐 보호구역에 머물렀다. 거기서 사리뿟따 존자는 비구들에게 말했다. ㅡ “도반들이여, 열반은 행복입니다. 도반들이여, 열반은 행복입니다.”라고. 이렇게 말하자 우다이 존자가 사리뿟따 존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ㅡ “도반 사리뿟따여, 경험되는 것이 없는 여기에 어떻게 행복이 있습니까?”라고. “도반이여, 여기서 경험되는 것이 없는 그것이 행복입니다. 도반이여, 다섯 가지 소유의 사유에 묶인 것이 있습니다. 무엇이 다섯입니까? 원하고 좋아하고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고 소유의 사유를 수반하며 탐(貪)하기 마련인 안(眼)으로 인식되는 색(色)들, … 이(耳)로 인식되는 성(聲)들, … 비(鼻)로 인식되는 향(香)들, … 설(舌)로 인식되는 미(味)들, … 원하고 좋아하고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고 소유의 사유를 수반하며 탐(貪)하기 마련인 신(身)으로 인식되는 촉(觸)들 ㅡ 도반이여, 이런 다섯 가지 소유의 사유에 묶인 것이 있습니다. 도반이여, 이런 다섯 가지 소유의 사유에 묶인 것을 연(緣)하여 생기는 즐거움과 기쁨, 이것이 소유의 즐거움[욕락(慾樂)]이라고 불립니다.
도반이여, 여기 비구는 소유의 삶으로부터 벗어나고, 불선법(不善法)들로부터 벗어나서, 위딱까가 있고 위짜라가 있고 떨침에서 생긴 기쁨과 즐거움의 초선(初禪)을 성취하여 머뭅니다. 도반이여, 만약 이런 머묾으로 머무는 그 비구에게 소유의 사유가 함께하는 상(想)과 작의(作意)가 발생하면, 그것은 병(病)입니다. 예를 들면, 도반이여, 행복한 자에게 병(病)을 위한 만큼[병든 만큼]의 괴로움이 생길 것입니다. 이와 같이 그 소유의 사유가 함께하는 상(想)과 작의(作意)가 발생합니다. 그것은 병입니다. 도반이여, 병은 괴로움이라고 세존은 말씀하셨습니다. 도반이여, 이런 방법에 의해서도 열반은 행복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다시, 도반이여, 비구는 위딱까와 위짜라의 가라앉음으로 인해, 안으로 평온함과 마음의 집중된 상태가 되어, 위딱까도 없고 위짜라도 없이, 삼매에서 생긴 기쁨과 즐거움의 제이선(第二禪)을 성취하여 머뭅니다. 도반이여, 만약 이런 머묾으로 머무는 그 비구에게 위딱까가 함께하는 상(想)과 작의(作意)가 발생하면, 그것은 병(病)입니다. 예를 들면, 도반이여, 행복한 자에게 병(病)을 위한 만큼[병든 만큼]의 괴로움이 생길 것입니다. 이와 같이 그 위딱까가 함께하는 상(想)과 작의(作意)가 발생합니다. 그것은 병입니다. 도반이여, 병은 괴로움이라고 세존은 말씀하셨습니다. 도반이여, 이런 방법에 의해서도 열반은 행복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다시, 도반이여, 비구는 기쁨의 빛바램으로부터 평정하게 머물고, 사띠-삼빠자나 하면서, 몸으로 즐거움을 경험한다. 성인들이 '평정을 가진 자, 사띠를 가진 자, 즐거움에 머무는 자[사념락주(捨念樂住)].'라고 말하는 제삼선(第三禪)을 성취하여 머뭅니다. 도반이여, 만약 이런 머묾으로 머무는 그 비구에게 기쁨이 함께하는 상(想)과 작의(作意)가 발생하면, 그것은 병(病)입니다. 예를 들면, 도반이여, 행복한 자에게 병(病)을 위한 만큼[병든 만큼]의 괴로움이 생길 것입니다. 이와 같이 그 기쁨이 함께하는 상(想)과 작의(作意)가 발생합니다. 그것은 병입니다. 도반이여, 병은 괴로움이라고 세존은 말씀하셨습니다. 도반이여, 이런 방법에 의해서도 열반은 행복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다시, 도반이여, 비구는 즐거움의 버림과 괴로움의 버림으로부터, 이미 만족과 불만들의 사라짐으로부터, 괴로움도 즐거움도 없고 평정과 청정한 사띠[사념청정(捨念淸淨)]의 제사선(第四禪)을 성취하여 머뭅니다. 