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avijjāsuttaṃ (AN 10.61-무명(無明) 경)
2. yamakavaggo, 1. avijjāsuttaṃ (AN 10.61-무명(無明)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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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구들이여, ‘지금 이전에는 무명(無明)이 없었다. 그리고 나중에 생긴 것이다.’라는 무명(無明)의 과거로부터의 끝[시작점]은 알려지지 않는다. 이것은, 비구들이여, 이렇게 불린다. 반면에, ‘이것을 조건으로 무명(無明)이 있다.’라고 알려진다.
비구들이여, 나는 자량이 없는 것이 아니라 자량이 있는 무명(無明)을 말한다. 그러면 무엇이 무명의 자량인가? 다섯 가지 장애라고 말해야 한다. 비구들이여, 나는 자량이 없는 것이 아니라 자량이 있는 다섯 가지 장애를 말한다. 그러면 무엇이 다섯 가지 장애의 자량인가? 세 가지 나쁜 행위라고 말해야 한다. 비구들이여, 나는 자량이 없는 것이 아니라 자량이 있는 세 가지 나쁜 행위를 말한다. 그러면 무엇이 세 가지 나쁜 행위의 자량인가? 기능을 단속하지 않음이라고 말해야 한다. 비구들이여, 나는 자량이 없는 것이 아니라 자량이 있는 기능을 단속하지 않음을 말한다. 그러면 무엇이 기능을 단속하지 않음의 자량인가? 사띠 하지 않음과 옳고 그름을 판단하지 못함이라고 말해야 한다. 비구들이여, 나는 자량이 없는 것이 아니라 자량이 있는 사띠 하지 않음과 옳고 그름을 판단하지 못함을 말한다. 그러면 무엇이 사띠 하지 않음과 옳고 그름을 판단하지 못함의 자량인가? 비여리작의(非如理作意)라고 말해야 한다. 비구들이여, 나는 자량이 없는 것이 아니라 자량이 있는 비여리작의(非如理作意)를 말한다. 그러면 무엇이 비여리작의(非如理作意)의 자량인가? 불신(不信)이라고 말해야 한다. 비구들이여, 나는 자량이 없는 것이 아니라 자량이 있는 불신을 말한다. 그러면 무엇이 불신의 자량인가? 바른 법을 듣지 못함이라고 말해야 한다. 비구들이여, 나는 자량이 없는 것이 아니라 자량이 있는 바른 법을 듣지 못함을 말한다. 그러면 무엇이 바른 법을 듣지 못함의 자량인가? 고결한 사람과 교제하지 않음이라고 말해야 한다.
이렇게, 비구들이여, 고결한 사람과 교제하지 않음에 충실하면 잘못된 법을 따름을 채운다. 잘못된 법을 따름에 충실하면 불신을 채운다. 불신에 충실하면 비여리작의(非如理作意)를 채운다. 비여리작의에 충실하면 사띠 하지 않음과 옳고 그름을 판단하지 못함을 채운다. 사띠 하지 않음과 옳고 그름을 판단하지 못함에 충실하면 기능을 단속하지 않음을 채운다. 기능을 단속하지 않음에 충실하면 세 가지 나쁜 행위를 채운다. 세 가지 나쁜 행위에 충실하면 다섯 가지 장애를 채운다. 다섯 가지 장애에 충실하면 무명을 채운다. 이렇게 이런 무명의 자량이 있고, 이렇게 채워진다.
예를 들면, 비구들이여, 산 위에 큰비가 내리면 경사진 곳을 따라 빗물이 흘러내려서 산의 협곡과 계곡과 지류를 채운다. 협곡과 계곡과 지류들을 채우면 다시 작은 연못을 채운다. 작은 연못을 채우면 다시 큰 연못을 채운다. 큰 연못을 채우면 다시 작은 강을 채운다. 작은 강을 채우면 다시 큰 강을 채운다. 큰 강을 채우면 큰 바다를 채운다. 이렇게 큰 바다와 대양의 자량이 있고, 이렇게 채워진다.
이처럼, 비구들이여, 고결한 사람과 교제하지 않음에 충실하면 잘못된 법을 따름을 채운다. 잘못된 법을 따름에 충실하면 불신을 채운다. 불신에 충실하면 비여리작의(非如理作意)를 채운다. 비여리작의에 충실하면 사띠 하지 않음과 옳고 그름을 판단하지 못함을 채운다. 사띠 하지 않음과 옳고 그름을 판단하지 못함에 충실하면 기능을 단속하지 않음을 채운다. 기능을 단속하지 않음에 충실하면 세 가지 나쁜 행위를 채운다. 세 가지 나쁜 행위에 충실하면 다섯 가지 장애를 채운다. 다섯 가지 장애에 충실하면 무명을 채운다. 이렇게 이런 무명의 자량이 있고, 이렇게 채워진다.
