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karajakāyasuttaṃ (AN 10.219-업(業)에서 생긴 몸 경)
1. karajakāyavaggo, 9. karajakāyasuttaṃ (AN 10.219-업(業)에서 생긴 몸 경)
비구들이여, 의도에 속한 업(業)들을 짓고 쌓을 때, 경험하지 않음에 의한 소멸을 나는 말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여기[금생(今生)]이거나 걸어서 닿는 곳[내생(來生)]이거나 그 후에 오는 생(生)에서이다. 비구들이여, 그러나 나는 의도에 속한 업(業)들을 짓고 쌓을 때, 경험하지 않음에 의한 괴로움의 끝을 말하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빈틈없이 알아차리고[밀착된 념(念)], 옳고 그름을 판단하여[정지(正知)] 이렇게 간탐(慳貪) 않고, 진에(瞋恚) 않고, 열중 않는 그 성스러운 제자는 자(慈)가 함께한 심(心)으로 한 방향을 두루 미치면서 머뭅니다. 그렇게 두 방향을, 그렇게 세 방향을, 그렇게 네 방향을. 이렇게 위로 아래로 중간방위로, 모든 곳에서 모두에게 펼쳐서 모든 세상을 크고 귀하고 무량한, 원망 없고 거슬림 없는 자(慈)가 함께한 심(心)으로 두루 미치면서 머뭅니다.
그는 이렇게 꿰뚫어 안다. ㅡ ‘이전에 나의 이 심(心)은 작고 닦아지지 않았었지만 지금 나의 이 심(心)은 무량하고 잘 닦아졌다. 제한되게 지어진 업은 무엇이든지 거기에 남아 있지 않고 그림자를 드리우지 않는다.’라고.
비구들이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만약 어린아이일 때 이 젊은이가 자심해탈(慈心解脫)을 닦았는데도 악업(惡業)을 지을 수 있겠는가?” “아닙니다, 대덕이시여.”
“악업을 짓지 않는데도 괴로움에 닿겠는가?” “아닙니다, 대덕이시여. 악업을 짓지 않았는데 어떻게 괴로움에 닿겠습니까?”
• macca [orig. grd. of marati,] (m.) man, a mortal 인간. 죽어야 할 자.
• cittantaro ㅡ cittan-taro
tara [see tarati] (n.) crossing, "transit," passing over(횡단. 통과. 건넘)
→ [초기불전연구원] ‘죽기 마련인 중생은 마음이 그 원인이 된다.’
※ citt-antaro
Antara (adj.) [Vedic antara, cp. Gr. e)/ntera = Sk. antra (see anta3), Lat. interus fr. prep. inter. See also ante anto]. Primary meanings are "inside" and "in between" as adj. "inner"; in prep. use & in cpds. "inside, in between". Further development of meaning is with a view of contrasting the (two) sides of the inside relation, i. e having a space between, different from; thus nt. antaraŋ difference.→ [한국빠알리성전협회] ‘죽어야 하는 자는 마음을 사이존재로 가지고 있다.’
“비구들이여, 여자든 남자든 자심해탈(慈心解脫)을 닦아야한다. 비구들이여, 여자든 남자든 이 몸을 가지고 가야 하는 것이 아니다. 죽어야 하는 자[사람]는 심(心)이 넘어가는[연결되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꿰뚫어 안다. ㅡ ‘나에게 업(業)에서 생긴 몸에 의해 이전에 지어진 이 악업들은 어떤 것이든 모두 여기서 경험될 것이다. 다음에는 없을 것이다.’라고. 이렇게 닦여진 자심해탈(慈心解脫)은 여기서 더 높은 해탈을 관통하지 못한, 지혜를 지닌 비구를 불환자(不還者)의 상태로 이끈다.
비(悲)가 함께한 심(心)으로 … 희(喜)가 함께한 심(心)으로 … 사(捨)가 함께한 심(心)으로 한 방향을 채우면서 머문다. 그렇게 두 방향을, 그렇게 세 방향을, 그렇게 네 방향을. 이렇게 위로 아래로 중간방위로, 모든 곳에서 모두에게 펼쳐서 모든 세상을 크고 귀하고 무량한, 원망 없고 거슬림 없는 사(捨)가 함께한 심(心)으로 채우면서 머문다.
그는 이렇게 꿰뚫어 안다. ㅡ ‘이전에 나의 이 심(心)은 작고 닦아지지 않았었지만 지금 나의 이 심(心)은 무량하고 잘 닦아졌다. 제한되게 지어진 업은 무엇이든지 거기에 남아있지 않고 그림자를 드리우지 않는다.’라고.
비구들이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만약 어린 아이일 때 이 젊은이가 사심해탈(捨心解脫)을 닦았는데도 악업(惡業)을 지을 수 있겠는가?” “아닙니다, 대덕이시여.”
“악업을 짓지 않는데도 괴로움에 닿겠는가?” “아닙니다, 대덕이시여. 악업을 짓지 않았는데 어떻게 괴로움에 닿겠습니까?”
“비구들이여, 여자든 남자든 사심해탈(捨心解脫)을 닦아야한다. 비구들이여, 여자든 남자든 이 몸을 가지고 가야 하는 것이 아니다. 죽어야 하는 자[사람]는 심(心)이 넘어가는[연결되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꿰뚫어 안다. ㅡ ‘나에게 업(業)에서 생긴 몸에 의해 이전에 지어진 이 악업들은 어떤 것이든 모두 여기서 경험될 것이다. 다음에는 없을 것이다.’라고. 이렇게 닦여진 사심해탈(捨心解脫)은 여기서 더 높은 해탈을 관통하지 못한, 지혜를 지닌 비구를 불환자(不還者)의 상태로 이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