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dvayatānupassanāsuttaṃ (KN 5.38-두 가지 관찰 경)
3. mahāvaggo, 12. dvayatānupassanāsuttaṃ (KN 5.38-두 가지 관찰 경)
이렇게 나는 들었다. — 한때 세존은 사왓띠에서 동쪽 사원의 미기리미뚜 강당에 머물렀다. 그때 세존은 보름 포살일 밤에 비구 상가에 둘러싸여 열린 장소에 앉아있었다. 그때 세존은 침묵하고 또 침묵하고 있는 비구 상가를 바라보면서 비구들에게 말했다. —
“비구들이여, 어떤 성스럽고 구원으로 이끌고 깨달음으로 이끄는 선법(善法)들이 있다. 비구들이여, ‘그대들이 그 성스럽고 구원으로 이끌고 깨달음으로 이끄는 선법(善法)들을 따르는 데에는 어떤 이유가 있습니까?’라고, 비구들이여, 만약 이렇게 묻는 사람이 있다면, 그들에게 이렇게 말해야 한다. — ‘두 가지 법들에 대한 있는 그대로의 앎을 위해서입니다.’라고. ‘그러면 그대들이 말하는 그 두 가지는 무엇입니까?’
‘이것이 고(苦)다. 이것이 고집(苦集)이다.’라는 이것이 한 가지 관찰이고, ‘이것이 고멸(苦滅)이다. 이것이 고멸(苦滅)로 이끄는 실천이다.’라는 이것이 두 번째 관찰이다. 비구들이여, 이렇게 바르게 두 가지로 관찰하며, 방일하지 않고 노력하고 확고한 의지로써 머무는 비구에게 지금여기에서의 무위(無爲)의 앎의 실현 또는 집착이 남아있으면 불환자의 상태라는 두 가지 결과 중 하나의 결과가 예상된다.
세존은 이렇게 말했다. 이렇게 말한 뒤에 스승이신 선서(善逝)께서는 다시 이렇게 말했다. —
729. “ye dukkhaṃ nappajānanti, atho dukkhassa sambhavaṃ.
yattha ca sabbaso dukkhaṃ, asesaṃ uparujjhati.
tañca maggaṃ na jānanti, dukkhūpasamagāminaṃ.
730. “cetovimuttihīnā te, atho paññāvimuttiyā.
abhabbā te antakiriyāya, te ve jātijarūpagā.
731. “ye ca dukkhaṃ pajānanti, atho dukkhassa sambhavaṃ.
yattha ca sabbaso dukkhaṃ, asesaṃ uparujjhati.
tañca maggaṃ pajānanti, dukkhūpasamagāminaṃ.
732. “cetovimuttisampannā, atho paññāvimuttiyā.
bhabbā te antakiriyāya, na te jātijarūpagā”ti.
‘다른 방법으로도 바른 두 가지 관찰이 있습니까?’라고, 비구들이여, 만약 이렇게 묻는 사람이 있다면, ‘있습니다.’라고 말해야 한다. 어떻게 있는가? ‘고(苦)를 생기게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모두 재생의 조건을 조건으로 한다.’라는 이것이 한 가지 관찰이고, ‘그러나 재생의 조건의 남김 없이 바랜 소멸로부터 고(苦)는 생기지 않는다.’라는 이것이 두 번째 관찰이다. 비구들이여, 이렇게 바르게 두 가지로 관찰하며, 방일하지 않고 노력하고 확고한 의지로써 머무는 비구에게 지금여기에서의 무위(無爲)의 앎의 실현 또는 집착이 남아있으면 불환자의 상태라는 두 가지 결과 중 하나의 결과가 예상된다.
733. “upadhinidānā pabhavanti dukkhā, ye keci lokasmimanekarūpā.
yo ve avidvā upadhiṃ karoti, punappunaṃ dukkhamupeti mando.
tasmā pajānaṃ upadhiṃ na kayirā, dukkhassa jātippabhavānupassī”ti.
