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potaliyasuttaṃ (MN 54-뽀딸리야 경)
1. gahapativaggo, 4. potaliyasuttaṃ (MN 54-뽀딸리야 경)
이렇게 나는 들었다. 한때 세존은 앙굿따라빠에서 아빠나라는 앙굿따라빠들의 번화가에 머물렀다. 그때 세존은 오전에 옷차림을 바르게 하고 발우와 가사를 지니고 탁발을 위해서 아빠나로 들어갔다. 아빠나에서 탁발을 하여 공양을 마치고 탁발에서 돌아와 낮 동안의 머묾을 위해 밀림의 숲으로 갔다. 그 밀림의 숲에 들어간 뒤에 어떤 나무 밑에서 낮 동안을 앉아있었다. 옷을 잘 갖춰 입고 일산을 들고 신발을 신고 걸으며 뒤따라 움직이던 뽀딸리야 장자도 그 밀림의 숲으로 갔다. 가서는 그 밀림의 숲으로 들어간 뒤에 세존에게 왔다. 와서는 세존과 함께 인사를 나누었다. 유쾌하고 기억할만한 이야기를 주고받은 뒤 한 곁에 섰다. 한 곁에 선 뽀딸리야 장자에게 세존은 이렇게 말했다. ― “장자여, 자리들이 있습니다. 원한다면 앉으십시오.”라고. 이렇게 말했을 때, 뽀딸리야 장자는 “사문 고따마는 장자라는 말로 나를 호칭한다.”라며 화나고 불쾌해서 침묵했다. 두 번째도 세존은 … 세 번째도 세존은 뽀딸리야 장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 “장자여, 자리들이 있습니다. 원한다면 앉으십시오.”라고. 이렇게 말했을 때, 뽀딸리야 장자는 “사문 고따마는 장자라는 말로 나를 호칭한다.”라며 화나고 불쾌해서 세존에게 “고따마 존자여, 그대가 나에게 장자라는 말로 호칭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고, 어울리지 않습니다.”라고 말했다. “장자여, 그대에게 그대의 모습과 그대의 특성과 그대의 인상은 장자의 것과 같습니다.” “그렇지만, 고따마 존자여, 나는 모든 업(業)을 중단하고, 모든 삶에서 물러났습니다.” “장자여, 그대는 어떻게 모든 업을 중단하고, 모든 삶에서 물러났습니까?” “여기, 고따마 존자여, 나는 나에게 있던 재산이거나 곡물이거나 은이거나 금이거나 모든 것을 아들들에게 주었습니다. 거기서 훈계하지 않고 충고하지 않는 나는 음식과 옷만으로 만족하며 삽니다. 이렇게, 고따마 존자여, 나는 모든 업을 중단하였고, 모든 삶에서 물러났습니다.” “장자여, 그대가 말하는 삶에서 물러남과 성스러운 율(律)에서의 삶에서 물러남은 다릅니다.” “대덕이시여, 그렇다면 성스러운 율에서의 삶에서 물러남은 어떻게 다릅니까? 대덕이시여, 저에게 성스러운 율에서의 삶에서 물러나는 법을 설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장자여, 듣고 잘 사고하십시오. 나는 말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대덕이시여.”라고 뽀딸리야 장자는 세존에게 대답했다.
