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paṭhamakosalasuttaṃ (AN 10.29-꼬살라 경1)
3. mahāvaggo, 9. paṭhamakosalasuttaṃ (AN 10.29-꼬살라 경1)
비구들이여, 까시와 꼬살라에 관한 한, 빠세나디 꼬살라 왕의 왕국에 관한 한 거기서 빠세나디 꼬살라 왕이 으뜸이라고 알려진다. 비구들이여, 빠세나디 꼬살라 왕에게도 다른 것으로 됨이 있고 변화가 있다. 비구들이여, 이렇게 보는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는 그것에 대해서도 염오(厭惡)한다. 그것에 대해 염오하면서 으뜸에 대해 이탐(離貪)한다. 낮은 것에 대해서야 말할 것도 없다.
비구들이여, 달과 태양이 돌고, 비추어지는 방향들이 나타나는 만큼이 천(千)의 세상이다. 그 천의 세상에 천의 달과 천의 태양과 천의 산의 왕 수미산과 천의 잠부디빠와 천의 아빠라고야나와 천의 웃따라꾸루와 천의 뿝바위데하와 사천의 큰 바다와 사천의 대왕과 천의 사대왕천과 천의 삼십삼천과 천의 야마천과 천의 도솔천과 천의 화락천과 천의 타화자재천과 천의 범천의 세상이 있다. 비구들이여, 천의 세계에 관한 한 대범천(大梵天)이 거기서 으뜸이라고 알려진다. 비구들이여, 대범천에게도 다른 것으로 됨이 있고 변화가 있다. 비구들이여, 이렇게 보는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는 그것에 대해서도 염오(厭惡)한다. 그것에 대해 염오하면서 으뜸에 대해 이탐(離貪)한다. 낮은 것에 대해서야 말할 것도 없다.
비구들이여, 이 세상이 줄어드는[진화] 때가 있다. 비구들이여, 줄어드는[진화] 세상에서 대부분의 중생들은 광음천으로 이끌린다. 의성(意成)인 그들은 거기서 희열이 음식이고, 스스로 빛나고, 허공을 다니고, 깨끗한 존재로 오랫동안 긴 시간을 머문다. 비구들이여, 진화하는[=소멸하는] 세상에서는 광음천의 신들이 으뜸이라고 알려진다. 비구들이여, 광음천의 신들에게도 다른 것으로 됨이 있고 변화가 있다. 비구들이여, 이렇게 보는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는 그것에 대해서도 염오(厭惡)한다. 그것에 대해 염오하면서 으뜸에 대해 이탐(離貪)한다. 낮은 것에 대해서야 말할 것도 없다.
비구들이여, 열 가지 이런 까시나의 영역이 있다. 어떤 열인가? 어떤 자는 위로 아래로 횡으로 둘이 아니고 제한이 없는 땅의 까시나를 상(想)한다. 어떤 자는 … 물의 까시나를 상(想)한다. 어떤 자는 … 불의 까시나를 상(想)한다. 어떤 자는 … 바람의 까시나를 상(想)한다. 어떤 자는 … 파랑의 까시나를 상(想)한다. 어떤 자는 … 노랑의 까시나를 상(想)한다. 어떤 자는 … 빨강의 까시나를 상(想)한다. 어떤 자는 … 하양의 까시나를 상(想)한다. 어떤 자는 … 공간의 까시나를 상(想)한다. 어떤 자는 위로 아래로 횡으로 둘이 아니고 제한이 없는 식(識)의 까시나를 상(想)한다. 비구들이여, 이런 열 가지 까시나의 영역이 있다.
비구들이여, 어떤 자가 위로 아래로 횡으로 둘이 아니고 제한이 없는 식(識)의 까시나를 상(想)하는 것이 이 열 가지 까시나 중 으뜸이다. 비구들이여, 이렇게 상(想)하는 중생들이 있다. 비구들이여, 이렇게 상(想)하는 중생들에게도 다른 것으로 됨이 있고 변화가 있다. 비구들이여, 이렇게 보는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는 그것에 대해서도 염오(厭惡)한다. 그것에 대해 염오하면서 으뜸에 대해 이탐(離貪)한다. 낮은 것에 대해서야 말할 것도 없다.
비구들이여, 여덟 가지 이런 정복의 경지[팔승처(八勝處)]가 있다. 어떤 여덟인가? ①어떤 자는 안으로 색상(色想)을 가지고서, 밖으로 제한된 좋은 색깔이나 나쁜 색깔을 가진 색(色)들을 본다. ‘이것들을 정복하면서 나는 알고 본다.’라는 이런 상(想)을 가진 자이다. 이것이 첫 번째 정복의 경지이다.
②어떤 자는 안으로 색상(色想)을 가지고서, 밖으로 무량한 좋은 색깔이나 나쁜 색깔을 가진 색(色)들을 본다. ‘이것들을 정복하면서 나는 알고 본다.’라는 이런 상(想)을 가진 자이다. 이것이 두 번째 정복의 경지이다.