‘다른 방법으로도 바른 두 가지 관찰이 있습니까?’라고, 비구들이여, 만약 이렇게 묻는 사람이 있다면, ‘있습니다.’라고 말해야 한다. 어떻게 있는가? ‘고(苦)를 생기게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무명(無明)을 조건으로 한다.’라는 이것이 한 가지 관찰이고, ‘그러나 무명(無明)의 남김없이 바랜 소멸로부터 고(苦)는 생기지 않는다.’라는 이것이 두 번째 관찰이다. 비구들이여, 이렇게 바르게 두 가지로 관찰하며, 방일하지 않고 노력하고 확고한 의지로써 머무는 비구에게 지금여기에서의 무위(無爲)의 앎의 실현 또는 집착이 남아있으면 불환자의 상태라는 두 가지 결과 중 하나의 결과가 예상된다.
734. “jātimaraṇasaṃsāraṃ, ye vajanti punappunaṃ.
itthabhāvaññathābhāvaṃ, avijjāyeva sā gati.
735. “avijjā hāyaṃ mahāmoho, yenidaṃ saṃsitaṃ ciraṃ.
vijjāgatā ca ye sattā, na te gacchanti punabbhavan”ti.
‘다른 방법으로도 바른 두 가지 관찰이 있습니까?’라고, 비구들이여, 만약 이렇게 묻는 사람이 있다면, ‘있습니다.’라고 말해야 한다. 어떻게 있는가? ‘고(苦)를 생기게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행(行)들을 조건으로 한다.’라는 이것이 한 가지 관찰이고, ‘그러나 행(行)들의 남김없이 바랜 소멸로부터 고(苦)는 생기지 않는다.’라는 이것이 두 번째 관찰이다. 비구들이여, 이렇게 바르게 두 가지로 관찰하며, 방일하지 않고 노력하고 확고한 의지로써 머무는 비구에게 지금여기에서의 무위(無爲)의 앎의 실현 또는 집착이 남아있으면 불환자의 상태라는 두 가지 결과 중 하나의 결과가 예상된다.
736. “yaṃ kiñci dukkhaṃ sambhoti, sabbaṃ saṅkhārapaccayā.
saṅkhārānaṃ nirodhena, natthi dukkhassa sambhavo.
737. “etamādīnavaṃ ñatvā, dukkhaṃ saṅkhārapaccayā.
sabbasaṅkhārasamathā, saññānaṃ uparodhanā.
evaṃ dukkhakkhayo hoti, etaṃ ñatvā yathātathaṃ.
738. “sammaddasā vedaguno, sammadaññāya paṇḍitā.
abhibhuyya mārasaṃyogaṃ, na gacchanti punabbhavan”ti.
‘다른 방법으로도 바른 두 가지 관찰이 있습니까?’라고, 비구들이여, 만약 이렇게 묻는 사람이 있다면, ‘있습니다.’라고 말해야 한다. 어떻게 있는가? ‘고(苦)를 생기게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식(識)을 조건으로 한다.’라는 이것이 한 가지 관찰이고, ‘그러나 식(識)의 남김없이 바랜 소멸로부터 고(苦)는 생기지 않는다.’라는 이것이 두 번째 관찰이다. 비구들이여, 이렇게 바르게 두 가지로 관찰하며, 방일하지 않고 노력하고 확고한 의지로써 머무는 비구에게 지금여기에서의 무위(無爲)의 앎의 실현 또는 집착이 남아있으면 불환자의 상태라는 두 가지 결과 중 하나의 결과가 예상된다.
739. “yaṃ kiñci dukkhaṃ sambhoti, sabbaṃ viññāṇapaccayā.
viññāṇassa nirodhena, natthi dukkhassa sambhavo.