세존은 이렇게 말했다. ― “장자여, 이런 여덟 가지 법들이 성스러운 율에서의 삶에서 물러남으로 이끕니다. 어떤 여덟입니까? 생명을 해치지 않음에 의지하여 생명을 해침을 버려야 합니다. 주어진 것을 가짐에 의지하여 주지 않는 것을 가짐을 버려야 합니다. 진실을 말함에 의지하여 거짓을 말함을 버려야 합니다. 험담하지 않음에 의지하여 험담하는 말을 버려야 합니다. 애착과 망(望) 없음에 의지하여 애착과 망(望)을 버려야 합니다. 비난과 다툼 없음에 의지하여 비난과 다툼을 버려야 합니다. 화와 절망 없음에 의지하여 화와 절망을 버려야 합니다. 오만하지 않음에 의지하여 오만을 버려야 합니다. 이것이, 장자여, 상세한 분석 없이 간략하게 말한, 성스러운 율에서의 삶에서 물러남으로 이끄는 여덟 가지 법입니다.” “대덕이시여, 세존에 의해 저에게 상세한 설명 없이 간략하게 말해진, 성스러운 율에서의 삶에서 물러남으로 이끄는 이 여덟 가지 법들을 연민을 일으켜 상세히 분석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그렇다면, 장자여, 듣고 잘 사고하십시오. 나는 말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대덕이시여.”라고 뽀딸리야 장자는 세존에게 대답했다. 세존은 이렇게 말했다. ―
“‘생명을 해치지 않음에 의지하여 생명을 해침을 버려야 한다.’라고 말한 것은 무엇을 연(緣)하여 말했습니까? 여기, 장자여, 성스러운 제자는 이렇게 숙고합니다. ― ‘어떤 족쇄들을 원인으로 나는 생명을 해치는 자가 될 것이다. 나는 그 족쇄들을 버린 뒤에 물러남을 위해 실천한다. 내가 만약 생명을 해치는 자라면 생명을 해침을 조건으로 나 자신도 나를 비난할 것이고, 생명을 해침을 조건으로 나를 알고 있는 현명한 자들도 나를 비난할 것이다. 생명을 해침을 조건으로 몸이 무너져 죽은 뒤에 비참한 존재가 예상된다. 생명을 해침은 족쇄이고 장애이다. 그러나 이렇게 번뇌와 걱정과 열기를 생기게 하는 조건인 생명을 해침을 피한 자에게는 번뇌와 걱정과 열기가 없다.’라고. ‘생명을 해치지 않음에 의지하여 생명을 해침을 버려야 한다.’라고 말한 것은 이것을 연(緣)하여 말했습니다.
‘주어진 것을 가짐에 의지하여 주지 않는 것을 가짐을 버려야 한다.’라고 말한 것은 무엇을 연하여 말했습니까? 여기, 장자여, 성스러운 제자는 이렇게 숙고합니다. ― ‘어떤 족쇄들을 원인으로 나는 주지 않는 것을 가지는 자가 될 것이다. 나는 그 족쇄들을 버린 뒤에 물러남을 위해 실천한다. 내가 만약 주지 않는 것을 가지는 자라면 주지 않는 것을 가짐을 조건으로 나 자신도 나를 비난할 것이고, 주지 않는 것을 가짐을 조건으로 나를 알고 있는 현명한 자들도 나를 비난할 것이다. 주지 않는 것을 가짐을 조건으로 몸이 무너져 죽은 뒤에 비참한 존재가 예상된다. 주지 않는 것을 가짐은 족쇄이고 장애이다. 그러나 이렇게 번뇌와 걱정과 열기를 생기게 하는 조건인 주지 않는 것을 가짐을 피한 자에게는 번뇌와 걱정과 열기가 없다.’라고. ‘주어진 것을 가짐에 의지하여 주지 않는 것을 가짐을 버려야 한다.’라고 말한 것은 이것을 연하여 말했습니다.
‘진실을 말함에 의지하여 거짓을 말함을 버려야 한다.’라고 말한 것은 무엇을 연하여 말했습니까? 여기, 장자여, 성스러운 제자는 이렇게 숙고합니다. ― ‘어떤 족쇄들을 원인으로 나는 거짓을 말하는 자가 될 것이다. 나는 그 족쇄들을 버린 뒤에 물러남을 위해 실천한다. 내가 만약 거짓을 말하는 자라면 거짓을 말함을 조건으로 나 자신도 나를 비난할 것이고, 거짓을 말함을 조건으로 나를 알고 있는 현명한 자들도 나를 비난할 것이다. 거짓을 말함을 조건으로 몸이 무너져 죽은 뒤에 비참한 존재가 예상된다. 거짓을 말함은 족쇄이고 장애이다. 그러나 이렇게 번뇌와 걱정과 열기를 생기게 하는 조건인 거짓을 말함을 피한 자에게는 번뇌와 걱정과 열기가 없다.’라고. ‘진실을 말함에 의지하여 거짓을 말함을 버려야 한다.’라고 말한 것은 이것을 연하여 말했습니다.