③어떤 자는 안으로 무색상(無色想)을 가지고서, 밖으로 제한된 좋은 색깔이나 나쁜 색깔을 가진 색(色)들을 본다. ‘이것들을 정복하면서 나는 알고 본다.’라는 이런 상(想)을 가진 자이다. 이것이 세 번째 정복의 경지이다.
④어떤 자는 안으로 무색상(無色想)을 가지고서, 밖으로 무량한 좋은 색깔이나 나쁜 색깔을 가진 색(色)들을 본다. ‘이것들을 정복하면서 나는 알고 본다.’라는 이런 상(想)을 가진 자이다. 이것이 네 번째 정복의 경지이다.
⑤어떤 자는 안으로 무색상(無色想)을 가지고서, 밖으로 푸르고 푸른 색깔이고 푸른 모습이고 푸른 광채를 지닌 색(色)들을 본다. 예를 들면, 아마 꽃은 푸르고 푸른 색깔이고 푸른 모습이고 푸른 광채를 지녔다. 예를 들면, 양면이 모두 부드러운 와라나시 옷감이 푸르고 푸른 색깔이고 푸른 모습이고 푸른 광채를 지녔다. 이와 같이 어떤 자는 안으로 무색상(無色想)을 가지고서, 밖으로 푸르고 푸른 색깔이고 푸른 모습이고 푸른 광채를 지닌 색(色)들을 본다. ‘이것들을 정복하면서 나는 알고 본다.’라는 이런 상(想)을 가진 자이다. 이것이 다섯 번째 정복의 경지이다.
⑥어떤 자는 안으로 무색상(無色想)을 가지고서, 밖으로 노랗고 노란 색깔이고 노란 모습이고 노란 광채를 지닌 색(色)들을 본다. 예를 들면, 깐니까라 꽃은 노랗고 노란 색깔이고 노란 모습이고 노란 광채를 지녔다. 예를 들면, 양면이 모두 부드러운 와라나시 옷감이 노랗고 노란 색깔이고 노란 모습이고 노란 광채를 지녔다. 이와 같이 어떤 자는 안으로 무색상(無色想)을 가지고서, 밖으로 노랗고 노란 색깔이고 노란 모습이고 노란 광채를 지닌 색(色)들을 본다. ‘이것들을 정복하면서 나는 알고 본다.’라는 이런 상(想)을 가진 자이다. 이것이 여섯 번째 정복의 경지이다.
⑦어떤 자는 안으로 무색상(無色想)을 가지고서, 밖으로 빨갛고 빨간 색깔이고 빨간 모습이고 빨간 광채를 지닌 색(色)들을 본다. 예를 들면, 월계꽃은 빨갛고 빨간 색깔이고 빨간 모습이고 빨간 광채를 지녔다. 예를 들면, 양면이 모두 부드러운 와라나시 옷감이 빨갛고 빨간 색깔이고 빨간 모습이고 빨간 광채를 지녔다. 이와 같이 어떤 자는 안으로 무색상(無色想)을 가지고서, 밖으로 빨갛고 빨간 색깔이고 빨간 모습이고 빨간 광채를 지닌 색(色)들을 본다. ‘이것들을 정복하면서 나는 알고 본다.’라는 이런 상(想)을 가진 자이다. 이것이 일곱 번째 정복의 경지이다.
⑧어떤 자는 안으로 무색상(無色想)을 가지고서, 밖으로 희고 흰 색깔이고 흰 모습이고 흰 광채를 지닌 색(色)들을 본다. 예를 들면, 샛별은 희고 흰 색깔이고 흰 모습이고 흰 광채를 지녔다. 예를 들면, 양면이 모두 부드러운 와라나시 옷감이 희고 흰 색깔이고 흰 모습이고 흰 광채를 지녔다. 이와 같이 어떤 자는 안으로 무색상(無色想)을 가지고서, 밖으로 희고 흰 색깔이고 흰 모습이고 흰 광채를 지닌 색(色)들을 본다. ‘이것들을 정복하면서 나는 알고 본다.’라는 이런 상(想)을 가진 자이다. 이것이 여덟 번째 정복의 경지이다. 비구들이여, 이러한 여덟 가지 정복의 경지[팔승처(八勝處)]가 있다.”
비구들이여, ‘어떤 자는 안으로 무색상(無色想)을 가지고서, 밖으로 희고 흰 색깔이고 흰 모습이고 흰 광채를 지닌 색(色)들을 본다. ‘이것들을 정복하면서 나는 알고 본다.’라는 이런 상(想)을 가진 자이다.’라는 이것이 이 여덟 가지 정복의 경지 중 으뜸이다. 비구들이여, 이렇게 상(想)하는 중생들이 있다. 비구들이여, 이렇게 상(想)하는 중생들에게도 다른 것으로 됨이 있고 변화가 있다. 비구들이여, 이렇게 보는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는 그것에 대해서도 염오(厭惡)한다. 그것에 대해 염오하면서 으뜸에 대해 이탐(離貪)한다. 낮은 것에 대해서야 말할 것도 없다.
