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llekhasuttaṃ (MN 8-더 높은 삶 경)
1. mūlapariyāyavaggo, 8. sallekhasuttaṃ (MN 8-더 높은 삶 경)
이렇게 나는 들었다. — 한때 세존은 사왓티에서 제따와나의 아나타삔디까 사원에 머물렀다. 거기서 저녁에 홀로 머묾에서 일어난 마하쭌다 존자가 세존에게 왔다. 와서는 세존에게 절한 뒤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마하쭌다 존자는 세존에게 이렇게 말했다. — “대덕이시여, 세상에는 아(我)에 대한 주장에 속하거나 세상에 대한 주장에 속한 어떤 다양한 견해들이 생깁니다. 대덕이시여, 이제 겨우 작의(作意)를 시작하는 비구에게도 이 견해들이 버려집니까, 이 견해들이 놓입니까?”라고.
“쭌다여, 세상에는 아(我)에 대한 주장에 속하거나 세상에 대한 주장에 속한 어떤 다양한 견해들이 생긴다. 그 견해들이 어디에서 생기고, 어디에서 잠재하고, 어디에서 함께하더라도 그것을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내가 아니다. 이것은 나의 아(我)가 아니다.’라고 이렇게 있는 그대로 바른 지혜로 보는 자에게 그 견해들이 버려지고, 그 견해들이 놓인다.
쭌다여, 소유의 삶에서 벗어나고, 불선법들에서 벗어나서, 위딱까가 있고 위짜라가 있고 떨침에서 생긴 기쁨과 즐거움의 초선(初禪)을 성취하여 머무는 여기 어떤 비구에게 ‘나는 더 높은 삶으로 머문다.’라는 생각이 드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쭌다여, 성자의 율(律)에서 이것들은 더 높은 삶이라고 불리지 않는다. 성자의 율에서 이것들은 지금여기의 행복한 머묾이라고 불린다.
쭌다여, 위딱까와 위짜라의 가라앉음으로 인해, 안으로 평온함과 마음의 집중된 상태가 되어, 위딱까도 없고 위짜라도 없이, 삼매에서 생긴 기쁨과 즐거움의 제이선(第二禪)을 성취하여 머무는 여기 어떤 비구에게 ‘나는 더 높은 삶으로 머문다.’라는 생각이 드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쭌다여, 성자의 율에서 이것들은 더 높은 삶이라고 불리지 않는다. 성자의 율에서 이것들은 지금여기의 행복한 머묾이라고 불린다.
쭌다여, 기쁨의 바램으로부터 평정하게 머물고, 사띠와 바른 앎을 가지고 몸으로 즐거움을 경험하면서, 성인들이 '평정을 가진 자, 사띠를 가진 자, 즐거움에 머무는 자[사념락주(捨念樂住)].'라고 말하는 제삼선(第三禪)을 성취하여 머무는 여기 어떤 비구에게 ‘나는 더 높은 삶으로 머문다.’라는 생각이 드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쭌다여, 성자의 율에서 이것들은 더 높은 삶이라고 불리지 않는다. 성자의 율에서 이것들은 지금여기의 행복한 머묾이라고 불린다.
쭌다여, 즐거움의 버림과 괴로움의 버림으로부터, 이미 만족과 불만들의 줄어듦으로부터, 괴로움도 즐거움도 없고 평정과 청정한 사띠[사념청정(捨念淸淨)]의 제사선(第四禪)을 성취하여 머무는 여기 어떤 비구에게 ‘나는 더 높은 삶으로 머문다.’라는 생각이 드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쭌다여, 성자의 율에서 이것들은 더 높은 삶이라고 불리지 않는다. 성자의 율에서 이것들은 지금여기의 행복한 머묾이라고 불린다.
쭌다여, 완전하게 색상(色想)을 넘어서고, 저항의 상(想)이 줄어들고, 다양한 상(想)을 작의(作意)하지 않음으로부터 ‘무한한 공간’이라는 공무변처(空無邊處)를 성취하여 머무는 여기 어떤 비구에게 ‘나는 더 높은 삶으로 머문다.’라는 생각이 드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쭌다여, 성자의 율에서 이것들은 더 높은 삶이라고 불리지 않는다. 성자의 율에서 이것들은 평화로운 머묾이라고 불린다.