‘험담하지 않음에 의지하여 험담하는 행위를 버려야 한다.’라고 말한 것은 무엇을 연하여 말했습니까? 여기, 장자여, 성스러운 제자는 이렇게 숙고합니다. ― ‘어떤 족쇄들을 원인으로 나는 험담하는 행위를 하는 자가 될 것이다. 나는 그 족쇄들을 버린 뒤에 물러남을 위해 실천한다. 내가 만약 험담하는 행위를 하는 자라면 험담하는 행위를 조건으로 나 자신도 나를 비난할 것이고, 험담하는 행위를 조건으로 나를 알고 있는 현명한 자들도 나를 비난할 것이다. 험담하는 행위를 조건으로 몸이 무너져 죽은 뒤에 비참한 존재가 예상된다. 험담하는 행위는 족쇄이고 장애이다. 그러나 이렇게 번뇌와 걱정과 열기를 생기게 하는 조건인 험담하는 행위를 피한 자에게는 번뇌와 걱정과 열기가 없다.’라고. ‘험담하지 않음에 의지하여 험담하는 행위를 버려야 한다.’라고 말한 것은 이것을 연하여 말했습니다.
‘애착과 망(望) 없음에 의지하여 애착과 망을 버려야 한다.’라고 말한 것은 무엇을 연하여 말했습니까? 여기, 장자여, 성스러운 제자는 이렇게 숙고합니다. ― ‘어떤 족쇄들을 원인으로 나는 애착과 망을 가진 자가 될 것이다. 나는 그 족쇄들을 버린 뒤에 물러남을 위해 실천한다. 내가 만약 애착과 망을 가진 자라면 애착과 망을 조건으로 나 자신도 나를 비난할 것이고, 애착과 망을 조건으로 나를 알고 있는 현명한 자들도 나를 비난할 것이다. 애착과 망을 조건으로 몸이 무너져 죽은 뒤에 비참한 존재가 예상된다. 애착과 망은 족쇄이고 장애이다. 그러나 이렇게 번뇌와 걱정과 열기를 생기게 하는 조건인 애착과 망을 피한 자에게는 번뇌와 걱정과 열기가 없다.’라고. ‘애착과 망 없음에 의지하여 애착과 망을 버려야 한다.’라고 말한 것은 이것을 연하여 말했습니다.
‘비난과 다툼 없음에 의지하여 비난과 다툼을 버려야 한다.’라고 말한 것은 무엇을 연하여 말했습니까? 여기, 장자여, 성스러운 제자는 이렇게 숙고합니다. ― ‘어떤 족쇄들을 원인으로 나는 비난과 다툼을 가진 자가 될 것이다. 나는 그 족쇄들을 버린 뒤에 물러남을 위해 실천한다. 내가 만약 비난과 다툼을 가진 자라면 비난과 다툼을 조건으로 나 자신도 나를 비난할 것이고, 비난과 다툼을 조건으로 나를 알고 있는 현명한 자들도 나를 비난할 것이다. 비난과 다툼을 조건으로 몸이 무너져 죽은 뒤에 비참한 존재가 예상된다. 비난과 다툼은 족쇄이고 장애이다. 그러나 이렇게 번뇌와 걱정과 열기를 생기게 하는 조건인 비난과 다툼을 피한 자에게는 번뇌와 걱정과 열기가 없다.’라고. ‘비난과 다툼 없음에 의지하여 비난과 다툼을 버려야 한다.’라고 말한 것은 이것을 연하여 말했습니다.
‘화와 절망 없음에 의지하여 화와 절망을 버려야 한다.’라고 말한 것은 무엇을 연하여 말했습니까? 여기, 장자여, 성스러운 제자는 이렇게 숙고합니다. ― ‘어떤 족쇄들을 원인으로 나는 화와 절망을 가진 자가 될 것이다. 나는 그 족쇄들을 버린 뒤에 물러남을 위해 실천한다. 내가 만약 화와 절망을 가진 자라면 화와 절망을 조건으로 나 자신도 나를 비난할 것이고, 화와 절망을 조건으로 나를 알고 있는 현명한 자들도 나를 비난할 것이다. 화와 절망을 조건으로 몸이 무너져 죽은 뒤에 비참한 존재가 예상된다. 화와 절망은 족쇄이고 장애이다. 그러나 이렇게 번뇌와 걱정과 열기를 생기게 하는 조건인 화와 절망을 피한 자에게는 번뇌와 걱정과 열기가 없다.’라고. ‘화와 절망 없음에 의지하여 화와 절망을 버려야 한다.’라고 말한 것은 이것을 연하여 말했습니다.