비구들이여, 나는 자량이 없는 것이 아니라 자량이 있는 명(明)과 해탈(解脫)을 말한다. 그러면 무엇이 명과 해탈의 자량인가? 칠각지(七覺支)라고 말해야 한다. 비구들이여, 나는 자량이 없는 것이 아니라 자량이 있는 칠각지를 말한다. 그러면 무엇이 칠각지의 자량인가? 사념처(四念處)라고 말해야 한다. 비구들이여, 나는 자량이 없는 것이 아니라 자량이 있는 사념처를 말한다. 그러면 무엇이 사념처의 자량인가? 세 가지 좋은 행위라고 말해야 한다. 비구들이여, 나는 자량이 없는 것이 아니라 자량이 있는 세 가지 좋은 행위를 말한다. 그러면 무엇이 세 가지 좋은 행위의 자량인가? 기능의 단속이라고 말해야 한다. 비구들이여, 나는 자량이 없는 것이 아니라 자량이 있는 기능의 단속을 말한다. 그러면 무엇이 기능의 단속의 자량인가? 사띠와 옳고 그름의 판단이라고 말해야 한다. 비구들이여, 나는 자량이 없는 것이 아니라 자량이 있는 사띠와 옳고 그름의 판단을 말한다. 그러면 무엇이 사띠와 옳고 그름의 판단의 자량인가? 여리작의(如理作意)라고 말해야 한다. 비구들이여, 나는 자량이 없는 것이 아니라 자량이 있는 여리작의(如理作意)를 말한다. 그러면 무엇이 여리작의(如理作意)의 자량인가? 믿음이라고 말해야 한다. 비구들이여, 나는 자량이 없는 것이 아니라 자량이 있는 믿음을 말한다. 그러면 무엇이 믿음의 자량인가? 바른 법을 따름이라고 말해야 한다. 비구들이여, 나는 자량이 없는 것이 아니라 자량이 있는 바른 법을 따름을 말한다. 그러면 무엇이 바른 법을 따름의 자량인가? 고결한 사람과 교제함이라고 말해야 한다.
이렇게, 비구들이여, 고결한 사람과 교제함에 충실하면 바른 법을 따름을 채운다. 바른 법을 따름에 충실하면 믿음을 채운다. 믿음에 충실하면 여리작의(如理作意)를 채운다. 여리작의에 충실하면 사띠와 옳고 그름의 판단을 채운다. 사띠와 옳고 그름의 판단에 충실하면 기능의 단속을 채운다. 기능의 단속에 충실하면 세 가지 좋은 행위를 채운다. 세 가지 좋은 행위에 충실하면 사념처를 채운다. 사념처에 충실하면 칠각지를 채운다. 칠각지에 충실하면 명과 해탈을 채운다. 이렇게 이런 명과 해탈의 자량이 있고, 이렇게 채워진다.
예를 들면, 비구들이여, 산 위에 큰비가 내리면 경사진 곳을 따라 빗물이 흘러내려서 산의 협곡과 계곡과 지류를 채운다. 협곡과 계곡과 지류들을 채우면 다시 작은 연못을 채운다. 작은 연못을 채우면 다시 큰 연못을 채운다. 큰 연못을 채우면 다시 작은 강을 채운다. 작은 강을 채우면 다시 큰 강을 채운다. 큰 강을 채우면 큰 바다를 채운다. 이처럼 큰 바다와 대양의 자량이 있고, 이렇게 채워진다.
이처럼, 비구들이여, 고결한 사람과 교제함에 충실하면 바른 법을 따름을 채운다. 바른 법을 따름에 충실하면 믿음을 채운다. 믿음에 충실하면 여리작의(如理作意)를 채운다. 여리작의에 충실하면 사띠와 옳고 그름의 판단을 채운다. 사띠와 옳고 그름의 판단에 충실하면 기능의 단속을 채운다. 기능의 단속에 충실하면 세 가지 좋은 행위를 채운다. 세 가지 좋은 행위에 충실하면 사념처를 채운다. 사념처에 충실하면 칠각지를 채운다. 칠각지에 충실하면 명과 해탈을 채운다. 이렇게 이런 명과 해탈의 자량이 있고, 이렇게 채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