쭌다여, 공무변처를 완전히 넘어서서 ‘무한한 식(識)’이라는 식무변처(識無邊處)를 성취하여 머무는 여기 어떤 비구에게 ‘나는 더 높은 삶으로 머문다.’라는 생각이 드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쭌다여, 성자의 율에서 이것들은 더 높은 삶이라고 불리지 않는다. 성자의 율에서 이것들은 평화로운 머묾이라고 불린다.
쭌다여, 식무변처를 완전히 넘어서서 ‘아무것도 없다.’라는 무소유처(無所有處)를 성취하여 머무는 여기 어떤 비구에게 ‘나는 더 높은 삶으로 머문다.’라는 생각이 드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쭌다여, 성자의 율에서 이것들은 더 높은 삶이라고 불리지 않는다. 성자의 율에서 이것들은 평화로운 머묾이라고 불린다.
쭌다여, 무소유처를 완전히 넘어서서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를 성취하여 머무는 여기 어떤 비구에게 ‘나는 더 높은 삶으로 머문다.’라는 생각이 드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쭌다여, 성자의 율에서 이것들은 더 높은 삶이라고 불리지 않는다. 성자의 율에서 이것들은 평화로운 머묾이라고 불린다.
여기, 쭌다여, 그대들은 더 높은 삶을 살아내야 한다. ‘남들은 폭력적일지라도 우리는 여기서 폭력적이지 않을 것이다.’라고 더 높은 삶을 살아내야 한다. ‘남들은 생명을 해칠지라도 우리는 여기서 생명을 해치는 행위로부터 피할 것이다.’라고 더 높은 삶을 살아내야 한다. ‘남들은 주지 않는 것을 가질지라도 우리는 여기서 주지 않는 것을 가지는 행위로부터 피할 것이다.’라고 더 높은 삶을 살아내야 한다. ‘남들은 범행(梵行) 아닌 것을 행할지라도 우리는 여기서 범행을 실천할 것이다.’라고 더 높은 삶을 살아내야 한다. ‘남들은 거짓을 말할지라도 우리는 여기서 거짓을 말하는 행위로부터 피할 것이다.’라고 더 높은 삶을 살아내야 한다. ‘남들은 험담할지라도 우리는 여기서 험담하는 행위로부터 피할 것이다.’라고 더 높은 삶을 살아내야 한다. ‘남들은 거친 말을 할지라도 우리는 여기서 거칠게 말하는 행위로부터 피할 것이다.’라고 더 높은 삶을 살아내야 한다. ‘남들은 쓸모없고 허튼 말을 할지라도 우리는 여기서 쓸모없고 허튼 말하는 행위로부터 피할 것이다.’라고 더 높은 삶을 살아내야 한다. ‘남들은 간탐 할지라도 우리는 여기서 간탐 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더 높은 삶을 살아내야 한다. ‘남들은 거슬린 심(心)을 가질지라도 우리는 여기서 거슬리지 않은 심을 가질 것이다.’라고 더 높은 삶을 살아내야 한다. ‘남들은 삿된 견해를 가질지라도 우리는 여기서 바른 견해를 가질 것이다.’라고 더 높은 삶을 살아내야 한다. ‘남들은 삿된 사유를 할지라도 우리는 여기서 바른 사유를 할 것이다.’라고 더 높은 삶을 살아내야 한다. ‘남들은 삿된 말을 할지라도 우리는 여기서 바른말을 할 것이다.’라고 더 높은 삶을 살아내야 한다. ‘남들은 삿된 행위를 할지라도 우리는 여기서 바른 행위를 할 것이다.’라고 더 높은 삶을 살아내야 한다. ‘남들은 삿된 생활을 할지라도 우리는 여기서 바른 생활을 할 것이다.’라고 더 높은 삶을 살아내야 한다. ‘남들은 삿된 정진을 할지라도 우리는 여기서 바른 정진을 할 것이다.’라고 더 높은 삶을 살아내야 한다. ‘남들은 삿된 사띠를 할지라도 우리는 여기서 바른 사띠를 할 것이다.’라고 더 높은 삶을 살아내야 한다. ‘남들은 삿된 삼매를 닦을지라도 우리는 여기서 바른 삼매를 닦을 것이다.’라고 더 높은 삶을 살아내야 한다. ‘남들은 삿된 앎을 가질지라도 우리는 여기서 바른 앎을 가질 것이다.’라고 더 높은 삶을 살아내야 한다. ‘남들은 삿된 해탈을 실현할지라도 우리는 여기서 바른 해탈을 실현할 것이다.’라고 더 높은 삶을 살아내야 한다.