‘오만하지 않음에 의지하여 오만을 버려야 한다.’라고 말한 것은 무엇을 연하여 말했습니까? 여기, 장자여, 성스러운 제자는 이렇게 숙고합니다. ― ‘어떤 족쇄들을 원인으로 나는 오만한 자가 될 것이다. 나는 그 족쇄들을 버린 뒤에 물러남을 위해 실천한다. 내가 만약 오만한 자라면 오만을 조건으로 나 자신도 나를 비난할 것이고, 오만을 조건으로 나를 알고 있는 현명한 자들도 나를 비난할 것이다. 오만을 조건으로 몸이 무너져 죽은 뒤에 비참한 존재가 예상된다. 오만은 족쇄이고 장애이다. 그러나 이렇게 번뇌와 걱정과 열기를 생기게 하는 조건인 오만을 피한 자에게는 번뇌와 걱정과 열기가 없다.’라고. ‘오만하지 않음에 의지하여 오만을 버려야 한다.’라고 말한 것은 이것을 연하여 말했습니다.
장자여, 이것이 성스러운 율에서의 삶에서 물러남으로 이끄는 간략하게 말해진 여덟 가지 법들에 대한 상세한 분석입니다. 그러나 오직 그만큼이 성스러운 율에서 모든 것에 걸쳐 완전하게 삶에서 물러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대덕이시여, 어떻게 성스러운 율에서 모든 것에 걸쳐 완전하게 삶에서 물러나는 것입니까? 대덕이시여, 세존께서 저에게 성스러운 율에서 모든 것에 걸쳐 완전하게 삶에서 물러나는 법을 설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장자여, 듣고 잘 사고하십시오. 나는 말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대덕이시여.”라고 뽀딸리야 장자는 세존에게 대답했다. 세존은 이렇게 말했다. ―
“예를 들면, 장자여, 배고프고 허약해서 고통받는 개가 도살장 앞에 나타날 것입니다. 숙련된 백정이나 백정의 제자가 배고프고 허약한 그 개에게 살점은 한 점도 없이 완전히 발라졌고 피만 조금 묻은 뼈다귀를 던져줄 것입니다. 장자여, 이를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 개가 살점은 한 점도 없이 완전히 발라졌고 피만 조금 묻은 이 뼈다귀를 핥아서 배고프고 허약함을 달랠 수 있겠습니까?”
“아닙니다, 대덕이시여.”
“그 원인은 무엇입니까?”
“대덕이시여, 이 뼈다귀는 살점은 한 점도 없이 완전히 발라졌고 피만 조금 묻어 있습니다. 그 개는 오히려 지치고 짜증이 날 것입니다.”
“이처럼, 장자여, 성스러운 제자는 이렇게 숙고합니다. ― ‘뼈다귀의 비유를 통해 세존께서 말씀하셨듯 소유의 삶은 괴로움과 절망이 많다. 여기서 위험은 반복된다.’라고. 이렇게 이것을 있는 그대로 바른 지혜로 보아서 다양함에 의지한 다양함의 평정을 버린 뒤에 물질 세상에 대한 집착이 온전하게 남김없이 소멸하는 곳에서 단일함에 의지한 단일함의 평정을 닦습니다.
예를 들면, 장자여, 독수리나 까마귀나 매가 고기 조각을 물고 날아갈 것입니다. 그것을 독수리들이나 까마귀들이나 매들이 뒤따라 날아가서 부리로 쫄 것이고, 발톱으로 공격할 것입니다. 장자여, 이를 어떻게 생각합니까? 만약 그 독수리나 까마귀나 매가 그 고기 조각을 빨리 놓지 않으면 그 때문에 그는 죽거나 죽을 만큼의 고통을 겪지 않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대덕이시여.”
“이처럼, 장자여, 성스러운 제자는 이렇게 숙고합니다. ― ‘고기 조각의 비유를 통해 세존께서 말씀하셨듯 소유의 삶은 괴로움과 절망이 많다. 여기서 위험은 반복된다.’라고. 이렇게 이것을 있는 그대로 바른 지혜로 보아서 다양함에 의지한 다양함의 평정을 버린 뒤에 물질 세상에 대한 집착이 온전하게 남김없이 소멸하는 곳에서 단일함에 의지한 단일함의 평정을 닦습니다.
예를 들면, 장자여, 어떤 사람이 불타는 건초 횃불을 가지고 바람을 향해서 갈 것입니다. 장자여, 이를 어떻게 생각합니까? 만약 그 사람이 그 불타는 건초 횃불을 빨리 놓지 않으면 그 때문에 그는 손을 데거나, 팔을 데거나, 여기저기 다른 부위들을 델 것입니다. 그는 죽거나 죽을 만큼의 고통을 겪지 않겠습니까?”