740. “etamādīnavaṃ ñatvā, dukkhaṃ viññāṇapaccayā.
viññāṇūpasamā bhikkhu, nicchāto parinibbuto”ti.
‘다른 방법으로도 바른 두 가지 관찰이 있습니까?’라고, 비구들이여, 만약 이렇게 묻는 사람이 있다면, ‘있습니다.’라고 말해야 한다. 어떻게 있는가? ‘고(苦)를 생기게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촉(觸)을 조건으로 한다.’라는 이것이 한 가지 관찰이고, ‘그러나 촉(觸)의 남김없이 바랜 소멸로부터 고(苦)는 생기지 않는다.’라는 이것이 두 번째 관찰이다. 비구들이여, 이렇게 바르게 두 가지로 관찰하며, 방일하지 않고 노력하고 확고한 의지로써 머무는 비구에게 지금여기에서의 무위(無爲)의 앎의 실현 또는 집착이 남아있으면 불환자의 상태라는 두 가지 결과 중 하나의 결과가 예상된다.
741. “tesaṃ phassaparetānaṃ, bhavasotānusārinaṃ.
kummaggapaṭipannānaṃ, ārā saṃyojanakkhayo.
742. “ye ca phassaṃ pariññāya, aññāyupasame ratā.
te ve phassābhisamayā, nicchātā parinibbutā”ti.
‘다른 방법으로도 바른 두 가지 관찰이 있습니까?’라고, 비구들이여, 만약 이렇게 묻는 사람이 있다면, ‘있습니다.’라고 말해야 한다. 어떻게 있는가? ‘고(苦)를 생기게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수(受)들을 조건으로 한다.’라는 이것이 한 가지 관찰이고, ‘그러나 수(受)들의 남김없이 바랜 소멸로부터 고(苦)는 생기지 않는다.’라는 이것이 두 번째 관찰이다. 비구들이여, 이렇게 바르게 두 가지로 관찰하며, 방일하지 않고 노력하고 확고한 의지로써 머무는 비구에게 지금여기에서의 무위(無爲)의 앎의 실현 또는 집착이 남아있으면 불환자의 상태라는 두 가지 결과 중 하나의 결과가 예상된다.
743. “sukhaṃ vā yadi vā dukkhaṃ, adukkhamasukhaṃ saha.
ajjhattañca bahiddhā ca, yaṃ kiñci atthi veditaṃ.
744. “etaṃ dukkhanti ñatvāna, mosadhammaṃ palokinaṃ.
phussa phussa vayaṃ passaṃ, evaṃ tattha vijānati.
vedanānaṃ khayā bhikkhu, nicchāto parinibbuto”ti.
‘다른 방법으로도 바른 두 가지 관찰이 있습니까?’라고, 비구들이여, 만약 이렇게 묻는 사람이 있다면, ‘있습니다.’라고 말해야 한다. 어떻게 있는가? ‘고(苦)를 생기게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애(愛)를 조건으로 한다.’라는 이것이 한 가지 관찰이고, ‘그러나 애(愛)의 남김없이 바랜 소멸로부터 고(苦)는 생기지 않는다.’라는 이것이 두 번째 관찰이다. 비구들이여, 이렇게 바르게 두 가지로 관찰하며, 방일하지 않고 노력하고 확고한 의지로써 머무는 비구에게 지금여기에서의 무위(無爲)의 앎의 실현 또는 집착이 남아있으면 불환자의 상태라는 두 가지 결과 중 하나의 결과가 예상된다.
745. “taṇhādutiyo puriso, dīghamaddhāna saṃsaraṃ.
itthabhāvaññathābhāvaṃ, saṃsāraṃ nātivattati.
746. “etamādīnavaṃ ñatvā, taṇhaṃ dukkhassa sambhavaṃ.
vītataṇho anādāno, sato bhikkhu paribbaje”ti.