‘남들은 해태-혼침이 스며들지라도 우리는 여기서 해태-혼침으로부터 벗어날 것이다.’라고 더 높은 삶을 살아내야 한다. ‘남들은 들뜰지라도 우리는 여기서 들뜨지 않을 것이다.’라고 더 높은 삶을 살아내야 한다. ‘남들은 의심할지라도 우리는 여기서 의심을 건널 것이다.’라고 더 높은 삶을 살아내야 한다. ‘남들은 화낼지라도 우리는 여기서 화내지 않을 것이다.’라고 더 높은 삶을 살아내야 한다. ‘남들은 원한을 품을지라도 우리는 여기서 원한을 품지 않을 것이다.’라고 더 높은 삶을 살아내야 한다. ‘남들은 위선적일지라도 우리는 여기서 위선적이지 않을 것이다.’라고 더 높은 삶을 살아내야 한다. ‘남들은 악의를 품을지라도 우리는 여기서 악의를 품지 않을 것이다.’라고 더 높은 삶을 살아내야 한다. ‘남들은 질투할지라도 우리는 여기서 질투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더 높은 삶을 살아내야 한다. ‘남들은 인색할지라도 우리는 여기서 인색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더 높은 삶을 살아내야 한다. ‘남들은 교활할지라도 우리는 여기서 교활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더 높은 삶을 살아내야 한다. ‘남들은 사기 치더라도 우리는 여기서 사기 치지 않을 것이다.’라고 더 높은 삶을 살아내야 한다. ‘남들은 고집부리더라도 우리는 여기서 고집부리지 않을 것이다.’라고 더 높은 삶을 살아내야 한다. ‘남들은 오만할지라도 우리는 여기서 오만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더 높은 삶을 살아내야 한다. ‘남들은 완고할지라도 우리는 여기서 유연할 것이다.’라고 더 높은 삶을 살아내야 한다. ‘남들은 나쁜 친구와 함께할지라도 우리는 여기서 좋은 친구와 함께할 것이다.’라고 더 높은 삶을 살아내야 한다. ‘남들은 방일(放逸)할지라도 우리는 여기서 불방일(不放逸)할 것이다.’라고 더 높은 삶을 살아내야 한다. ‘남들은 믿음이 없을지라도 우리는 여기서 믿음을 가질 것이다.’라고 더 높은 삶을 살아내야 한다. ‘남들은 자책(自責)의 두려움이 없을지라도 우리는 여기서 자책의 두려움을 가질 것이다.’라고 더 높은 삶을 살아내야 한다. ‘남들은 타책(他責)의 두려움이 없을지라도 우리는 여기서 타책의 두려움을 가질 것이다.’라고 더 높은 삶을 살아내야 한다. ‘남들은 적게 배울지라도 우리는 여기서 많이 배울 것이다.’라고 더 높은 삶을 살아내야 한다. ‘남들은 게으를지라도 우리는 여기서 열심히 정진할 것이다.’라고 더 높은 삶을 살아내야 한다. ‘남들은 사띠를 잊더라도 우리는 여기서 사띠를 확립할 것이다.’라고 더 높은 삶을 살아내야 한다. ‘남들은 어리석을지라도 우리는 여기서 지혜를 갖출 것이다.’라고 더 높은 삶을 살아내야 한다. ‘남들은 세속적인 것에 오염되고, 고치기 힘들고, 놓기 어렵더라도 우리는 여기서 세속적인 것에 오염되지 않고, 고치기 쉽고, 잘 놓을 것이다.’라고 더 높은 삶을 살아내야 한다.