“evaṃ, bhante”.
“그렇습니다, 대덕이시여.”
“이처럼, 장자여, 성스러운 제자는 이렇게 숙고합니다. ― ‘건초 횃불의 비유를 통해 세존께서 말씀하셨듯 소유의 삶은 괴로움과 절망이 많다. 여기서 위험은 반복된다.’라고. 이렇게 이것을 있는 그대로 바른 지혜로 보아서 다양함에 의지한 다양함의 평정을 버린 뒤에 물질 세상에 대한 집착이 온전하게 남김없이 소멸하는 곳에서 단일함에 의지한 단일함의 평정을 닦습니다.
예를 들면, 장자여, 사람 키 남짓하고 불꽃이나 연기가 없는 숯으로 가득한 숯불 구덩이가 있습니다. 그런데 살기를 원하고 죽기를 원하지 않고 즐거움을 원하고 괴로움을 혐오하는 사람이 올 것입니다. 그를 힘 센 두 사람이 각각 한쪽 팔을 잡고 숯불 구덩이로 밀어 넣을 것입니다. 장자여, 이것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 사람은 빠지지 않기 위해 몸을 웅크리지 않겠습니까?”
“evaṃ, bhante”.
“그렇습니다, 대덕이시여.”
“taṃ kissa hetu”?
“그 원인은 무엇입니까?”
“대덕이시여, 그 사람은 ‘나는 숯불 구덩이 떨어질 것이다. 그러면 죽거나 죽을 만큼의 고통을 겪을 것이다.’라고 압니다.”
“이처럼, 장자여, 성스러운 제자는 이렇게 숙고합니다. ― ‘숯불 구덩이의 비유를 통해 세존께서 말씀하셨듯 소유의 삶은 괴로움과 절망이 많다. 여기서 위험은 반복된다.’라고. 이렇게 이것을 있는 그대로 바른 지혜로 보아서 다양함에 의지한 다양함의 평정을 버린 뒤에 물질 세상에 대한 집착이 온전하게 남김없이 소멸하는 곳에서 단일함에 의지한 단일함의 평정을 닦습니다.
예를 들면, 장자여, 어떤 사람이 꿈꾸는 동안 마음에 드는 공원과 마음에 드는 숲과 아름다운 땅과 아름다운 연못을 볼 것입니다. 꿈에서 깬 그는 아무것도 보지 못할 것입니다. 이처럼, 장자여, 성스러운 제자는 이렇게 숙고합니다. ― ‘꿈의 비유를 통해 세존께서 말씀하셨듯 소유의 삶은 괴로움과 절망이 많다. 여기서 위험은 반복된다.’라고. 이렇게 이것을 있는 그대로 바른 지혜로 보아서 다양함에 의지한 다양함의 평정을 버린 뒤에 물질 세상에 대한 집착이 온전하게 남김없이 소멸하는 곳에서 단일함에 의지한 단일함의 평정을 닦습니다.
예를 들면, 장자여, 어떤 사람이 세련된 수레와 진귀한 보석이 박힌 귀걸이를 빌린 뒤에 그 빌린 물품들로 치장하고 시장에 갈 것입니다. 이런 그를 사람들이 보고서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 ‘존자들이여, 이 사람은 부자입니다. 부자들은 이렇게 재물을 즐깁니다.’라고. 이런 그를 주인이 어디서든 볼 것이고 거기서 그것들을 가져갈 것입니다. 장자여, 이를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 사람에게 변화가 있지 않겠습니까?”
“evaṃ, bhante”.
“그렇습니다, 대덕이시여.”
“taṃ kissa hetu”?
“그 원인은 무엇입니까?”
“대덕이시여, 주인들이 자기의 것들을 가져갔습니다.”
“이처럼, 장자여, 성스러운 제자는 이렇게 숙고합니다. ― ‘빌린 물건의 비유를 통해 세존께서 말씀하셨듯 소유의 삶은 괴로움과 절망이 많다. 여기서 위험은 반복된다.’라고. 이렇게 이것을 있는 그대로 바른 지혜로 보아서 다양함에 의지한 다양함의 평정을 버린 뒤에 물질 세상에 대한 집착이 온전하게 남김없이 소멸하는 곳에서 단일함에 의지한 단일함의 평정을 닦습니다.