‘다른 방법으로도 바른 두 가지 관찰이 있습니까?’라고, 비구들이여, 만약 이렇게 묻는 사람이 있다면, ‘있습니다.’라고 말해야 한다. 어떻게 있는가? ‘고(苦)를 생기게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취(取)를 조건으로 한다.’라는 이것이 한 가지 관찰이고, ‘그러나 취(取)의 남김없이 바랜 소멸로부터 고(苦)는 생기지 않는다.’라는 이것이 두 번째 관찰이다. 비구들이여, 이렇게 바르게 두 가지로 관찰하며, 방일하지 않고 노력하고 확고한 의지로써 머무는 비구에게 지금여기에서의 무위(無爲)의 앎의 실현 또는 집착이 남아있으면 불환자의 상태라는 두 가지 결과 중 하나의 결과가 예상된다.
747. “upādānapaccayā bhavo, bhūto dukkhaṃ nigacchati.
jātassa maraṇaṃ hoti, eso dukkhassa sambhavo.
748. “tasmā upādānakkhayā, sammadaññāya paṇḍitā.
jātikkhayaṃ abhiññāya, na gacchanti punabbhavan”ti.
‘다른 방법으로도 바른 두 가지 관찰이 있습니까?’라고, 비구들이여, 만약 이렇게 묻는 사람이 있다면, ‘있습니다.’라고 말해야 한다. 어떻게 있는가? ‘고(苦)를 생기게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시도를 조건으로 한다.’라는 이것이 한 가지 관찰이고, ‘그러나 시도의 남김없이 바랜 소멸로부터 고(苦)는 생기지 않는다.’라는 이것이 두 번째 관찰이다. 비구들이여, 이렇게 바르게 두 가지로 관찰하며, 방일하지 않고 노력하고 확고한 의지로써 머무는 비구에게 지금여기에서의 무위(無爲)의 앎의 실현 또는 집착이 남아있으면 불환자의 상태라는 두 가지 결과 중 하나의 결과가 예상된다.
749. “yaṃ kiñci dukkhaṃ sambhoti, sabbaṃ ārambhapaccayā.
ārambhānaṃ nirodhena, natthi dukkhassa sambhavo.
750. “etamādīnavaṃ ñatvā, dukkhaṃ ārambhapaccayā.
sabbārambhaṃ paṭinissajja, anārambhe vimuttino.
751. “ucchinnabhavataṇhassa, santacittassa bhikkhuno.
vikkhīṇo jātisaṃsāro, natthi tassa punabbhavo”ti.
‘다른 방법으로도 바른 두 가지 관찰이 있습니까?’라고, 비구들이여, 만약 이렇게 묻는 사람이 있다면, ‘있습니다.’라고 말해야 한다. 어떻게 있는가? ‘고(苦)를 생기게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자량(資糧)들을 조건으로 한다.’라는 이것이 한 가지 관찰이고, ‘그러나 자량(資糧)들의 남김없이 바랜 소멸로부터 고(苦)는 생기지 않는다.’라는 이것이 두 번째 관찰이다. 비구들이여, 이렇게 바르게 두 가지로 관찰하며, 방일하지 않고 노력하고 확고한 의지로써 머무는 비구에게 지금여기에서의 무위(無爲)의 앎의 실현 또는 집착이 남아있으면 불환자의 상태라는 두 가지 결과 중 하나의 결과가 예상된다.
752. “yaṃ kiñci dukkhaṃ sambhoti, sabbaṃ āhārapaccayā.
āhārānaṃ nirodhena, natthi dukkhassa sambhavo.
753. “etamādīnavaṃ ñatvā, dukkhaṃ āhārapaccayā.
sabbāhāraṃ pariññāya, sabbāhāramanissito.
754. “ārogyaṃ sammadaññāya, āsavānaṃ parikkhayā.
saṅkhāya sevī dhammaṭṭho, saṅkhyaṃ nopeti vedagū”ti.