쭌다여, 나는 선법(善法)들에서 심(心)이 일어나는 것도 매우 유용하다고 말한다. 그러니 몸과 말로써 따라 행하는 것은 말해 무엇 하겠는가! 그러므로 쭌다여, ‘남들은 폭력적일지라도 우리는 여기서 폭력적이지 않을 것이다.’라고 심(心)을 일으켜야 한다. ‘남들은 생명을 해칠지라도 우리는 여기서 생명을 해치는 행위로부터 피할 것이다.’라고 심을 일으켜야 한다. … 남들은 세속적인 것에 오염되고, 고치기 힘들고, 놓기 어렵더라도 우리는 여기서 세속적인 것에 오염되지 않고, 고치기 쉽고, 잘 놓을 것이다.’라고 심을 일으켜야 한다.
예를 들면, 쭌다여, 평탄치 못한 길과 그것을 피하기 위한 다른 평탄한 길이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평탄치 못한 선착장과 그것을 피하기 위한 다른 평탄한 선착장이 있을 것이다. 이처럼, 쭌다여, 폭력적인 사람에게 피함을 위해 비폭력이 있다. 생명을 해치는 사람에게 피함을 위해 생명을 해치는 행위를 삼감이 있다. 주지 않는 것을 가지는 사람에게 피함을 위해 주지 않는 것을 가지는 행위를 삼감이 있다. 범행 아닌 것을 행하는 사람에게 피함을 위해 범행 아닌 것을 삼감이 있다. 거짓을 말하는 사람에게 피함을 위해 거짓을 말하는 행위를 삼감이 있다. 험담하는 자에게 피함을 위해 험담하는 행위를 삼감이 있다. 거친 말을 하는 사람에게 피함을 위해 거친 말을 하는 행위를 삼감이 있다. 쓸모없고 허튼 말을 하는 사람에게 피함을 위해 쓸모없고 허튼 말하는 행위를 삼감이 있다. 간탐 하는 사람에게 피함을 위해 불간탐이 있다. 거슬린 심(心)을 가진 사람에게 피함을 위해 부진에가 있다. 삿된 견해를 가진 사람에게 피함을 위해 바른 견해가 있다. 삿된 사유를 하는 사람에게 피함을 위해 바른 사유가 있다. 삿된 말을 하는 사람에게 피함을 위해 바른말이 있다. 삿된 행위를 하는 사람에게 피함을 위해 바른 행위가 있다. 삿된 생활을 하는 사람에게 피함을 위해 바른 생활이 있다. 삿된 정진을 하는 사람에게 피함을 위해 바른 정진이 있다. 삿된 사띠를 하는 사람에게 피함을 위해 바른 사띠가 있다. 삿된 삼매를 닦는 사람에게 피함을 위해 바른 삼매가 있다. 삿된 앎을 가진 사람에게 피함을 위해 바른 앎이 있다. 삿된 해탈을 실현한 사람에게 피함을 위해 바른 해탈이 있다.
해태-혼침이 스며든 사람에게 피함을 위해 해태-혼침으로부터 벗어남이 있다. 들뜬 사람에게 피함을 위해 들뜨지 않음이 있다. 의심하는 사람에게 피함을 위해 의심을 건넘이 있다. 화내는 사람에게 피함을 위해 화내지 않음이 있다. 원한을 품은 사람에게 피함을 위해 원한을 품지 않음이 있다. 위선적인 사람에게 피함을 위해 위선적이지 않음이 있다. 악의를 품은 사람에게 피함을 위해 악의를 품지 않음이 있다. 질투하는 사람에게 피함을 위해 질투하지 않음이 있다. 인색한 사람에게 피함을 위해 인색하지 않음이 있다. 교활한 사람에게 피함을 위해 교활하지 않음이 있다. 사기 치는 사람에게 피함을 위해 사기 치지 않음이 있다. 고집부리는 사람에게 피함을 위해 고집부리지 않음이 있다. 오만한 사람에게 피함을 위해 오만하지 않음이 있다. 완고한 사람에게 피함을 위해 유연함이 있다. 나쁜 친구와 함께하는 사람에게 피함을 위해 좋은 친구가 있다. 방일한 사람에게 피함을 위해 불방일이 있다. 믿음이 없는 사람에게 피함을 위해 믿음이 있다. 자책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 사람에게 피함을 위해 자책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남의 책망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 사람에게 피함을 위해 남의 책망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적게 배운 사람에게 피함을 위해 많이 배움이 있다. 게으른 사람에게 피함을 위해 정진의 유지가 있다. 사띠를 잊은 사람에게 피함을 위해 사띠의 확립이 있다. 어리석은 사람에게 피함을 위해 지혜를 갖춤이 있다. 세속적인 것에 오염되고, 고치기 힘들고, 놓기 어려운 사람에게 피함을 위해 세속적인 것에 오염되지 않고, 고치기 쉽고, 잘 놓음이 있다.