비구들이여, 네 가지 이런 실천이 있다. 어떤 넷인가? 괴롭고 실다운 지혜가 느린 실천, 괴롭고 실다운 지혜가 빠른 실천, 즐겁고 실다운 지혜가 느린 실천, 즐겁고 실다운 지혜가 빠른 실천 ㅡ 비구들이여, 이런 네 가지 실천이 있다.
비구들이여, 즐겁고 실다운 지혜가 빠른 실천이 이런 네 가지 실천 중 으뜸이다. 비구들이여, 이렇게 실천하는 중생들이 있다. 비구들이여, 이렇게 실천하는 중생들에게도 다른 것으로 됨이 있고 변화가 있다. 비구들이여, 이렇게 보는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는 그것에 대해서도 염오(厭惡)한다. 그것에 대해 염오하면서 으뜸에 대해 이탐(離貪)한다. 낮은 것에 대해서야 말할 것도 없다.
비구들이여, 네 가지 이런 상(想)이 있다. 어떤 넷인가? 어떤 자는 제한된 것을 상(想)한다. 어떤 자는 확장된 것을 상(想)한다. 어떤 자는 무한한 것을 상(想)한다. 어떤 자는 ‘아무 것도 없다’라는 무소유처를 상(想)한다. 비구들이여, 이런 네 가지 상(想)이 있다.
비구들이여, 어떤 자가 ‘아무 것도 없다’라는 무소유처를 상(想)하는 것이 이런 네 가지 상(想) 중 으뜸이다. 비구들이여, 이런 상(想)을 가진 중생들이 있다. 비구들이여, 이런 상(想)을 가진 중생들에게도 다른 것으로 됨이 있고 변화가 있다. 비구들이여, 이렇게 보는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는 그것에 대해서도 염오(厭惡)한다. 그것에 대해 염오하면서 으뜸에 대해 이탐(離貪)한다. 낮은 것에 대해서야 말할 것도 없다.
비구들이여, ‘내가 아니고 나의 것도 아니라면, 나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고 나의 것도 없을 것이다.’라는 것이 외도의 견해 가운데 으뜸이다. 비구들이여, 이런 견해를 가진 자에게 이것이 예상된다. ㅡ ‘존재에 대해 꺼려하지 않는 자도 없을 것이고, 존재의 소멸에 대해 꺼려하는 자도 없을 것이다.’라고. 비구들이여, 이런 견해를 가진 중생들이 있다. 비구들이여, 이런 견해를 가진 중생들에게도 다른 것으로 됨이 있고 변화가 있다. 비구들이여, 이렇게 보는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는 그것에 대해서도 염오(厭惡)한다. 그것에 대해 염오하면서 으뜸에 대해 이탐(離貪)한다. 낮은 것에 대해서야 말할 것도 없다.
비구들이여, 궁극적 의미의 청정을 선언하는 어떤 사문-바라문들이 있다. 비구들이여, 무소유처를 완전히 초월하고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를 성취하여 머무는 이것이 궁극적 의미의 청정을 선언하는 것 가운데 으뜸이다. 그들은 그것을 실답게 안 뒤에 그것의 실현을 위해 법을 설한다. 비구들이여, 이렇게 주장하는 중생들이 있다. 비구들이여, 이렇게 주장하는 중생들에게도 다른 것으로 됨이 있고 변화가 있다. 비구들이여, 이렇게 보는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는 그것에 대해서도 염오(厭惡)한다. 그것에 대해 염오하면서 으뜸에 대해 이탐(離貪)한다. 낮은 것에 대해서야 말할 것도 없다.
비구들이여, 지금여기의 궁극의 열반을 선언하는 어떤 사문-바라문들이 있다. 비구들이여, 육촉처(六觸處)의 일어남-사라짐-매력(魅力)-위험(危險)-해방(解放)을 있는 그대로 안 뒤에 집착 없이 해탈한 것이 지금여기의 궁극의 열반의 선언 가운데 으뜸이다. 비구들이여, 이렇게 주장하고 이렇게 알려진 나를 어떤 사문-바라문들은 근거 없고 헛되고 거짓이고 사실 아닌 것으로 비방한다. ㅡ '사문 고따마는 욕(慾)의 완전한 지혜를 선언하지 못하고, 색(色)의 완전한 지혜를 선언하지 못하고, 수(受)의 완전한 지혜를 선언하지 못한다.'라고. 비구들이여, 그러나 나는 욕(慾)의 완전한 지혜를 선언하고, 색(色)의 완전한 지혜를 선언하고, 수(受)의 완전한 지혜를 선언한다. 지금여기에서 갈망이 없고 꺼졌고 식은 나는 집착이 없는 완전한 열반을 선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