예를 들면, 장자여, 마을이나 번화가에서 멀지 않은 곳에 울창한 숲이 있습니다. 거기에 잘 익고 열매가 많은 과일나무가 있는데 어떤 열매들도 땅에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때 과일을 원하고 과일을 구하고 과일을 찾아 움직이는 어떤 사람이 올 것입니다. 그는 그 숲 깊숙이 들어온 뒤에 잘 익고 열매가 많은 나무를 볼 것입니다. 그에게 이런 생각이 들 것입니다. ― ‘이 과일나무는 잘 익고 열매가 많은데 땅에 떨어진 열매들은 하나도 없다. 그런데 나는 나무에 올라갈 줄 안다. 나무에 올라가서 먹을 만큼 먹고 주머니에 채워야겠다.’라고. 그는 나무에 올라가서 먹을 만큼 먹고 주머니에 채울 것입니다. 그때 과일을 원하고 과일을 구하고 과일을 찾아 움직이는 두 번째 사람이 날이 선 도끼를 가지고 올 것입니다. 그는 그 숲 깊숙이 들어온 뒤에 잘 익고 열매가 많은 나무를 볼 것입니다. 그에게 이런 생각이 들 것입니다. ― ‘이 과일나무는 잘 익고 열매가 많은데 땅에 떨어진 열매들은 하나도 없다. 그런데 나는 나무에 올라갈 줄 모른다. 이 나무를 뿌리로부터 자른 뒤에 먹을 만큼 먹고 주머니를 채워야겠다.’라고. 그는 그 나무를 뿌리로부터 자를 것입니다. 장자여, 이를 어떻게 생각합니까? 만약 나무에 올라간 먼저 사람이 재빨리 내려오지 않으면 나무가 넘어질 때 손이 부러지거나 발이 부러지거나 다른 부분들이 부러질 것입니다. 그러면 그는 죽거나 죽을 만큼의 고통을 겪지 않겠습니까?”
“evaṃ, bhante”.
“그렇습니다, 대덕이시여.”
“이처럼, 장자여, 성스러운 제자는 이렇게 숙고합니다. ― ‘나무 열매의 비유를 통해 세존께서 말씀하셨듯 소유의 삶은 괴로움과 절망이 많다. 여기서 위험은 반복된다.’라고. 이렇게 이것을 있는 그대로 바른 지혜로 보아서 다양함에 의지한 다양함의 평정을 버린 뒤에 물질 세상에 대한 집착이 온전하게 남김없이 소멸하는 곳에서 단일함에 의지한 단일함의 평정을 닦습니다.
그런 그 성스러운 제자는, 장자여, 이 위없는 평정과 청정한 사띠[사념청정(捨念淸淨)] 덕분에 여러 이전의 존재 상태[전생]를 기억합니다. 즉 — 한 번의 생, 두 번의 생, 세 번의 생, 네 번의 생, 다섯 번의 생, 열 번의 생, 스무 번의 생, 서른 번의 생, 마흔 번의 생, 쉰 번의 생, 백 번의 생, 천 번의 생, 십만 번의 생, 세계가 줄어드는[진화] 여러 겁, 세계가 자라나는[퇴보] 여러 겁, 세계가 줄어들고 자라나는 여러 겁을 기억합니다. — ‘이러이러한 곳에서 나는 이런 이름이었고, 이런 종족이었고, 이런 용모였고, 이런 음식을 먹었고, 행복과 괴로움을 이렇게 경험했고, 수명의 한계는 이러했다. 나는 거기에서 죽어 이러이러한 곳에 태어났다. 그곳에서 나는 이런 이름이었고, 이런 종족이었고, 이런 용모였고, 이런 음식을 먹었고, 행복과 괴로움을 이렇게 경험했고, 수명의 한계는 이러했다. 나는 거기에서 죽어 여기에 태어났다.’라고. 이처럼 상태와 함께, 상세한 설명과 함께 여러 이전의 존재 상태를 기억합니다.