예를 들면, 쭌다여, 불선법(不善法)이라면 무엇이든지 모두 낮은 상태로 이끌고, 선법(善法)이라면 무엇이든지 모두 높은 상태로 이끈다. 이처럼, 쭌다여, 폭력적인 사람에게 높은 상태를 위해 비폭력이 있다. 생명을 해치는 사람에게 높은 상태를 위해 생명을 해치는 행위를 삼감이 있다. … 세속적인 것에 오염되고, 고치기 힘들고, 놓기 어려운 사람에게 높은 상태를 위해 세속적인 것에 오염되지 않고, 고치기 쉽고, 잘 놓음이 있다.
쭌다여, 참으로 자신이 늪에 빠진 사람이 늪에 빠진 다른 사람을 끌어낼 것이라는 경우는 없다. 쭌다여, 자신이 늪에 빠지지 않은 사람이 늪에 빠진 다른 사람을 끌어낼 것이라는 경우는 있다. 쭌다여, 자신이 길들지 않고 제어되지 않고 완전히 꺼지지 않은 사람이 다른 사람을 길들이고 제어하고 완전히 꺼지게 할 것이라는 경우는 없다. 쭌다여, 자신이 길들고 제어되고 완전히 꺼진 사람이 다른 사람을 길들이고 제어하고 완전히 꺼지게 할 것이라는 경우는 있다. 이처럼, 쭌다여, 폭력적인 사람에게 완전한 꺼짐을 위해 비폭력이 있다. 생명을 해치는 사람에게 완전한 꺼짐을 위해 생명을 해치는 행위를 삼감이 있다. 주지 않는 것을 가지는 사람에게 완전한 꺼짐을 위해 주지 않는 것을 가지는 행위를 삼감이 있다. 범행 아닌 것을 행하는 사람에게 완전한 꺼짐을 위해 범행 아닌 것을 삼감이 있다. 거짓을 말하는 사람에게 완전한 꺼짐을 위해 거짓을 말하는 행위를 삼감이 있다. 험담하는 자에게 완전한 꺼짐을 위해 험담하는 행위를 삼감이 있다. 거친 말을 하는 사람에게 완전한 꺼짐을 위해 거친 말을 하는 행위를 삼감이 있다. 쓸모없고 허튼 말을 하는 사람에게 완전한 꺼짐을 위해 쓸모없고 허튼 말하는 행위를 삼감이 있다. 간탐하는 사람에게 완전한 꺼짐을 위해 불간탐이 있다. 거슬린 심(心)을 가진 사람에게 완전한 꺼짐을 위해 부진에가 있다. 삿된 견해를 가진 사람에게 완전한 꺼짐을 위해 바른 견해가 있다. 삿된 사유를 하는 사람에게 완전한 꺼짐을 위해 바른 사유가 있다. 삿된 말을 하는 사람에게 완전한 꺼짐을 위해 바른 말이 있다. 삿된 행위를 하는 사람에게 완전한 꺼짐을 위해 바른 행위가 있다. 삿된 생활을 하는 사람에게 완전한 꺼짐을 위해 바른 생활이 있다. 삿된 정진을 하는 사람에게 완전한 꺼짐을 위해 바른 정진이 있다. 삿된 사띠를 하는 사람에게 완전한 꺼짐을 위해 바른 사띠가 있다. 삿된 삼매를 닦는 사람에게 완전한 꺼짐을 위해 바른 삼매가 있다. 삿된 앎을 가진 사람에게 완전한 꺼짐을 위해 바른 앎이 있다. 삿된 해탈을 실현한 사람에게 완전한 꺼짐을 위해 바른 해탈이 있다.