도반이여, 만약 이런 머묾으로 머무는 그 비구에게 평정이 함께하는 상(想)과 작의(作意)가 발생하면, 그것은 병(病)입니다. 예를 들면, 도반이여, 행복한 자에게 병(病)을 위한 만큼[병든 만큼]의 괴로움이 생길 것입니다. 이와 같이 그 평정이 함께하는 상(想)과 작의(作意)가 발생합니다. 그것은 병입니다. 도반이여, 병은 괴로움이라고 세존은 말씀하셨습니다. 도반이여, 이런 방법에 의해서도 열반은 행복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다시, 도반이여, 비구는 색상(色想)들의 완전한 초월로부터, 저항의 상(想)들의 사라짐으로부터, 다양함의 상(想)들을 작의 않음으로부터 ‘무한한 공간’이라는 공무변처(空無邊處)를 성취하여 머뭅니다. 도반이여, 만약 이런 머묾으로 머무는 그 비구에게 색(色)이 함께하는 상(想)과 작의(作意)가 발생하면, 그것은 병(病)입니다. 예를 들면, 도반이여, 행복한 자에게 병(病)을 위한 만큼[병든 만큼]의 괴로움이 생길 것입니다. 이와 같이 그 색(色)이 함께하는 상(想)과 작의(作意)가 발생합니다. 그것은 병입니다. 도반이여, 병은 괴로움이라고 세존은 말씀하셨습니다. 도반이여, 이런 방법에 의해서도 열반은 행복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다시, 도반이여, 비구는 공무변처를 완전히 초월하고 ‘무한한 식(識)’이라는 식무변처(識無邊處)를 성취하여 머뭅니다. 도반이여, 만약 이런 머묾으로 머무는 그 비구에게 공무변처(空無邊處)가 함께하는 상(想)과 작의(作意)가 발생하면, 그것은 병(病)입니다. 예를 들면, 도반이여, 행복한 자에게 병(病)을 위한 만큼[병든 만큼]의 괴로움이 생길 것입니다. 이와 같이 그 공무변처(空無邊處)가 함께하는 상(想)과 작의(作意)가 발생합니다. 그것은 병입니다. 도반이여, 병은 괴로움이라고 세존은 말씀하셨습니다. 도반이여, 이런 방법에 의해서도 열반은 행복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다시, 도반이여, 비구는 식무변처를 완전히 초월하고 ‘아무 것도 없다.’라는 무소유처(無所有處)를 성취하여 머뭅니다. 도반이여, 만약 이런 머묾으로 머무는 그 비구에게 식무변처(識無邊處)가 함께하는 상(想)과 작의(作意)가 발생하면, 그것은 병(病)입니다. 예를 들면, 도반이여, 행복한 자에게 병(病)을 위한 만큼[병든 만큼]의 괴로움이 생길 것입니다. 이와 같이 그 식무변처(識無邊處)가 함께하는 상(想)과 작의(作意)가 발생합니다. 그것은 병입니다. 도반이여, 병은 괴로움이라고 세존은 말씀하셨습니다. 도반이여, 이런 방법에 의해서도 열반은 행복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다시, 도반이여, 비구는 무소유처를 완전히 초월하고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를 성취하여 머뭅니다. 도반이여, 만약 이런 머묾으로 머무는 그 비구에게 무소유처(無所有處)가 함께하는 상(想)과 작의(作意)가 발생하면, 그것은 병(病)입니다. 예를 들면, 도반이여, 행복한 자에게 병(病)을 위한 만큼[병든 만큼]의 괴로움이 생길 것입니다. 이와 같이 그 무소유처(無所有處)가 함께하는 상(想)과 작의(作意)가 발생합니다. 그것은 병입니다. 도반이여, 병은 괴로움이라고 세존은 말씀하셨습니다. 도반이여, 이런 방법에 의해서도 열반은 행복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다시, 도반이여, 비구는 비상비비상처를 완전히 초월하고 상수멸(想受滅)을 성취하여 머뭅니다. 지혜로써 보면서 번뇌들이 다합니다. 도반이여, 이런 방법에 의해서도 열반은 행복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