그런 그 성스러운 제자는, 장자여, 이 위없는 평정과 청정한 사띠[사념청정(捨念淸淨)] 덕분에 청정하고 인간을 넘어선 신성한 눈[천안(天眼)]으로 중생들이 죽고 태어나고, 저열하고 뛰어나고, 잘생기고 못생기고, 좋은 곳[선처(善處)]에 가고 나쁜 곳[악처(惡處)]에 가는 것을 봅니다. 업에 따라서 가는 중생들을 분명히 압니다. — ‘이들은 몸으로 나쁜 삶을 살고 말로 나쁜 삶을 살고 의(意)로 나쁜 삶을 살고, 성자들을 비방하고, 삿된 견해를 가졌고, 사견업(邪見業)을 지었다. 이들은 몸이 무너져 죽은 뒤에 상실과 비탄의 상태, 비참한 존재, 벌 받는 상태, 지옥에 태어났다. 그러나 이들은 몸으로 좋은 삶을 살고 말로 좋은 삶을 살고 의(意)로 좋은 삶을 살고, 성자들을 비방하지 않고, 바른 견해를 지니고, 정견업(正見業)을 지었다. 이들은 몸이 무너져 죽은 뒤에 좋은 곳, 하늘 세상에 태어났다.’라고. 이렇게 그는 청정하고 인간을 넘어선 신성한 눈으로 중생들이 죽고 태어나는 것을 본다. 저열하고 뛰어나고, 잘생기고 못생기고, 좋은 곳에 가고 나쁜 곳에 가는 등 업에 따라서 가는 중생들을 분명히 압니다.
그런 그 성스러운 제자는, 장자여, 이 위없는 평정과 청정한 사띠[사념청정(捨念淸淨)] 덕분에 번뇌들이 부서졌기 때문에 번뇌가 없는 심해탈(心解脫)과 혜해탈(慧解脫)을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실답게 안 뒤에 실현하고 성취하여 머뭅니다. 이만큼이, 장자여, 성스러운 율에서 모든 것에 걸쳐 완전하게 삶에서 물러나는 것입니다.
장자여, 그것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성스러운 율에서 모든 것에 걸쳐 완전하게 삶에서 물러나는 것이 있는 것처럼 그대도 이러한 삶에서 물러남을 자신에게서 관찰합니까?”
“대덕이시여, 어떻게 저에게 성스러운 율에서 모든 것에 걸쳐 완전하게 삶에서 물러남이 있겠습니까? 대덕이시여, 저는 성스러운 율에서 모든 것에 걸쳐 완전하게 삶에서 물러남에서 멀리 있습니다. 대덕이시여, 이전에 저희는 외도 유행승들을 좋은 가문이 아닌데도 좋은 가문이라고 생각했고, 좋은 가문이 아닌데도 좋은 가문에 드리는 음식을 드렸고, 좋은 가문이 아닌데도 좋은 가문의 자리에 모셨습니다. 그러나 대덕이시여, 저희는 비구들을 좋은 가문인데도 좋은 가문이 아니라고 생각했고, 좋은 가문인데도 좋지 않은 가문에 드리는 음식을 드렸고, 좋은 가문인데도 좋지 않은 가문의 자리에 모셨습니다. 그러나 대덕이시여, 이제 저희는 좋은 가문이 아닌 외도 유행승들을 사실대로 좋은 가문이 아니라고 알 것입니다. 안 좋은 가문에 어울리는 안 좋은 가문에 드리는 음식을 드릴 것입니다. 안 좋은 가문에 어울리는 안 좋은 가문을 모시는 자리에 모실 것입니다. 그리고 대덕이시여, 좋은 가문인 비구들을 사실대로 좋은 가문이라고 알 것입니다. 좋은 가문에 어울리는 좋은 가문에 드리는 음식을 드릴 것입니다. 좋은 가문에 어울리는 좋은 가문을 모시는 자리에 모실 것입니다. 대덕이시여, 세존께서는 저에게 사문에 대한 애정, 사문에 대한 믿음, 사문에 대한 존경을 알게 하셨습니다.
정말 기쁩니다, 대덕이시여. 정말 기쁩니다, 대덕이시여! 예를 들면, 대덕이시여, 넘어진 자를 일으킬 것입니다. 덮여있는 것을 걷어낼 것입니다. 길 잃은 자에게 길을 알려줄 것입니다. ‘눈 있는 자들은 모습들을 본다.’라며 어둠 속에서 기름 등불을 들 것입니다. 이처럼, 세존(世尊)에 의해서 여러 가지 방법으로 설해진 법이 있습니다. 대덕이시여, 저는 의지처인 세존(世尊) 그리고 가르침과 비구 상가에게로 갑니다. 세존(世尊)께서는 저를 오늘부터 살아있는 동안 귀의한 재가 신자로 받아 주십시오.”