‘다른 방법으로도 바른 두 가지 관찰이 있습니까?’라고, 비구들이여, 만약 이렇게 묻는 사람이 있다면, ‘있습니다.’라고 말해야 한다. 어떻게 있는가? ‘고(苦)를 생기게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흔들림을 조건으로 한다.’라는 이것이 한 가지 관찰이고, ‘그러나 흔들림의 남김없이 바랜 소멸로부터 고(苦)는 생기지 않는다.’라는 이것이 두 번째 관찰이다. 비구들이여, 이렇게 바르게 두 가지로 관찰하며, 방일하지 않고 노력하고 확고한 의지로써 머무는 비구에게 지금여기에서의 무위(無爲)의 앎의 실현 또는 집착이 남아있으면 불환자의 상태라는 두 가지 결과 중 하나의 결과가 예상된다.
755. “yaṃ kiñci dukkhaṃ sambhoti, sabbaṃ iñjitapaccayā.
iñjitānaṃ nirodhena, natthi dukkhassa sambhavo.
756. “etamādīnavaṃ ñatvā, dukkhaṃ iñjitapaccayā.
tasmā hi ejaṃ vossajja, saṅkhāre uparundhiya.
anejo anupādāno, sato bhikkhu paribbaje”ti.
‘다른 방법으로도 바른 두 가지 관찰이 있습니까?’라고, 비구들이여, 만약 이렇게 묻는 사람이 있다면, ‘있습니다.’라고 말해야 한다. 어떻게 있는가? ‘의지하는 자에게 떨림이 있다.’라는 이것이 한 가지 관찰이고, ‘그러나 의지하지 않는 자에게 떨림이 없다.’라는 이것이 두 번째 관찰이다. 비구들이여, 이렇게 바르게 두 가지로 관찰하며, 방일하지 않고 노력하고 확고한 의지로써 머무는 비구에게 지금여기에서의 무위(無爲)의 앎의 실현 또는 집착이 남아있으면 불환자의 상태라는 두 가지 결과 중 하나의 결과가 예상된다.
757. “anissito na calati, nissito ca upādiyaṃ.
itthabhāvaññathābhāvaṃ, saṃsāraṃ nātivattati.
758. “etamādīnavaṃ ñatvā, nissayesu mahabbhayaṃ.
anissito anupādāno, sato bhikkhu paribbaje”ti.
‘다른 방법으로도 바른 두 가지 관찰이 있습니까?’라고, 비구들이여, 만약 이렇게 묻는 사람이 있다면, ‘있습니다.’라고 말해야 한다. 어떻게 있는가? ‘색(色)보다 무색(無色)은 더 평화롭다.’라는 이것이 한 가지 관찰이고, ‘무색(無色)보다 멸(滅)이 더 평화롭다.’라는 이것이 두 번째 관찰이다. 비구들이여, 이렇게 바르게 두 가지로 관찰하며, 방일하지 않고 노력하고 확고한 의지로써 머무는 비구에게 지금여기에서의 무위(無爲)의 앎의 실현 또는 집착이 남아있으면 불환자의 상태라는 두 가지 결과 중 하나의 결과가 예상된다.
759. “ye ca rūpūpagā sattā, ye ca arūpaṭṭhāyino.
nirodhaṃ appajānantā, āgantāro punabbhavaṃ.
760. “ye ca rūpe pariññāya, arūpesu asaṇṭhitā.
nirodhe ye vimuccanti, te janā maccuhāyino”ti.