해태-혼침이 스며든 사람에게 완전한 꺼짐을 위해 해태-혼침으로부터 벗어남이 있다. 들뜬 사람에게 완전한 꺼짐을 위해 들뜨지 않음이 있다. 의심하는 사람에게 완전한 꺼짐을 위해 의심을 건넘이 있다. 화내는 사람에게 완전한 꺼짐을 위해 화내지 않음이 있다. 원한을 품은 사람에게 완전한 꺼짐을 위해 원한을 품지 않음이 있다. 위선적인 사람에게 완전한 꺼짐을 위해 위선적이지 않음이 있다. 악의를 품은 사람에게 완전한 꺼짐을 위해 악의를 품지 않음이 있다. 질투하는 사람에게 완전한 꺼짐을 위해 질투하지 않음이 있다. 인색한 사람에게 완전한 꺼짐을 위해 인색하지 않음이 있다. 교활한 사람에게 완전한 꺼짐을 위해 교활하지 않음이 있다. 사기 치는 사람에게 완전한 꺼짐을 위해 사기 치지 않음이 있다. 고집부리는 사람에게 완전한 꺼짐을 위해 고집부리지 않음이 있다. 오만한 사람에게 완전한 꺼짐을 위해 오만하지 않음이 있다. 완고한 사람에게 완전한 꺼짐을 위해 유연함이 있다. 나쁜 친구와 함께하는 사람에게 완전한 꺼짐을 위해 좋은 친구가 있다. 방일한 사람에게 완전한 꺼짐을 위해 불방일이 있다. 믿음이 없는 사람에게 완전한 꺼짐을 위해 믿음이 있다. 자책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 사람에게 완전한 꺼짐을 위해 자책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남의 책망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 사람에게 완전한 꺼짐을 위해 남의 책망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적게 배운 사람에게 완전한 꺼짐을 위해 많이 배움이 있다. 게으른 사람에게 완전한 꺼짐을 위해 정진의 유지가 있다. 사띠를 잊은 사람에게 완전한 꺼짐을 위해 사띠의 확립이 있다. 어리석은 사람에게 완전한 꺼짐을 위해 지혜를 갖춤이 있다. 세속적인 것에 오염되고, 고치기 힘들고, 놓기 어려운 사람에게 완전한 꺼짐을 위해 세속적인 것에 오염되지 않고, 고치기 쉽고, 잘 놓음이 있다.
이렇게, 쭌다여, 나는 더 높은 삶을 위한 방법을 설했고, 심(心)의 일어남의 방법을 설했고, 피함의 방법을 설했고, 높은 상태를 위한 방법을 설했고, 완전한 꺼짐을 위한 방법을 설했다. 쭌다여, 제자들을 위해 베푸는 자인 스승이 행해야 하는 것을, 연민하기 때문에, 나는 그대들을 위해서 했다. 쭌다여, 나무 밑이 있고, 빈집이 있다. 쭌다여, 선(禪)을 하라. 방일(放逸)하지 마라. 나중에 뉘우침이 있게 하지 마라. 이것이 우리의 이어지는 가르침[가르침의 근본-교본(敎本)]이다.”
세존은 이렇게 말했다. 마하쭌다 존자는 즐거워하면서 세존의 말씀을 기뻐했다.
에서 평화로움은 평화로운 으로
83번 여기, 쭌다여, 그대들은 더 높은 삶을 살아내야 한다. ‘남들은 폭력적일지라도 ~ 우리는 여기서 바른 해탈을 실현할 것이다.’라고 더 높은 삶을 살아내야 한다.
이 부분 중간쯤에, ‘남들은 거슬림 심(心)을 가질지라도 우리는 여기서 거슬리지 않은 심(心)을 가질 것이다.’라고
거슬림은 '거슬린' 으로,
87번, 거침 말을 하는 사람에게 완전한 꺼짐을 위해 거친 말을 하는 행위를 삼감이 있다.
거침은 거친
그리고 88번 바로 위 '시띠를 잊은 사람에게 완전한 꺼짐을 위해 사띠의 확립이 있다.'
시띠는 사띠로 수정해야 되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