‘다른 방법으로도 바른 두 가지 관찰이 있습니까?’라고, 비구들이여, 만약 이렇게 묻는 사람이 있다면, ‘있습니다.’라고 말해야 한다. 어떻게 있는가? 신과 마라와 범천과 함께하는 세상, 사문-바라문과 신과 사람을 포함한 존재를 위해 ‘이것은 진실이다.’라고 보는 것을 제어된 성자들이 ‘이것은 거짓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바른 지혜로써 잘 보는 것이 한 가지 관찰이고, 신과 마라와 범천과 함께하는 세상, 사문-바라문과 신과 사람을 포함한 존재를 위해 ‘이것은 거짓이다.’라고 보는 것을 길들인 성자들이 ‘이것은 진실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바른 지혜로써 잘 보는 것이 두 번째 관찰이다. 비구들이여, 이렇게 바르게 두 가지로 관찰하며, 방일하지 않고 노력하고 확고한 의지로써 머무는 비구에게 지금여기에서의 무위(無爲)의 앎의 실현 또는 집착이 남아있으면 불환자의 상태라는 두 가지 결과 중 하나의 결과가 예상된다.
761. “anattani attamāniṃ, passa lokaṃ sadevakaṃ.
niviṭṭhaṃ nāmarūpasmiṃ, idaṃ saccanti maññati.
762. “yena yena hi maññanti, tato taṃ hoti aññathā.
tañhi tassa musā hoti, mosadhammañhi ittaraṃ.
763. “amosadhammaṃ nibbānaṃ, tadariyā saccato vidū.
te ve saccābhisamayā, nicchātā parinibbutā”ti.
‘다른 방법으로도 바른 두 가지 관찰이 있습니까?’라고, 비구들이여, 만약 이렇게 묻는 사람이 있다면, ‘있습니다.’라고 말해야 한다. 어떻게 있는가? 신과 마라와 범천과 함께하는 세상, 사문-바라문과 신과 사람을 포함한 존재를 위해 ‘이것은 락(樂)이다.’라고 보는 것을 제어된 성자들이 ‘이것은 고(苦)다.’라고 있는 그대로 바른 지혜로써 잘 보는 것이 한 가지 관찰이고, 신과 마라와 범천과 함께하는 세상, 사문-바라문과 신과 사람을 포함한 존재를 위해 ‘이것은 고(苦)다.’라고 보는 것을 길들인 성자들이 ‘이것은 락(樂)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바른 지혜로써 잘 보는 것이 두 번째 관찰이다. 비구들이여, 이렇게 바르게 두 가지로 관찰하며, 방일하지 않고 노력하고 확고한 의지로써 머무는 비구에게 지금여기에서의 무위(無爲)의 앎의 실현 또는 집착이 남아있으면 불환자의 상태라는 두 가지 결과 중 하나의 결과가 예상된다.
764. “rūpā saddā rasā gandhā, phassā dhammā ca kevalā.
iṭṭhā kantā manāpā ca, yāvatatthīti vuccati.
765. “sadevakassa lokassa, ete vo sukhasammatā.
yattha cete nirujjhanti, taṃ nesaṃ dukkhasammataṃ.
766. “sukhanti diṭṭhamariyehi, sakkāyassuparodhanaṃ.
paccanīkamidaṃ hoti, sabbalokena passataṃ.
767. “yaṃ pare sukhato āhu, tadariyā āhu dukkhato.
yaṃ pare dukkhato āhu, tadariyā sukhato vidū.
768. “passa dhammaṃ durājānaṃ, sampamūḷhetthaviddasu.
nivutānaṃ tamo hoti, andhakāro apassataṃ.
769. “satañca vivaṭaṃ hoti, āloko passatāmiva.
santike na vijānanti, maggā dhammassa kovidā.
770. “bhavarāgaparetehi, bhavasotānusāribhi.
māradheyyānupannehi, nāyaṃ dhammo susambudho.
771. “ko nu aññatramariyehi, padaṃ sambuddhumarahati.
yaṃ padaṃ sammadaññāya, parinibbanti anāsavā”ti.
세존은 이렇게 말했다. 그 비구들은 즐거워하면서 세존의 말씀을 기뻐했다. 그리고 이런 설명이 말해졌을 때 육십 명의 비구들은 집착에서 벗어나 번뇌들로부터 심(心)이 해탈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